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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여걸 어머니의 그림자에 갇힌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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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여걸 어머니의 그림자에 갇힌 '강릉'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4.07.06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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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어머니와 나약한 아들의 네버엔딩 스토리 '태릉강릉'을 가다(하)

<편집자 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합니다. 옛 것에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어 항상 자신을 새롭게 가꾸라는 옛 성현의 가르침일 겁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명언을 굳이 되새길 필요도 없이, 우리는 평소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합니다.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강릉(岡陵)은 조선 제13대왕인 명종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능이다. 현재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泰陵)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태릉과 마찬가지로 주소는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화랑로 곁에 위치하고 있다. ‘태릉강릉’은 나란히 사적 제201호로 지정돼 있다.

명종(明宗·1534~1567)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45년 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 때문에 명종은 20세까지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친정 이후에도 국정은 어머니의 손에 좌우됐다.

'태릉'에서 '강릉'까지는 화랑로 옆 가로수길을 따라 보통 걸음으로 15분이 걸렸다. 보도지만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되어 있고 폭이 좁지 않아 쾌적하게 걸을 수 있다. 도중에 태릉선수촌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왕이 어머니와 외척에 휘둘리며 독자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는 극심한 사회 혼란으로 이어졌다. 탐관오리의 매관매직, 과중한 세금징수 등이 횡행해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급기야 임꺽정이 출연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명종은 후대를 잇는 데에도 실패했다. 인순왕후(仁順王后)에게서 외아들 순회세자를 얻었으나 1563년 13세에 잃어버렸다. 2년 후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세상을 떠났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흘 동안 밥 한 술도 뜨지 못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문정왕후의 모진 성정에 기를 못피고 살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극진했음을 알 수 있다.

'태릉강릉'의 안내도다. 왼쪽이 '태릉'이고 오른쪽이 '강릉'이다.

병약했던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2년 후 왕위를 물려줄 왕자없이 34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재위 기간 22년 중 명종이 주체적으로 정사를 본 기간은 문정왕후 사후 2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인순왕후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선조)를 왕위에 올려야 했다.

인순왕후 심씨(沈氏)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43년 경원대군(명종)과 가례를 올리고 1545년 명종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다. 1575년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강릉' 표지판이 보인다. 삼육대 바로 못미쳐 삼육대삼거리에 접해 있다. 조선왕릉전시관이 있는 '태릉' 입구와는 달리 입구에서부터 한적한 느낌이 들었다.

 

'강릉' 입구에 들어섰는데 의외로 소박한 길이 마중했다. 여느 보통의 공원 입구 같은 느낌이랄까. 왕릉의 위엄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하게 조성된 입구였다.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하는 금천교도 아담했다. 금천교 넘어 홍살문과 정자각이 보인다. '태릉'에 들어서서 금천교를 지날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도 깔끔하다. '태릉 강릉' 팸플릿에는 '오랫동안 비공개 능이었던 강릉은 참도 사이에 이끼가 나 있어 예스러운 느낌을 준다'고 되어 있어 남다른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계절이 달라서 그런지 너무 정결한 참도였다.

 

어머니 문정왕후의 기에 눌린 탓일까? 명종 부부가 잠들어 있는 '강릉'은 위엄보다는 인간적인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정자각 오른 편의 모습. 우측 끝에 비각이 보인다.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 있는 곳이다.

 

'강릉'의 '능침(陵寢)' 공간이다. 왼쪽 봉분이 명종릉, 오른쪽 봉분이 인순왕후릉이다. 능침 공간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세 계단으로 나눈다. 가장 위쪽부터 죽은 왕의 영혼이 깃드는 ‘상계’, 문인의 공간인 ‘중계’, 무인의 공간인 ‘하계’로 이뤄져 있다.

 

능침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이곳은 제단이 아니라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곳이라고 한다.

 

명종릉과 인순왕후릉의 뒤쪽 모습이다. 봉분은 병풍석이 감싸고 있고 능침 공간 뒤편에는 담장인 '곡장(曲墻 )'이 병풍처럼 두 봉분을 보호하고 있다.

 

 
능침 앞에서부터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이 서있다. 문인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서 있고, 무인석은 두 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다. 문인석과 무인석 옆에는 말 모양의 '석마'가 자리하고 있다. 능침을 지키고 있는 동물 모양 석물로는 말 모양의 '석마', 호랑이 모양의 '석호', 양 모양의 '석양'이 있다.

 

능침 공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태릉'과 달리 아담한 정원같은 풍광을 자랑한다.

조선왕릉은 자연친화적이다. 자연 지형과 어울리게 조성돼 있다. 위압감을 주기보다는 포근하고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풍수지리가 말하는 최고의 '명당'이 실감났다.

         ☞ '조선 최고 여걸의 위세 풍기는 태릉' 바로가기

 

philip@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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