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합니다. 옛 것에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어 항상 자신을 새롭게 가꾸라는 옛 성현의 가르침일 겁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명언을 굳이 되새길 필요도 없이, 우리는 평소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합니다.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중교통 수단으로 평소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조선왕릉은 519년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들이 거의 훼손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왕릉이 유일하다. 2009년 6월30일,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의 가치를 인정해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는 ‘능(陵)’은 42기이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인 ‘원(園)’은 13기이며, 그 외 왕족의 무덤인 ‘묘(墓)’는 64기이다.
42기의 왕릉 중 북한에 위치한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 등 2기를 제외한 40기가 서울을 중심으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중 서울에는 정릉, 의릉, 태릉·강릉, 선릉·정릉, 헌릉·인릉이 위치해 있다.
조선 왕릉의 택지는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왕이 있는 도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어야 했다.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왕릉은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곳이었다. ‘배산임수’와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위치한 만큼 지금도 여전히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수도권에 살고 있다면 가까운 왕릉을 찾아 조선왕조의 기를 호흡하며 몸과 마음에 안식을 주는 일도 좋을 듯하다.
지난 6월 셋째주 주말,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을 찾았다. 육군사관학교 맞은 편에 위치한 태릉은 제11대 중종 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이웃에 위치한 문정왕후의 아들인 제13대 명종(明宗)과 명종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강릉(康陵)과 함께 ‘태강릉’으로 불리기도 한다.
태릉 입구에는 조선왕릉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에서는 조선왕릉의 공간구성과 관리, 국장절차 등이 동영상과 이미지로 설명되어 있다.
‘태릉’에 잠들어 있는 문정왕후는 조선을 대표하는 여걸이다. 문정왕후는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로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가 1515년 인종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승하하자, 1517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어린 왕을 대신해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동생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유교가 국가이념이던 조선에서 승려 보우를 앞세워 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문정왕후의 강한 성정의 가장 큰 피해자는 명종이었다. 상대적으로 그의 품안에서 아들 명종의 권위는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7세에 왕비가 되어 34세의 나이에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기어코 왕으로 만든 집념의 여인, 그리고 8년 동안이나 어린 아들을 대신해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여인,..
'철의 여인' 문정왕후에 대해 사관은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이는 문정왕후를 이르는 말이다"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명종실록 20년 4월 6일)
문정왕후에 대한 사관의 혹평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나약했던 아들의 왕권을 지켜 주려던 모성의 진정성을 무시한 채 남성중심의 역사무대에서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그린 것은 아닐까?
‘조선 최대의 여걸’임을 상징이나 하듯 태릉은 왕비의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규모와 위세가 대단하다. 이웃한 아들 명종 부부의 강릉이 왜소해 보였다.
문정왕후 태릉의 석물은 다른 능에 비해 1.5배에서 2배 가량 크다. 이곳에 묻힌지 4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위세를 과시하는 듯하다.
문정왕후는 서삼릉(西三陵·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던 남편 중종의 정릉(靖陵·서울시 강남구 삼성동)을 봉은사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자신도 그 곁에 눕고자 했지만 정릉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차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왕릉 중 왕비의 능호는 여성스러운 것이 일반적이지만 문정왕후는 ‘클 태(泰)’자를 썼다. 능호에서도 그녀의 위세가 크게 느껴진다.
잠시 '태릉'을 돌아보고 나니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태릉'이라는 지명이 역사 속의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 다음 편에서는 명종 부부의 능인 '강릉'을 돌아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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