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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싱어](1) 태동부터 전성기까지, '마음과 마음' 임석범과 포크음악을 말하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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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싱어](1) 태동부터 전성기까지, '마음과 마음' 임석범과 포크음악을 말하다 (인터뷰)
  • 연나경 기자
  • 승인 2016.01.25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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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 TIP!] 음악적 표현의 범위가 달라지면서, 다양한 장르와 이야기를 노래하는 가수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전 연령대를 음악으로 한데 묶어 아우르기는 쉽지 않다. 여러 장르들의 혼재 속에서, 서정적인 가사와 어쿠스틱한 연주, 자유로운 발상을 기반으로 한 포크는 오랜 시간 모든 연령대를 관통하며 전 연령층의 스테디 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스포츠Q(큐) 연나경 기자·사진 최대성 기자] 포크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져서는 안될 시기가 있다. 바로 '포크음악의 안정기'를 가져 왔던 1970년대다. 지난달 그 안정기에 기여했던 '강변가요제'의 6회 대상자인 '마음과 마음'의 멤버 임석범을 만나 수십 년의 포크음악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 '구전 민요' 개념 강했던 포크, '저항정신' 거쳤다

▲ 강변가요제 6회 대상 수상자 '마음과 마음'의 임석범 [사진=스포츠Q 최대성 기자]

포크(Folk) 음악이란, "나라마다 지방색이나 주민들의 고유한 숨결을 반영해 오면서 오랜 세월 동안 구전된 민요"를 뜻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도라지' '밀양 아리랑' 같은 민요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 '포크 음악'은 가수가 통기타를 들고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 사람들의 이미지 속 포크 음악의 시작은 19세기 말로, 산업화 당시 미국의 광산, 철도 노동자들이 부르던 구전 가요가 시초다. 나중에는 구전 가요에 문학적인 가사가 도입됐고, 1940년대엔 컨템포러리 포크 형태로 거듭났다.

대한민국 포크음악의 시발점은 1953년에 개업한 무교동 소재의 '쎄시봉 음악 감상실'이었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의 대학생 가수들의 노래가 자작곡이 아닌 번안가요였기에 이들을 포크가수라고 하기엔 미흡했다.

그렇다면 한국 포크가수의 진정한 시조는 누구였을까? 바로 '행복의 나라로'와 '물 좀 주소'를 부른 한대수다. 1969년 미국 유학 뒤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던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군사정권의 삭막한 분위기를 비판하고 자유를 노래하는 자작곡을 들고 나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뒤 1971년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 담긴 데뷔앨범이 발표됐고, 이 음반은 군사정권 안에서 금지음반이 됐다. 하지만 김민기 본인은 자신의 음악을 그렇게 정의하지 않는다.

"포크 음악이 분명 군부정권과 관련은 있어요. 기성세대에 반하는 음악이라는 이야기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김민기 선배가 불렀던 노래들이 데모송은 아니었어요. 대학생들이 그의 노래를 합창했기 때문에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음악으로 규정된 것이지, 김민기 선배 스스로는 자기 노래가 군부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한 음악이었다고 말하지 않아요."

◆ 탄압 받았던 포크가수들, '라이브 클럽'에서 기회 잡았다

▲ '마음과 마음'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임석범 [사진=스포츠Q 최대성 기자]

금지곡으로 지정될 정도로 탄압을 받던 포크음악은 라이브 업소들이 생겨나며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방송 관계자들은 가수를 섭외하기 위해 라이브 업소를 찾아갔고, 무대에 오른 가수는 운이 좋으면 데뷔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명동 YMCA에서 시작된 '청개구리 집' 같은 공연장이 포크가수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였어요. 그 공연장들에서 통기타 가수를 섭외하면서 음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요. 방송에 출연하면서 대중에게 포크음악이 알려지기도 했고요. 그 다음으로 주목받았던 곳이 '쉘부르'라는 음악 감상실이었는데, 채은옥, 어니언스 등이 활동을 했죠. 목요일마다 콘테스트가 있었고, 신청해서 합격하면 그 무대에서 노래할 자격이 생겼어요. 그러다 방송 관계자들 눈에 띄면 데뷔도 하고"

하지만 지금의 포크음악은 '러브 발라드'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청춘들이 젊음과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급스러운 음악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전에는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저항정신'의 이미지가 강했다면, 지금 포크의 이미지는 '러브 발라드'예요. 가사들이 사랑노래라든지,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주제로 포장이 됐거든요. 또 포크가수는 통기타 외에도 언플러그드한 악기들을 가지고 무대를 구성하는 일이 많았기에 다른 음악들에 의해 '고급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 80년대, 포크 음악 전성기의 계기는 '가요제'

▲ 통기타와 주로 연주되는 '카주'를 시연하는 임석범 [사진=스포츠Q 최대성 기자]

60년대 태동, 70년대 안착했던 포크음악은 80년대가 돼서야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지금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초인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를 포함한 4개의 가요제가 존재했다.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그리고 '대학가요축제', '해변가요제' 등에 출전했던 포크 싱어들은 포크음악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자유롭게 활용해 무대에 섰다. '자유로운 발상'을 기반으로 하는 포크는 통기타와 멜로디언, 카주 등의 악기를 사용하기에 전자 악기가 필요가 없다. 또 이런 언플러그드한 악기들을 가지고 어쿠스틱한 즉석 연주가 가능했다. 포크 음악의 문학적 감성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가사도 빠질 수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면 LT(Leadership Training)나 MT(Membership Training) 가서 노래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수련회도 마찬가지였고요. 통기타 들고 노래에 참여하면서 포크음악이 전파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감성에 심취할 수 있게 된 거죠. 과정은 자연스러웠어요."

"그러다가 대학에, 또는 대학끼리 연합해 통기타 동아리가 생겼고 대학생들이 모여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 동아리들이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게 된 거고요. 80년대 대학가요제 음악 스타일은 '록'과 '포크'로 양분됐어요. 과거에는 탄압 받던 포크가 주류로 올라선 거죠."

◆ 70년대 포크 음악과 함께 혼재했던 트로트(Trot), 포크와의 차이는? '자작곡'

▲ '마음과 마음' 멤버 임석범 [사진=스포츠Q 최대성 기자]

트로트는 4분의 4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대중가요의 한 장르로, 1914년 미국과 영국 등에서 사교댄스의 스텝 또는 연주 리듬을 지칭하는 '폭스트롯'이 유행하면서 연주 용어로 굳어졌다.

한국의 트로트 역시 이 '폭스트롯'에 바탕을 두고 있고, 1920년대 말부터 트로트풍의 음악이 도입됐다.  1930년대 말에는 조선어말살정책으로 일본 가요에 동화됐고, 광복 후에는 왜색의 잔재를 없애고자 팝송과 재즈 기법이 도입됐다. 이후 1960년대부터 발전했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강약의 박자를 넣고 독특한 꺾기 창법을 구사하는 독자적인 가요 형식으로 완성됐다.

이처럼 1970년대는 포크음악과 트로트 음악이 혼재하던 시기였다. 트로트 가수와 포크 가수의 차이는 '자작곡을 부르는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트로트 가수가 자작곡을 부르면, 작곡가와 작사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그에 비해 포크가수는 여러 면에서 자유로웠다.

"트로트 가수들의 역할은 작사가, 작곡가가 써준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는 것이었어요. 가요 연구소라든가 음악 연구소가 있고, 그 곳에서 작사가와 작곡가가 자신의 곡을 주면서 가수를 양성했어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가수가 작사, 작곡의 영역을 넘보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했어요."

작사·작곡가와 가수의 위치가 동등하지 않은 트로트에 비해, 포크 가수와 작사·작곡가의 위치는 동등했다. 작사·작곡가가 함께 생활하던 친구들이고 동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롭던 모습도 저작권이 생기면 달라졌다. 심지어 저작권을 악용하는 경우도 생겼다.

"원래는 곡을 선곡할 때 밤새면서 놀고, 같이 자고 먹고 하다가 음악 얘기를 했어요. 그러다가 마음에 들면 '저 곡 나 주면 안되냐'고 하고, '나중에 밥 한 끼 사라' 하는 식이었으니 직접적으로 저작권을 논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가수가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면, 다른 장르의 곡들처럼 그 가수가 쓴 곡을 부르기 위해 돈을 주고 저작권을 사야 했어요. 저작권 개념을 악용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저작권 협회에 검색을 해서 검색이 안되는 곡을 가짜로 등록해서 원작자 몰래 이득을 취했었어요."

70년대에 두 음악이 혼재하다 보니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그때 그사람'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심수봉이다. 1978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던 심수봉은 '그때 그사람'으로 무대에 올랐고, 수상도 하지 못했다. 당시 상황에선 파격적인 행보였다.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에 출전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은 포크 아니면 그룹사운드였어요. 심지어 심수봉 씨는 주 전공이었던 재즈도 아닌 트로트 곡으로 무대에 섰어요. 당시 유행이 그랬다 보니, 무시도 당했고 비웃음도 많이 들었을 거예요."

[취재후기] 포크 음악이 누구에게 추천해도 사랑받을 스테디셀러라는 것을 증명하듯, '마음과 마음' 임석범 역시 자신이 노래하는 장르인 '포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조곤조곤 포크음악의 역사를 얘기하는 그의 모습과, 인터뷰를 진행했던 임석범의 라이브 카페 '마음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통해 임석범의 음악적 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조덕배 선배가 어느날 '요즘 아이들은 음악적으로 뛰어나고 테크닉도 대단하지만 공산품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비슷한 목소리, 비슷한 발성이라고. 그에 비해 포크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앤틱이라고 표현했는데, 직접적으로 노래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어도 들풀처럼 살았기 때문에 가수들의 목소리도, 창법도 정형화되지 않았기에 수제품이라는 표현을 쓰셨던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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