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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4) 체조 올림픽 1호 메달 박종훈, '언제까지 양학선만 보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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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4) 체조 올림픽 1호 메달 박종훈, '언제까지 양학선만 보고 있을 것인가'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12.28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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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지도자, 협회 임원 거쳐 가톨릭관동대 교수로 재임...'미스터 쓴소리'로 체조발전안 제시

[200자 Tip!]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체조는 '도마의 신' 양학선의 활약으로 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한국 체조가 처음부터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박종훈이 도마에서 동메달을 따낸 것이 첫 올림픽 메달이었다. 한국 체조의 올림픽 메달 물꼬를 튼 23세 청년은 어느덧 지천명의 교수가 됐다. 박종훈 가톨릭관동대 스포츠건강관리학과 교수는 현재 체조계에서 한 발 물러서 있지만 한국 체조의 발전을 위해 줄기차게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스포츠Q(큐) 글 박상현·사진 이상민 기자] 한국 체조의 올림픽 도전사는 박종훈 교수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한 그가 1988년 서울 올림픽 도마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것이 시초였다.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유옥렬(도마 동메달), 1996년 애틀랜타 대회 여홍철(도마 은메달), 2000년 시드니 대회 이주형(평행봉 은메달, 철봉 동메달), 2004년 아테네 대회 김대은(개인종합 은메달)과 양태영(개인종합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유원철(평행봉 은메달) 등이 메달행진을 이어오다 양학선이 런던 대회를 통해 최초의 금메달(도마)을 따냈다.

▲ 박종훈 교수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도마 종목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체조의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회관내 올림픽기념관에 걸려 있는 자신의 27년 전 사진과 함께 한 박종훈은 어느덧 지천명의 교수가 됐다.

그러나 양학선이 금메달을 따냈다고 해서 한국 체조가 인기를 얻거나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지난해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양학선의 금메달 획득 여부가 관심이 되기도 했지만 국제적인 큰 대회가 열리지 않는 지금은 관심이나 인기도 뚝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체조는 국민들의 관심 밖에 있는 종목이다.

'영원한 체조인'이고 싶다는 박종훈 교수는 이런 한국 체조의 현실이 아쉽고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 체조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수들 개개인의 상품성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대한체조협회의 개혁을 요구하다가 10년 전에 임원직에서 사퇴했지만 체조에 대한 식지 않는 무한사랑을 보여주며 한국 체조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 88 꿈나무로 성장, 선수 시절 행운아였다

박종훈 교수는 자신이 선수로 뛰었던 1980년대를 회상하며 '행운아'였다고 말한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서울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면서 꿈나무 선수 육성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그 수혜를 입은 것부터가 행운이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수원농생고) 다녔을 때 꿈나무 제도가 만들어졌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선수촌에 들어갔어요. 정식 선발전을 통해 대표팀에 뽑혀 선수촌에 간 것이 아니라 고등학생 선수 가운데 유망주 셋이 뽑혀 대표팀에 합류했는데 그 가운데 제가 있었던 거죠. 당시 캐나다 국적으로 옛 소련 출신의 유진 갈페린 코치가 지도했는데 기초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 체조는 외국 선수들의 경기를 모방하면서 기술을 발전시켜나가는 시스템이었는데 갈페린 코치는 기초를 중요하게 생각했죠. 훈련이 힘들었지만 기초를 잘 닦을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아요."

서울 올림픽 유치로 체조 꿈나무로 뽑힌 것이 첫 행운이었다면 두 번째 행운은 동구권의 1984 LA 올림픽 보이콧이었다. 구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보복으로 동구권이 LA 올림픽에 나가지 않은 것이었다. 동구권 국가들이 올림픽에 나서지 않으면서 한국 체조가 반사이익을 얻었다.

▲ 박종훈 교수는 서울 올림픽이 유치된 것부터가 자신의 체조 인생에 행운이 깃들었다고 말한다. 서울 올림픽을 겨냥한 체조 꿈나무로 뽑힌 이후 기대하지도 않았던 LA 올림픽을 거쳐 서울 올림픽까지 행운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한다.

"1983년 세계선수권에서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내지 못하면서 대표팀이 해산됐어요. 그런데 동구권의 LA 올림픽 보이콧으로 갑자기 대표팀 소집이 됐어요. 구 소련, 루마니아, 불가리아, 구 동독 등 체조 강국이 모두 빠지면서 한국이 본선티켓을 가져온 거죠. 하지만 워낙 기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올림픽에 나간 것이라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어요. 당시 대표팀 감독님이 양학선 등을 길러낸 조성동 감독이셨는데 당장의 성적보다는 서울 올림픽을 대비하자는 의미에서 대표팀 추천 선수로 제가 뽑혔어요. LA 올림픽이 저의 첫 국제대회 경험이 된 거죠. 컨디션이 좋지 못한데다 실력도 없어 경기는 나가지 못했지만 관전한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됐어요."

이후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통해 평행봉과 단체종목 은메달을 따고 마루운동과 도마에서 동메달을 따낸 박종훈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나가게 된다. 올림픽 전년도에 열렸던 대표 선발전에서 새끼 손가락이 탈구되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투혼을 발휘해 대표팀에 선발됐다. 하지만 서울 올림픽에서는 도마 종목 예선에서 8위에 그치며 턱걸이로 결선에 올라 메달권과 멀어지는 듯 보였다.

"거의 포기 단계였어요. 결선을 앞두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빨리 경기 끝내고 산 속에라도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었어요. 경기 당일 아침은 샐러드조차 먹지 못하고 모두 토해버렸을 정도로 긴장과 부담이 심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속을 비웠더니 몸이 가벼워져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올림픽 선수촌에서 체조경기장으로 가는 중간에 어머님을 뵈었는데…."

머리가 희끗한 박 교수는 27년 전의 일이 어제처럼 느껴졌는지, 아니면 어머님 얘기에 옛 생각이 났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울컥하다가 얘기를 다시 이어갔다.

"예선에서 9.800점으로 8위에 그쳐 가까스로 결선에 올랐죠. 그런데 결선에서 2차 시기에서 10점 만점을 받아 8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9.975점을 받으면서 최종 합계에서 19.775점으로 동메달을 딴 거죠. 서울 올림픽 때만 해도 예선과 결선 점수를 더해 순위를 결정했습니다. 결선 점수로만 순위를 결정하는 지금 방식이었다면 금메달이었죠."

▲ 박종훈 교수는 서울 올림픽 동메달도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예선에서는 8위로 간신히 턱걸이로 결선에 올랐지만 사실상 포기하고 마음을 비운 것이 메달을 따낸 원동력이었다고 설명했다.

◆ 대한체조협회 개혁을 바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그 해 11월 중국에서 열렸던 환태평양선수권대회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박종훈 교수는 명지대와 한국체대 대학원을 거쳐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대표팀 지도자로 활약하며 이주형과 여홍철을 길러냈다.

국가대표팀 지도자 생활은 4년 정도로 끝났지만 이후 40대 젊은 나이에 대한체조협회로 들어가 이사와 연구편집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한국 체조의 발전을 위한 개혁 드라이브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노력이 오히려 박종훈 교수에게 좌절감을 안겨줬다. 협회가 박 교수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2005년부터 대한체조협회 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어린 나이에 선배, 어른들과 많이 부딪혔죠. 한국 체조의 발전을 위해서는 마케팅이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방안들이 강구됐어야 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제가 이사 등 임원을 맡으면서 많은 방안을 내놓기도 했죠. 하지만 모두 묵살됐어요. 설상가상으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오심 논란으로 한국 체조가 금메달을 따내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하자는 취지의 글을 대한체조협회 기관지에 실으려고 했는데 이것이 큰 갈등을 야기했죠."

40대 젊은 나이에 패기있게 개혁 드라이브를 걸려고 했던 박종훈 교수는 협회의 뿌리깊은 인맥 때문에 좌절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독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국제심판교육 파견이 중간에 바뀌는 일이 생기면서 결정적으로 협회와 등을 돌리고 말았다.

"독일에서 열리는 교육연수를 받기 위해 협회 승인을 받아 가려고 했었는데 아테네 올림픽 당시 오심사건 때문에 국제체조연맹(FIG)에서 관련 규정을 보완하기 위해 연수를 잠정 중단했어요. 그랬다가 다시 연수를 재개했는데 협회에서 교육연수 대상자를 바꿔버린 거죠. 그동안 개혁을 꾸준히 요구했던 제가 미운 털이 박혔던 거죠. 결국 저는 교육연수를 가지 못했고 미련없이 위원장직과 이사직을 모두 사임하고 협회에서 나왔어요. 특정 인물이 십수년째 이끌어오고 있는 협회의 투명하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행정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 박종훈 교수는 국가대표팀 지도자를 거쳐 40대 나이에 대한체조협회 임원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한국 체조의 발전을 위한 개혁 방안이 묵살되면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

이후 박종훈 교수는 대한체조협회와 인연이 끊겼지만 체조와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뒤 학교 체육부장과 노인스포츠지도사연수원장으로 활약하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또 SBS 체조 해설위원과 함께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이사, 한국올림픽성화회 이사, 한국운동역학회 이사 등 다양한 활동도 이어가며 학계와 체육계에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도 체조대회가 열리면 경기장에 나가요. 그럴 때마다 불편한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끼죠. 하지만 저는 체조인이고 대한체조협회도 언젠가는 제가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협회를 떠나있으면서도 한국 체조계에 누가 될만한 행동을 한번도 한 적이 없어요."

◆ 언제까지 양학선만 보고 있을 것인가, 한국 체조의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박종훈 교수가 대한체조협회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은 더 나은 곳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전히 박 교수의 개혁 요구는 유효하다. 이 가운데 마케팅 능력 강화를 주문한다.

"기계체조의 양학선과 리듬체조의 손연재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의 상품성이 더 높은 지는 잘 드러나지 않나요. 하지만 성적만 놓고 보면 손연재가 양학선에 비할 것은 못 되죠. 양학선은 올림픽 금메달을 땄고 손연재는 메달권에 아직 들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인기는 왜 손연재가 더 많을까요. 그만큼 리듬체조는 선수들의 상품성을 높이는 작업을 해왔다는 거죠. 상품성의 척도는 바로 국민들의 관심과 인기죠. 그러나 양학선이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후 국민들의 관심을 지속시킬 수 있는 작업을 한 것이 뭐가 있을까요. 체조인들과 협회에서 이에 대한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겁니다."

▲ 박종훈 교수는 아직까지 특정 선수 한 명, 스타에 의존하는 한국 체조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한국 체조가 더욱 발전하고 인기를 얻으려면 한국 체조의 저변을 확대해야 하고 이를 위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박종훈 교수는 정규 대회가 아닌 이벤트성 대회의 창설을 주장했다. 이벤트성 대회를 열어 양학선의 경기를 자주 노출시킨다면 그만큼 상품성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손연재가 종종 갈라쇼를 열어 팬들의 관심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처럼 양학선을 비롯해 기계체조 선수들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양한 기록물을 남기자는 것이었다. 체조협회 관계자들이나 체조인들이 국제대회에서 심판으로 활약하고 돌아오면 세계 체조의 흐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심판 채점의 경향 등을 분석해 기록으로 남기자는 것이다. 또 모든 경기를 영상으로 촬영해 체조협회 홈페이지에 게재해 누구나 볼 수 있게끔 공개하자는 것도 박종훈 교수의 주장이다.

"국제대회에 파견을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의 기록물은 분명 한국 체조의 자산이 될 겁니다. 이런 것들은 다른 체조인들이 열람할 경우 정보가 되거든요. 또 홈페이지에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경기 영상을 게재한다면 모두가 함께 보면서 어떤 연기를 하는지 지켜볼 수 있고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심판 부정행위에 대한 것도 방지할 수 있죠."

박종훈 교수는 한국 체조가 더욱 발전하려면 다양한 개혁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체조계에서 한 발 물러서있으면서도 '미스터 쓴소리'를 자처하며 꾸준히 한국 체조의 개혁과 발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한 체조인이 아니라 한국 체조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요구다. 스포츠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허투루 흘려들을 수 있는 주장은 아닌 듯하다.

▲ 박종훈 교수는 현재 대한체조협회 이사직에서 물러나 체조계에서 한 발 물러서있지만 영원한 체조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체조의 발전을 위해 체조계 바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 박종훈 프로필

△ 생년월일 = 1965년 5월 6일
△ 출신학교 = 수원북중-수원농생명과학고-한국체대-명지대 대학원(체육학 석사)-한국체대 대학원(이학 박사)
△ 수상경력
1983년 일본 도쿄 국제초청체조 도마 은, 마루 동메달
1985년 대만초청 국제체조 뜀틀, 개인종합, 단체 금메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평행봉 은, 단체 은, 도마 동, 마루 동메달
1988년 서울 올림픽 도마 동메달
1986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1988년 대한체조협회 최우수선수상
1988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거상장
1989년 대한체조협회 최우수선수상
1989년 대한체육회 경기상 우수선수상
2002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 주요경력
전 한국체조대표팀 남자 코치
전 대한체조협회 이사, 연구편집위원장
전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전 체육인재육성재단 자문위원
전 대한체육회 선수위원회 위원
현 SBS 체조경기 해설위원
현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이사, 기획조정위원장
현 한국올림픽성화회 이사
현 한국운동역학회 이사
현 가톨릭관동대학교 스포츠건강관리학과 교수 (2001년~현재)

[취재후기]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 체조는 7회 연속 체조에서 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그리고 양학선이라는 대스타도 탄생했다. 그러나 과연 양학선이 은퇴한 뒤 한국 체조를 이끌어나갈 차세대 에이스가 나타날 지는 미지수다. 단순히 몇몇 엘리트 선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저변을 확대하는 방안도 생각해봐야 할 때다. 박종훈 교수는 "체조인들이 앞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려면 체조계 자체에서 일자리 창출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저변 확대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이 하나로 합쳐지려는 시기라 더욱 뼈저리게 와닿는다.

▲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기념관 바깥에는 서울 올림픽에서 체조 동메달을 딴 박종훈 교수의 손도장 현판이 있다. 박종훈 교수는 앞으로 더 많은 체조 후배들이 영광을 누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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