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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본색] (14) '설행, 눈길을 걷다' 김태훈 "자기가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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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본색] (14) '설행, 눈길을 걷다' 김태훈 "자기가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있을까요?"
  • 원호성 기자
  • 승인 2016.03.08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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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원호성 기자·사진 최대성 기자] 김태훈이라는 배우는 참 매력적이다. 무표정하고 차분하게 캐릭터를 소화해 내다가 한 순간 광기어린 눈동자를 들이대고 온몸에서 강렬한 악의 기운을 뿜어낸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비비고 바라보면 얄밉도록 깐죽거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한없이 차분하게 침전되어 가라앉기도 한다.

3월 3일에 개봉한 김희정 감독의 영화 '설행, 눈길을 걷다'에서 알콜중독으로 인해 깊은 산 속의 수녀원에 들어가게 된 '정우'를 연기한 김태훈의 얼굴은 이 중 마지막이다. 손을 벌벌 떨며 담배를 겨우 물고 품 속에 감춘 술을 물처럼 들이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에서 OCN 드라마 '나쁜 녀석들'의 검사의 탈을 쓴 살인마 '오재원'이나 MBC 드라마 '한번 더 해피엔딩'에서 상처입은 아내 유다인을 따뜻하게 보듬는 남편 '김건학'의 이미지와 겹치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설행, 눈길을 걷다'의 언론시사회가 끝난 직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김희정 감독은 이 영화가 김태훈이라는 배우를 재발견하는 영화가 될 것이라며 "메마르고 상처받은, 웅크린 짐승같은 얼굴이 나왔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는 '설행, 눈길을 걷다'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준 것일까?

▲ 영화 '설행, 눈길을 걷다' 김태훈

◆ 알콜중독, "내가 이걸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 '설행, 눈길을 걷다'는 '정우'(김태훈 분)가 가방 한 개를 달랑 들고 알콜중독 치료를 위해 수녀원에 들어가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 수녀원에 대해 '정우'는 그저 어머니와 원장 수녀님이 아는 사이인 곳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수녀원은 '정우'의 어머니가 수녀로 있었던 곳이었다.

'정우'는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 가진 돈을 탈탈 털어 버스터미널 인근 슈퍼로 들어가 페트병에 든 소주 두 병을 사서 품에 감춘다. 그리고 수녀원까지 눈 덮인 산길을 걸어가면서 물을 마시듯 술을 벌컥벌컥 마신다. 그가 술을 마실 때마다 벌벌 떨리던 손은 차츰 진정이 되고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온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내가 알콜중독자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어요. 겉모습을 표현하려고 억지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알콜중독자가 가지는 증상이나 마음의 상태 그런 것들이 잘 묻어나왔으면 좋겠는데, 그걸 제가 표현하려고 노력만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이 있었죠. 그래서 감독님을 만나고 난 후에도 쉽게 선택을 못 했는데, 그렇게 돌아서고 나니 이 작품이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도전해 보자 결심했고,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보며 '정우'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과 고통, 고민들과 같은 것을 저도 같이 느껴보려고 했어요."

▲ 영화 '설행, 눈길을 걷다' 김태훈

'설행, 눈길을 걷다'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연기를 하는 배우의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영화였다. 영화의 앞부분은 그저 '정우'가 알콜중독 치료를 위해 수녀원에 들어가 지내는 이야기지만, 영화는 '정우'에게 관심을 보이는 수녀 '마리아'(박소담 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포수(최무성 분)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난해해지고, 이 위에 종교적 상징을 통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얹어낸다.

"알콜중독자에게는 섬망증상이란 것이 있어요. 쉽게 말하면 금단증상으로 인한 환각이죠. 근데 이것이 알콜중독자인 본인에게도 계속 헷갈리는 상태예요. 환각상태에서 어떤 장소에 가서 무슨 일을 했다고 하면, 다음날 그것이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헷갈리는 거죠. 영화에서 저는 '정우'가 경험하는 일들을 연기할 때 저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보다 모든 장면이 '정우'에게 실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상황에 집중해 연기하려고 했어요."

"영화의 배경도 수녀원이고 '설행, 눈길을 걷다'에는 종교적 상징도 많이 들어가 있어요. 하지만 제 자신이 종교를 믿지도 않고, 저 역시 연기할 때도 종교와 연결지어서 뭔가를 정립하고 표현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제가 잘 모르니까요. 대신 '정우'라는 상처받은 한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을 통해 마음을 나누며 위로를 받고 공감하고 교감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그것이 치유인 거죠. 이게 종교적인 상징하고 연결될 수도 있고 종교에서 말하는 영적인 교감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 영화 '설행, 눈길을 걷다' 김태훈

◆ 악역 전문배우? "악역도, 선역도 다 제 모습이에요"

날카로운 눈매와 날렵한 얼굴형 때문일까? 김태훈 배우의 이미지는 이상하게 악역 전문배우처럼 각인되어 있다. 이미 '나쁜 녀석들'이나 '앵그리 맘'과 같은 드라마에서 김태훈은 흔히 이야기하는 '천하의 개X놈' 소리를 들을 만한 악역을 연기했고, 심지어 그의 첫 흥행작이라 할 수 있는 '아저씨'에서 그가 연기한 강력반 형사 '김치곤'도 분명 악(惡)과는 거리가 먼 정의로운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차태식(원빈 분)을 방해하는 악당과 같은 이미지를 안겨준다.

김태훈의 이런 악역 이미지는 그의 형인 김태우 배우의 이미지를 고려해 봐도 흥미롭다. 김태우도 '해적 : 바다로 간 산적'을 비롯해,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등 여러 작품에서 강렬한 악역 연기를 보여줬지만, 사람들은 김태우를 악역 이미지보다 편안하고 푸근한 이미지로 기억한다.

반면 동생인 김태훈은 악역 연기를 많이 하긴 했어도 '일말의 순정'이나 '한번 더 해피엔딩',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등 여러 작품에서 악역이 아니면서 비중 있는 연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역 이미지가 왠지 강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그는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설마 이제 악역은 그만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일까?

"악역을 그만하고 싶다는 말은 농담이었어요. 당시 한창 악역에 많이 나올 때라 농담처럼 '저도 귀여운 사람이에요'라고 말한 것이 그렇게 읽혔나 봐요. 사실 저는 악역도 좋고 선역도 좋아요. 악역도 선역도 다 제 모습이니까요. 제 모습 중 하나고, 저는 가급적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하게 해보고 싶어요."

▲ OCN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서 '오재원'을 연기한 김태훈과 MBC 드라마 '앵그리맘'에서 '도정우'를 연기한 김태훈. [사진 = OCN '나쁜 녀석들', MBC '앵그리맘' 방송화면 캡처]

"실제 성격은 굉장히 유쾌하다고 생각해요. 설마 제 실제 삶이 '앵그리 맘'의 '도정우'같은 이미지일리는 없잖아요? 주변에서는 '일말의 순정'에 나왔던 모습이나 '약탈자들'에 나온 모습이 저와 비슷하다고도 많이 해요. 근데 악독한 모습들도 저는 제 실제 모습에서 많이 가져와요. 제가 그런 상황을 경험해본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를 고민하고 연기하는 거죠. 그러고보니 어쩌면 실제로는 제가 싸가지 없는 놈일 수도 있겠죠?"

김태훈은 최근 '응답하라 1988'과 '한번 더 해피엔딩' 등 두 편의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했다. '응답하라 1988'에서는 안재홍(김정봉 역)의 심장수술을 담당하는 심장외과의로 출연했고, '한번 더 해피엔딩'에서는 아내 백다정(유다인 분)과 오랜 결혼생활에 지쳐 이혼을 준비하다가, 아내가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되자 비로소 아내의 아픔을 이해하고 다시 아내를 보듬어주는 남자다. 두 배역은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모두 겉모습은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그런 배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응답하라' 시리즈를 좋아해서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작가분이 그 인터뷰를 보고 카메오 출연을 제의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당시엔 밝은 역할을 좀 해보고 싶었고, 당연히 '응답하라' 시리즈이니 짧게 나와도 밝고 명랑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대본을 받았는데 엄청 진지한 역할이고, 악역 안 하고 싶어서 선택했더니 처음에는 굉장히 싸가지 없어 보이는 역할이었어요. 물론 나중에는 따뜻한 면을 보여주지만 말이죠. '한번 더 해피엔딩'을 선택한 이유도 비슷해요. 악역을 계속 하다 보니 밝은 작품이 하고 싶었고, 배우로서 여러가지 다양한 배역들을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 영화 '설행, 눈길을 걷다' 김태훈

◆ 자기 만족을 모르는 배우 "자기가 연기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김태우라는 배우와 김태훈이라는 배우의 존재를 알아도 이들이 서로 형제 관계라는 사실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형인 김태우 배우는 악역을 해도 왠지 선하고 평범한 소시민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동생인 김태훈 배우는 선역을 해도 어딘지 악역 같은 느낌이 감돌 정도로 서로의 이미지가 정반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태우와 김태훈이 서로 형제 사이라는 것을 잘 모르는 이유는 이들 형제가 서로가 형제라고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형제가 모두 작품에서 연기를 하는 것을 제외하면 예능 프로그램등을 통한 노출이 적은 편이기도 하고, 서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연기를 소화해 내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가 김태우 동생이라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굳이 알릴 이유가 없다는 의미가 정확할 것 같아요. 형제 관계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우리 형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숨길 필요는 없지만, 제 입으로 굳이 동네방네 김태우가 우리 형이라고 말하고 다닐 이유도 없다는 거죠. 저는 사실 '김태우 동생'이라는 말이 불편해요. 전 항상 제가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김태우 동생'이 연기를 못 한다는 것을 굳이 자랑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죠. 형은 형대로, 저는 저대로 한 발 한 발 그렇게 가는 거니까."

▲ 영화 '설행, 눈길을 걷다' 김태훈

"연기를 왜 잘못한다고 생각하냐고요?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가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있을까요? 저는 여태까지 연기를 하면서 한 번도 제가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예전에는 40대가 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40대가 되고 보니 지금은 50대가 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그럼 50대가 되면 또 60대가 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제가 제 연기를 보며 잘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해요."

김태훈은 사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는 배우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방송으로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대신 극단에 들어가 연극무대에서 자신의 연기를 좀 더 갈고 닦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뒤늦게 영화를 시작했을 때도 좀 더 편하게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오가며 서서히 자신의 연기를 대중들에게 알려왔다. 그렇게 김태훈이라는 배우는 항상 자신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좀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설행, 눈길을 걷다'가 러시아의 한 영화제인가에 출품됐을 때 제 연기를 보고 저 친구가 진짜 알콜중독자냐고 물어봤었대요. 전 옛날에는 관객입장에서 영화를 볼 때 배우가 깡패를 연기하는데 배우가 아니라 진짜 깡패처럼 보이고 이러면 좋다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막상 제가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게 칭찬일까 싶어지더라고요. 저 사람이 진짜 알콜중독자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것이 칭찬인 건지, 아니면 배우가 정말 알콜중독자처럼 연기를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진짜 칭찬인 건지 헷갈려요. 그렇게 지금도 계속 고민해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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