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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40대의 아이돌, 블루스맨 '씨 없는 수박'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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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40대의 아이돌, 블루스맨 '씨 없는 수박' 김대중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06.17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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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노민규기자]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검은색 정장을 쫙 빼입은 채 무대에 오른다. 30대인지 40대인지 가늠하기 힘든 묘한 얼굴, 걸걸한 목소리의 그가 통기타와 하모니를 불며 가리고 싶은 현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해학과 풍자로 노래할 때 대중은 열광한다.

▲ '씨없는 수박' 김대중의 홍대 클럽 공연 모습[사진=붕가붕가레코드 제공]

 

“아빠가 씨없는 수박이라니 난 누구지”(씨없는 수박), “그대라면 모든지 다 퍼주고 싶었지. 하지만 내가 퍼준 것들을 그대는 모두 총알로 돌려주었네. 퍼주기 퍼주기 퍼주기”(햇볕정책), “나는 널 만난 지 석 달이 됐고, 너는 임신한지 사개월짼데, 그땐 어째야하나”(유정천리), “불효자는 울지 않고 놉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쉬지 않고 놉니다, 택시비가 없어 아침에 들어옵니다”(불효자는 놉니다), “삼백에 삼십으로 신월동에 가보니 동네 옥상으로 온종일 끌려 다니네. 이것은 연탄창고 아닌가.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아요. 평양냉면 먹고싶네”(300/30).

 

◆ 홍대 인디신에 혜성같이 등장 ‘블루스계의 싸이’로 인기몰이

지난해 인디레이블 붕가붕가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1집 씨없는 수박’으로 한국대중음악시상식 올해의 노래, 최우수 록음악 부문 후보에 올랐다. 최근 그의 삶과 음악을 들여다본 다큐멘터리 영화 ‘씨없는 수박 김대중’이 상상마당 음악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16일 오후 블루스맨 김대중을 만나러 그의 놀이터인 홍대앞으로 향했다. 연한 하늘색 스트라이프 정장에 기타를 매고 나타난 그와 생맥주 잔을 부딪쳤다.

‘본명은 김대중. 별명은 ’블루스계의 싸이‘. 영화배우, 연출팀 활동, 시나리오 집필, 피자배달, 밴드 매니저 등을 전전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블루스에 가요 정서를 접목한 독특한 음악을 선보인다’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얄팍한 사전 정보였다. 만나자마자 김대중은 “나이 들고, 튀는 이름의 남자가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하니까 흥미로워하는 거 아닐까”라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진단했다.

“아버님이 집안 항렬을 따라 과감하게 이름을 지으셨다. 어렸을 땐 모르다가 초등학교 시절 경상도 출신 담임선생님이 매일 ‘김대중이~’ 하고 놀리셨다. 별명은 ‘평민당’이었다. 오히려 이런 기억이 나의 정치적 자극을 늦췄다. 트라우마 탓에 신문 정치면을 일부러 안보곤 했으니까.”

 

◆ 대학 연영과 입학 이후 단역배우, 영화연출부, 피자배달, 매니저 전전

고교시절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져 지내야 했을 만큼 어려운 가정형편이었다.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 지를 절감했다. 가장 밝고 행복했어야 할 시기에 어두운 터널에 갇혀 지냈던 그는 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3학년 때 휴학했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입봉 감독 밑에서 연출부 활동을 하며 시나리오 집필에 공을 들이느라 대학을 자퇴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준비하던 영화가 계속 엎어지며 앞날 캄캄한 반백수 처지가 됐고, 방황의 시기가 이어졌다. 집안의 걱정도 쌓여만 갔다.

“함께 작업하던 감독이 코미디 전문이었으나 이창동 감독을 존경하는 난 문학적인 영화를 지향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노랫말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신(Scene) 하나 정도 쓰는 노력만 들여도 되니까. 되돌아보면 노래는 영화를 하던 당시의 정열을 대리만족하는 행위이지 싶다. 물론 노래는 혼자 할 수 있는 거니까, 영화에 비해 좋은 점이 많다.”

 

◆ 한 편의 영화같은 노랫말 “세상사에 대한 충고 불편하지 않게 담아내”

탄탄한 내러티브와 살아 있는 캐릭터, 디테일을 갖춘 김대중의 노래들이 한 편의 영화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런 히스토리 때문이다. 대학시절 밴드활동을 했던 그는 점차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블루스에 매료됐다. 밴드와 함께하지 않아도 되는 음악인 데다 블루스에 내재된 역설이나 반어 같은 특유의 내러티브, 음악과 삶이 끈적끈적하게 합치되는 점이 그를 사로잡았다.

크레이그 핸슨은 “블루스는 현실의 고통을 승화하며 자리잡은 양식"이라 정의내린바 있다. 휘청대는 남자의 자기 고백인 김대중의 음악은 듣다 보면 웃기고, 듣고 나면 슬프다. 블루스의 정신과 충분히 맞닿아 있는 이유다.

30세에 인도 배낭여행을 하며 미국의 포크 뮤지션 밥 딜런의 1집을 들으며 너무 큰 재미를 느꼈다. ‘이 사람처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포크와 블루스를 미친 듯이 연습했다. 영어가사의 느낌을 어떻게 한국어로 구현할 지부터 블루스의 정서, 뉘앙스를 카피하는데 매진했다.

 

“1집은 사운드와 테크닉으로 승부를 건 음반이 아니다. ‘이런 음악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꼰대 같은 소린데 세상사에 대한 나의 충고가 대중에게 싫지 않게 들려졌으면 했다. 보통은 청취층을 20대 여성이나 젊은 세대를 겨냥하지만 특정 집단을 타기팅하지 않았다. 40대 남성들이 내 음악을 좋아한다고 한다.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만의 정서가 있기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나 싶다.”

◆ 2009년부터 가족들과 함께 화곡동에 요양원 운영하며 인생 성찰

지난 2009년 서울 화곡동에 요양원을 설립, 운영해오고 있다. 요양보호사로 활동했던 어머니의 꿈을 온가족이 달라붙어 이룬 셈이다. 이를 위해 김대중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 할머니들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노래교실을 진행해오고 있다. 요양원 3층이 김대중 가족의 보금자리다. 삶과 죽음, 인생의 말년이 민낯으로 숨 쉬는 이곳에서의 6년은 그에게 적잖은 흔적을 남겼다. 1집 수록곡 ‘요양원 블루스’는 이런 경험이 진하게 밴 노래다.

 

“할머니들을 위한 노래교실을 하면서 가요무대 악보책을 섭렵했다. 자꾸 듣다보니 좋아져서 이런 영향이 1집에 많이 투영된 것 같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생기면 장의사 역할까지 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헛헛해지고 진이 다 빠진다. 그러다보니 사는 순간만큼은 즐겁게 살자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할머니들한테 장난도 많이 친다. 술 먹고 ‘누나’라고 부르는 패륜아다. 하하.”

요양원 일이 끝나면 막걸리 한잔을 걸친 뒤 불콰해진 얼굴로 홍대 놀이터나 공원에서 기타치고 노래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그가 이제 홍대 클럽 무대 위에서 관객의 환호를 받는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21세기 한국 대중가요 지형도에서 독특한 지점을 새긴 김대중은 “진정한 슬픔을 음악에 구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취재후기] 왜 씨 없는 수박일까. 노래 가사처럼 혹시?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들려졌다. 1920년대에 활동했던 미국의 전설적인 맹인 블루스맨인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의 예처럼 블루스 뮤지션의 이름을 지을 때 ‘장애’ ‘과일’ ‘대통령 이름’ 순서로 정하는데 갑자기 술자리에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이었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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