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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정릉(靖陵)② 500년 고목은 여걸의 소원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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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정릉(靖陵)② 500년 고목은 여걸의 소원을 알고 있다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4.07.2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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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강남 도심 한복판에 왕릉이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나란히 위치한 선정릉(선릉·정릉)이다. 왼편에 위치한 선릉(宣陵)에는 조선 제9대 왕인 성종대왕과 계비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고, 오른편 줄기에 있는 정릉(靖陵)은 제11대 왕인 중종대왕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정릉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여걸로 꼽히는 문정왕후의 '남편에 대한 애틋한 정'이 낳은 산물이다. 하지만 죽어서도 함께 하려던 문정왕후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완성의 꿈'이 잠든 곳이다.

 
▲ 정릉의 비각 내부 모습. 전면에 '조선국 중종대왕 정릉'이라고 쓰여 있다.

명종은 문정왕후 사후 생전의 뜻대로 중종의 옆으로 장사하려 했다. 하지만 정릉은 지대가 낮아 한강의 범람으로 홍살문까지 물이 들어왔다. 침수된 곳을 보수하고 복토를 위해 해마다 엄청난 국고가 낭비됐다.

명종은 이런 곳에 어머니를 모실 수 없었다. 결국 태릉에 새롭게 능을 정했다. 생전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조선 최고의 여걸로 군림했던 문정왕후지만 지아비 곁에 묻히고 싶었던 생전의 꿈은 죽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 정자각에서 홍살문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지대가 낮음을 알 수 있다.

 

▲ 지대가 낮다는 방증일까? 현재 정릉 옆에서는 '선정릉 빗물 저류조 설치공사'가 한창이었다.

중종의 정릉은 봉분이 하나인 '단릉(單陵)'이다. 조선시대 왕의 능 중 단릉은 불운의 왕 단종이 잠든 장릉(莊陵 ·강원 영월군 남면 광천리)과 중종의 정릉 뿐이다. 중종은 3비 9후궁을 뒀지만 죽어서는 그 어느 여인과도 함께할 수 없는 비운의 지아비가 된 것이다.

▲ 정자각 뒤편에서 똑바로 올려다 본 정릉 능침의 모습이다.

 

▲ 정자각 뒤편 오른쪽에서 바라본 능침 전경이다. 큰 규모에서 문정왕후의 중종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중종의 정릉과 3명의 왕비의 능은 말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 원비인 단경왕후의 온릉(溫陵)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제1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태릉(泰陵)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그리고 중종 본인은 본의아니게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잠들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재실' 모습이다.

선정릉 입구에서 정릉으로 가는 길 옆에는 묵묵히 역사를 증언하는 고목들이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를 전하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수령 약 500년의 은행나무는 '능의 수호수'다운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 수령 약 500년의 은행나무는 높이가 24m, 둘레가 5.5에 이른다.

 

▲ 대추나무는 몇살을 먹어야 이렇게 클 수 있을까?

 

▲ 왕릉을 지켜온 향나무는 나이 탓인지 밑둥에 상처를 입었다.

 

▲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굵은 참나무도 역사의 흐름을 대변해 줬다.

 

☞ <[유필립의 Walking History] 정릉(靖陵)① 지아비 곁에 묻히려던 여걸의 '침수된 꿈'>도 함께 보세요.

 

philip@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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