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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현장Q] 여성체육인, 일-가정 모두 잡고싶다면 이렇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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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현장Q] 여성체육인, 일-가정 모두 잡고싶다면 이렇게 하라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5.11.24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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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여는 여성체육포럼’...'우생순' 임오경 "행복한 여자라 생각해, 날아오는 공 피하지 말고 던져라"

[스포츠Q(큐) 민기홍 기자] 여성체육인들이 속에 담아둔 이야기들을 마음껏 쏟아내며 활짝 웃었다. 육아와 가사로 지쳐가는 젊은 여성들은 선배들의 경험담에 힘을 얻었고 갖은 역경을 딛고 굳건히 입지를 다진 ‘슈퍼우먼’들은 후배들이 자신들의 전철을 밟지 않게끔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신문이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제1회 ‘미래를 여는 여성체육포럼’이 24일 서울 중구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개최됐다. 일과 가정을 한꺼번에 돌보기 힘든 여성체육인의 현실을 살피고 은퇴 후에도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

청중들은 ‘엄마 연사’의 이야기를 듣고선 잠시나마 집 생각을 잊었다. 임오경 서울시청 핸드볼 감독은 “7시에 아이들 아침밥을 챙겨주고 학교를 등교시키고선 이곳으로 왔다”고, 서아람 한남대 골프레저학과 교수는 “대회 중계가 있어서 짐을 싸서 왔다. 어젯밤 갈비찜을 해놓고 나왔다”고 귀띔했다.

▲ 일과 가사를 병행하기 힘든 여성체육인을 위한 포럼이 개최됐다. 수많은 '워킹맘'들이 모여 연사들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였다. [사진=여성체육대상조직위원회 제공]

여성체육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일·가정 양립 방향 모색’이 역사적인 여성체육 포럼의 첫 주제였다. 박영옥 한국스포츠개발원장이 포문을 열었다. 그는 1980년 체육과학연구원으로 출범한 한국스포츠개발원에 여성으로는 35년 만에 처음으로 원장으로 취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 박영옥 한국스포츠개발원장 “출산율 저하 심각, 체육단체부터 솔선수범하자” 

“옛 생각이 납니다. 결혼과 출산을 빨리 했어요. 가방 메고 버스를 타고 대학원에 갔죠. 공부를 하다가 오후 6시가 되자마자 귀가해 아이를 돌봐야 했어요. 자료를 준비하다보니 2010년대인 현재도 그 때와 비교해 지금도 여성체육인의 실정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상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네요.”

박영옥 원장의 연구는 엘리트 여성체육인들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장미란, 김연아, 이상화, 박인비, 심석희 등의 맹활약에 힘입어 여성 엘리트선수의 비율은 23.2%으로 몰라보게 높아졌지만 여성 감독, 코치의 비율은 11.7%에 불과하다. 특히 대학일반운동부의 경우 여성 지도자 비율은 3.7%로 급격히 하락한다.

박영옥 원장은 “이 자리가 여성체육인의 은퇴 후 지속가능한 커리어에 대한 집중적 논의를 시작하는 첫 걸음”이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여성들의 일·가정 양립정책을 통해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양성평등적 노동환경 조성, 출산율 저하 대책을 위해 가정생활과 일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충분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출산율 저하는 심각한 문제다. 한국인은 아이 낳기를 꺼려한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이 지난해 6월 발간한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25명으로 224개국 중 219위에 그쳤다. 이는 프랑스(2.08명), 미국(2.01명), 영국(1.90명)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일반 조사 결과가 이러한데 유산, 난임이 잦은 여성체육인들이 아이를 가질 리는 더욱 만무하다.

박 원장의 연구 결과는 여성들의 고충을 잘 보여준다. 설문조사에서 ‘가사를 혼자 부담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65%, ‘육아와 직장생활 병행이 어렵다’고 인정한 비율은 83.7%에 달했다. 심층면접 대상자 10인은 “출산을 결정하는 시점부터 직업 중단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스트레스다”, “육아휴직, 출산휴가는 엄두도 못했다”고 고백했다.

박영옥 원장은 “체육단체부터 산전후 휴가 및 육아휴직을 보장하는 등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제도를 준수해야 하며 여성체육인을 대상으로 한 리더십 개발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면서 “은퇴 후뿐만 아니라 은퇴 전에도 커리어플랜을 고민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여성 지도자와 심판들이 돌보미 서비스 등의 지원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스포츠Q 민기홍 기자] 박영옥 한국스포츠개발원장은 "이번 포럼이 여성체육인의 지속가능한 커리어에 대한 집중적 논의를 시작하는 첫 걸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생순 신화’ 임오경 감독, “날아오는 공, 피하지 말고 잡아 던져라” 

가장 큰 호응을 이끈 연사는 임오경 감독이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현역 시절과 은퇴 후 경험담을 재치 있게 털어놔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8년간의 선수 생활 동안 슬럼프에 빠졌던 일, 이를 털어낸 과정들을 진솔히 담아내 박수 세례를 받았다.

임오경 감독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아이를 가진 것을 알았다. 지울까도 생각했지만 ‘다 키워준다’던 남편의 말 한마디에 속고 말았다”고 웃으며 “‘운동한 친구들은 무식하다’는 말이 싫어 일본으로 진출했다. 임신 후 6개월까지 뛰었고 출산 후 2주 만에 코트에 복귀해서도 승승장구했는데 급격히 살이 빠지며 우울증이 오더라”고 과거를 회상했다.

창단팀 서울시청의 호출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곧 한국에서 여성 지도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깨닫게 된다. 최연소이자 최초 여성 감독이었던 그는 편파판정으로 패한 후 심판을 향해 “이제부턴 서서 볼일을 보겠다, 선수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볼 수가 없다”고 항의했던 일, 2차 회식에 앞장서며 남자들의 술문화를 조금씩 바꿔나간 일, 주니어 국가대표 감독으로 올라선 일 등을 들려줬다.

임오경 감독은 “시대가 변해 여자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고는 해도 스포츠에선 여전히 여자가 가야할 길이 멀고도 험하다. 나는 3~4시간 자면서 가사와 일을 하지만 늘 행복한 여자라 주문을 외우고 산다”며 “날아오는 볼을 잡아야 득점할 수 있다. 피하지 말고 잡아 슛을 던져라. 힘들지만 즐길 줄 아는 여자가 돼라. 후배들이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정회원이자 SBS골프 해설위원으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서아람 교수도 임 감독 못지않은 입담을 뽐냈다. 그는 “LPGA 세계랭킹 10위권에 박인비, 김효주, 유소연, 김세영 등 한국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데 결혼한 선수는 단 한 명뿐”이라며 “박인비가 유일한 유부녀인데 시간을 두고 아이를 가질 것이라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아람 교수는 “일을 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은 결혼이 아니라 출산이더라. 철저한 건강관리는 필수다. 결혼 후 주말부부로 지내며 엄마로서, 아내로서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며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남편과 시댁의 응원이 컸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 밝은 미래가 보이는 학생들이 많아 보인다. 배려심이 있는 좋은 남자를 만나기를 희망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은퇴 후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한 우물만 팔 것이 아니라 자격증 획득 등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언젠가 기회가 오는데 이를 잡는 건 실력밖에 없다”며 “국가와 사회, 가깝게는 체육계와 골프계도 일·가정이 양립할 수 있도록 진전된 계획을 수립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왼쪽부터 박영옥 한국스포츠개발원장, 임오경 서울시청 핸드볼 감독, 서아람 한남대 교수, 원영신 여성체육학회장, 최성지 여성가족부 여성정책과장, 강인애 영등포구 생활체육지도자. [사진=여성체육대상조직위원회 제공]

◆ 원영신 여성체육학회장 “스포츠양성평등법 제정 노력”, 여성가족부 “적극적 협조” 

2부 순서에서도 알찬 이야기들이 오갔다. 신정희 대한하키협회 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토론 세션에서는 박영옥 원장과 임오경 감독, 서아람 교수 외에 원영신 여성체육학회장, 최성지 여성가족부 여성정책과장, 강인애 서울 영등포구 생활체육 지도자 등이 합류해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했다.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교수이기도 한 원영신 회장은 “일과 가사를 모두 잘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지만 받아들이자.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여자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다고 생각해야 인생이 즐겁다”며 “‘여학생 체육 활성화를 위한 스포츠양성평등법 제정을 위해 앞장서 노력하고 있다. 법이 바뀌면 답이 나올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최성지 여성가족부 여성정책과장은 정부의 정책을 설명했다. 그는 “중앙 부처에서 과장급 이상 여성은 11%에 불과하다. 국제적으로 이런 트렌드를 보이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라며 “남성이든 여성이든 일과 가사를 병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여성가족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 체육계가 호출해줘 감사하다”고 밝혔다.

강인애 강사는 “전국의 생활체육지도자 2480명 중 무려 80%가 여성이다. 운동을 많이 하면 난소 기능이 떨어져 7명 중 1명이 난임에 시달리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또한 “직장에서 5분 거리 근처로 이사했다”며 “나는 아들이 아프면 행사고 직장이고 데리고 간다”며 여성들이 '강한 워킹맘'으로 거듭나주기를 주문했다.

부천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세 아이의 엄마 신명희 씨는 “대회가 있어 실내체육관에 갔는데 몇 바퀴를 돌아도 수유 공간이 없어 계단 밑 창고에서 들어간 적이 있다. 지난달에도 방문했는데 여전히 미흡하다”며 “큰 공간에 잠시나마 아이들을 보육할 수 있는 시설이 생겼으면 한다. 또한 경력 단절이 생긴 분들을 강사로 채용하는 정책도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임오경 감독은 “현재 나는 서울시청의 비정규직 직원이다. 4대 보험 가입자의 경우 육아휴직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임신했을 때는 불가능하다”며 “일본의 경우 본인이 은퇴를 선언하지 않는 이상 출산, 육아휴직 제도가 잘 정비돼 있다. 정직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다”고 제도 개선을 요구했다.

[취재 후기] 2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절대 공감’의 표정과 미소가 곳곳에 번졌다. 여성체육인들은 워킹맘으로서의 고충을 털어놓고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자리가 생겼다는 사실에 크게 반색했다. 가장 최근에 열린 올림픽을 기억하는가. 지난해 러시아 소치에서 한국은 8개의 메달을 획득했는데 이중 무려 7개가 여성 선수로부터 나왔다. 여성체육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 우리의 엄마요, 딸이요, 누나요, 여동생인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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