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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막후](4) '대학로 지킴이' 배우 석정만, 혜화의 연극을 말 하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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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막후](4) '대학로 지킴이' 배우 석정만, 혜화의 연극을 말 하다 (인터뷰)
  • 이은혜 기자
  • 승인 2015.12.23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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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 Tip!] 악기의 소리가 잘 나오길 바란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길들이는 일이다. 연기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몸을 악기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훈련과 연습을 통해 온 몸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렇게 온 몸을 단련시키고 나서야 무대 위에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연기가 완성된다고 말하는, 진득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내공이 느껴지는 배우가 바로 석정만이다.

[스포츠Q 글 이은혜 기자·사진 최대성 기자] 흔히 대학로라 부르는 혜화가 마로니에 공원과 학림다방으로 대표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 이곳에는 자유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시대정신을 선도하던 지식인들과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몰려들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후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한 대학로는 말 그대로 ‘문화 예술인의 거리’이자 ‘젊음의 거리’였다. 그러나 시대상이 변화한 현재 혜화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이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있고, 상업적으로 물들어 많은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기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변해 버린 혜화에도 희망은 있다. 여전히 많은 연극인들이 혜화를 통해 첫 발을 내딛고, 오랜 시간 혜화를 지켜봐 온 배우들은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달리고 있다. 혜화역 출구를 빠져나오면 만날 수 있는 노란 모자에 노란 패딩 점퍼를 입은 ‘대학로 지킴이’ 배우 석정만을 만났다.

◆ 배우 석정만의 또 다른 이름, ‘대학로 지킴이’

 

지난 9일 혜화역 2번 출구의 ‘좋은 공연 안내센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배우 석정만은 ‘대학로 공연 질서 지킴이(대학로 지킴이)’ 활동복을 입고 등장했다. 최근 대학로를 찾았던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봤을 노란 패딩 점퍼에 노란 모자 차림이었다.

그가 활동하는 ‘대학로 지킴이’는 종로 구청에서 메르스 사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연극계 종사자들을 위해 공공 일자리 확대 사업을 계획하며 시작된 캠페인이다. 이들은 대학로의 공연장과 공연에 대한 안내를 시작으로 최근 대학로의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호객 행위 추방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대학로 연극의 질을 낮추고 있다는 비판을 받으며 추방돼야 하는 문화로 꼽히고 있는 호객 행위에 대해 석정만은 ‘대학로 지킴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심각성을 몰랐다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처음에 종로 구청에서 나왔을 때 난 지방 공연 가 있어서 신경을 못 썼죠. 나중에 알고 나서 ‘아, 이건 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막상 보니 내가 생각 했던 것 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던 거죠. 나는 ‘캠페인만 하면 되겠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소극장 대부분이 티켓 수익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과열된 호객 행위로 인해 수익 구조가 정상화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혜화에 남는 연극인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석정만은 답답한 마음에 ‘대학로를 떠나라’는 말을 꺼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걱정이죠. 저 같은 입장은 대학로를 떠나는 입장인데 뒤에 오는 애들하고 이런 상황이 부딪히게 되니 답답하죠. 오죽하면 제가 극단 대표들을 만나면 ‘너는 여기 말고 삼선교 쪽에 차려라’라고 대학로를 떠나라고 이야기를 꺼내겠어요? 한편으로는 씁쓸하죠. 이렇게 한 지역에 소극장이 모여 있는 곳이 외국에도 몇 없는 걸요”

◆ 우연한 기회에 찾아 온 연극… “군 입대 전 돕던 무대 미술이 첫 시작”

 

석정만은 평소 ‘기록’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그의 블로그에는 그만의 연기 철학이 묻어나는 글들과 연기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오로지 연기자의 삶만 살아 왔을 것 같은 그에게 연기 인생에 대해 물었을 때 “미대를 다녔었다”는 의외의 답이 돌아 왔다.

“중학교 3학년 때 KBS ‘임진왜란’이라는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고 고등학생 때 영화 한 번 하고 잊고 지냈어요. 대학교를 미대를 가버렸거든요 제가. 그러다 군대 가기 전에 무대 미술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게 인연이 됐죠.”

군 제대 이후 인테리어와 무대 미술을 병행하던 석정만에게 기회는 정말 우연처럼 찾아왔다. 단역이 사정상 무대에 오르지 못하자 당시 무대 미술을 책임지던 석정만이 부랴부랴 무대에 올라야 했다. 이후에도 두 가지 일을 병행하던 석정만은 IMF 당시 인테리어 사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연극 무대에 뛰어 들었다.

석정만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며 기본기를 닦으려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는 산을 오르내리며 발성 연습을 했고, 기 체조를 통해 몸을 풀었다. 연기 연습은 기본에 불과했다.

“우리 때는 야외무대도 많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리가 커야 하니까 몸을 고급 악기처럼 만들어야 했어요. 자기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어야지 무대 위에서 연기가 완성 되죠.”

고급 악기처럼 몸을 변화시킨 석정만의 노력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대본을 써 보거나 다른 이의 대본을 필사하며 분석을 시작했다. 석정만은 “많이 읽고, 느끼고,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 ‘연극’은 치열함 그 자체… “호랑이와 멧돼지의 싸움, 그 치열함”

 

고전 악극 ‘장화홍련전’의 무대 미술로 시작해 조연출, 연출이라는 자리를 거치며 배우가 아닌 스태프라는 이름으로 극을 이끌기도 했던 석정만은 그 누구보다 연출가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인터뷰 내내 연출 스태프들의 노고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배우들이 ‘숲’을 보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보였다.

“나도 그렇지만 배우들은 연기를 시작하면 자기 것만 봐요. 그런데 연출은 그렇지 않아요. 전체적인 모습을 보죠. 연출은 숲을 보고 배우는 자기 나무 하나만 보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때 괴리감이 생기거든요. 그럴 땐 우선 작품을 위해서라도 배우가 연출에 맞춰 주는 게 맞다고 봐요. 전체 흐름이 깨지지 않게 배우들도 전체 숲을 볼 수 있는 능력들이 있었으면 좋겠죠.”

이렇듯 석정만은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위치에서 연극을 경험해 왔다. 자신의 몸을 고급 악기처럼 만들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던 젊은 배우는 어느덧 흰 머리가 셀 수 없을 나이가 돼 대학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석정만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배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극이 많지 않은 현실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신들의 빈자리를 채워 줄 젊은 배우들에게 쓴 소리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가 어릴 때 선생님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지만 다들 너무 공부를 안 해. 치열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대충, 너무 편안하게 하는 경향이 있어요. 연극의 ‘극’자를 한문으로 풀어보면 ‘돼지 저’에 ‘호랑이 호’를 합쳐 둔 거란 말이에요. 멧돼지가 호랑이랑 싸우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겠어요. 그래서 ‘치열할 극’자인데 정말, 진짜로 하고 싶다면 목숨 걸고 해야죠. 냉정한 이야기지만.”

석정만은 “연습 안 하고 무대에 오르는 게 도둑놈이죠”라는 말을 더했다. 그는 연극은 막이 오르는 시간 동안 관객과 약속한 연기를 보여주는 시간이기 때문에 허투루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관객의 시간과 돈을 빼앗는 ‘도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치열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 변화하는 대학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소극장’

 

‘대학로의 메인’이라고 언급되는 곳은 혜화역의 2번 출구와 3번 출구 주변이다. 과거 2번 출구와 3번 출구 그리고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한 공연 예술들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비단 위치가 좋아서 사랑을 받았던 것 뿐 아니라 극의 종류를 떠나 내용이 풍부한 극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로에 자본이 유입되고 상업적으로 변하며 상황은 변했다. 2004년 대학로가 문화 지구로 선정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소극장을 비롯한 공연 예술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문화 지구 지정은 소극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소극장들은 문을 닫았고, 순수 연극을 하는 몇 남지 않은 소극장들은 대학로 외곽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혜화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해서, 경신고등학교 올라가는 쪽하고 삼선교 넘어가는 쪽. 그쪽으로 극장들이 도망가고 있는 입장이죠. 임대료도 너무 비싸게 올라서 어지간한 수익으로는 감당도 안 돼요.”

오랜 시간 대학로를 지켜 봐 온 석정만은 이곳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는 듯했다. 그는 대학로의 옛 정취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석정만은 “상업적으로 변해 버렸어요”라며 일제 목조 건물 형식이었던 학림 다방의 과거 모습과, 당시 혜화동에서 가장 컸던 식당 오감도를 언급하며 추억에 젖었다.

“옛날에 저 건너 학림다방 같은 게 저런 새 건물이 아니라 일제 목조 건물 식으로, 옆에 오감도 식당이 제일 컸었는데 언젠가 지방을 쭉 돌다 와 보니까 완전 신세계가 돼 있는거죠. 이거 완전 명동처럼. 그래가지고 ‘야, 여기가 거기가 맞나’ 이런 생각도 들고, 대학로 여기 마로니에 공원도 옛날에 이런 풍이 아니었는데 다 개조를 해 버렸죠”

변해 버린 혜화의 풍경에 탄식을 금치 못하던 석정만은 혜화의 연극 무대를 ‘마음의 고향’으로 표현했다. 너무도 많이 변해 버린 혜화와 상업적인 연극들이 범람하는 현실에서도 그는 어쩔 수 없는 혜화동의 연극인이었다.

[취재후기]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욱 어려운 일 일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 또한 그렇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석정만은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배우였다. 치열하게 살아 봤기에 ‘치열하게 연기하라’는 조언을 던질 수 있는 그가 연극 인생의 남은 페이지들을 꿈으로, 희망으로 채워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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