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강남 도심 한복판에 왕릉이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나란히 위치한 선정릉(선릉·정릉)이다. 왼편에 위치한 선릉(宣陵)에는 조선 제9대 왕인 성종대왕과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고, 오른편 줄기에 있는 정릉(靖陵)은 제11대 왕인 중종대왕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지난 15일 선릉역 부근에 일을 보러 갔다가 잠시 정릉을 찾았다. 필자가 정릉에 들른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번 태강릉(태릉·강릉,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갔다온 뒤 정릉에 빨리 가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선릉 주변을 헤아릴 수 없이 다녔지만 선정릉을 둘러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릉에 잠들어 계신 중종은 태릉의 주인공인 문정왕후의 남편이자 강릉에 잠든 명종의 아버지다. 지난번 태릉에 갔을 때 소개책자에서 정릉에 얽힌 문정왕후의 강한 집착과 애틋한 좌절을 알게 됐다.
중종(中宗)은 1488년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1506년 9월 박원종 등이 일으킨 반정으로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이 폐위당하면서 조선 제11대 왕으로 추대됐다.
중종의 왕비로는 신수근의 딸인 원비 단경왕후, 윤여필의 딸인 제1계비 장경왕후, 윤지임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가 있었다. 중종이 사랑했던 단경왕후는 그의 부친이 매부인 연산군 폐위를 반대하다 죽음을 맞은 신수근의 딸이었기 때문에 중종 즉위 7일만에 폐비가 돼 궁밖으로 내침을 당했다. 두 번째 왕비였던 장경왕후마저 아들 인종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경왕후 사후 중종은 단경왕후를 궁에 불러들이고 싶었지만 반정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재위기간은 39년이었지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다 보니 정권 장악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집권 초기에는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휘둘렸고 집권말기에는 문정왕후의 외척세력들의 기에 눌려 살다 세상을 떠났다. 중종이후의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배신과 음모,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이어진다. 그 승자의 정점에는 문정왕후가 있었다.
중종은 3비 9후궁에게서 9남 11녀를 두었다. 1544년 11월 14일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창경궁에서 보령 57세에 승하했다. 중종은 죽으면서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 곁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유언대로 인종은 1545년 2월 현재의 고양시 희릉에 중종을 장사하였다.
문정왕후는 ‘여걸’과 ‘악녀’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지녔지만, 한 지아비를 섬기는 여인이기도 했다. 다른 왕비와 지아비가 나란히 묻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만이 죽으면 지아비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는 사림의 반대를 무릎 쓰고 승려 보우를 중용했다.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한 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가 명당이라고 추천한 선릉 동쪽 동남향 언덕으로 중종을 이장했다. 이것이 바로 정릉이다. '정릉(靖陵)'에서 ‘정(靖)’자는 ‘편안하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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