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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2) 야구공 하나로 극과 극의 롤러코스터를 타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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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2) 야구공 하나로 극과 극의 롤러코스터를 타다! (上)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4.08.07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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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극과 극 인생 김홍집과 김선진

케이블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년10월 18일~12월 28일)가 지난해 연말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극 중 간간이 보여준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 장면은 스포츠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물론 1994년에는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만 인기를 모았던 것은 아니다. 그 해에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미국 월드컵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가 넘쳐났다. 여기에 K리그는 물론 배구 슈퍼리그가 스포츠팬들의 시선을 집중케 했다. 그리고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리즈 ‘응답하라 스포츠 1994’가 그들을 만나러 간다. <편집자주>

▲ [그림=스포츠Q 일러스트레이터 신동수] 김홍집과 김선진은 야구공 하나로 극과 극 행보를 걸었다. 그 공 하나가 없었더라면 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300자 Tip!] 1994년은 LG의 해였다. ‘서울의 자존심’ 트윈스는 81승45패(0.643)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2위 태평양을 10.5경기차로 제치고 페넌트레이스 1위에 올랐다. 투타의 완벽한 조화 속에 한국시리즈에서도 4연승을 거두며 퍼펙트 시즌을 보냈다. 이는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의외의 결승포로 꼽히는 1차전 대타 끝내기 홈런 덕이었다. 141구 투혼을 펼친 최고 투수를 상대로 터뜨린 백업 선수의 ‘뜬금포’는 양팀 팬들의 희비를 엇갈리게 만들었다.

[스포츠Q 민기홍 기자] 1994년 10월18일 잠실구장, 한국시리즈 1차전.

인천 연고팀으로는 13년만에 첫 우승을 노리던 태평양 돌핀스는 그해 ‘신바람 야구’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LG 트윈스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 선봉에는 안경 낀 좌완투수 김홍집(43)이 나섰다. 태평양은 그의 140구 역투에 힘입어 LG와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11회말 1사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는 대타 김선진(47)이 들어섰다. 그는 그 해 단 48경기에 출전해 1홈런 20안타 7타점을 기록했을 뿐인 평범한 타자에 불과했다.

▲ 11회말 1사 주자없는 상황. 김선진은 김홍집의 초구 슬라이더에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냈다. [사진=KBSN스포츠 방송 화면 캡처]

김홍집은 141구째를 던졌다. 슬라이더였다. 김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고 높이 뜬 타구는 좌측 담장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야구의 묘미를 잘 드러낸 끝내기 홈런이었다.

두 팀의 운명은 이 공 하나로 갈렸다. 완벽한 ‘신바람 야구’로 정규리그를 거머쥐었던 LG는 이 승리로 기세를 잡고 한국시리즈를 인천에서 끝내버렸다.

팀뿐만이 아니었다. 두 선수의 운명도 엇갈렸다. 기량이 만개했던 김홍집은 이후 끝 모를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쳤고, 방출대상자였던 김선진은 팀의 주축 선수로 거듭났다.

◆ 정점 찍고 급하강, 김홍집의 롤러코스터 

“11회까지 던진 거 후회는 안하죠. 안하는데, 그 홈런 안 맞았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은 많이 했죠. 감독님, 코치님이 내려가라고 하셨을 때 내려갔으면 하는 생각도 해봤고요. 그 경기 이겼더라면 아직까지도 현역 생활 하고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 경기’의 여파는 컸다. 김홍집은 다시는 그런 눈부신 공을 던지지 못했다.

사실 김홍집은 단국대 시절 고려대 이상훈, 한양대 구대성과 함께 좌완 트로이카로 통했다. 김홍집은 면도날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가볍게 돌려세우던 투수였다. 2학년 때는 국가대표팀에 승선하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인천 연고의 태평양은 1993년 구단 역사상 최초로 억대 계약금(1억2000만원)을 안기며 김홍집을 영입했다.

김홍집은 첫 시즌 7승8패 평균자책점 3.64를 기록하며 팀의 기대치에 부응했다. 1993년 태평양이 34승82패, 승률 0.310에 불과한 최약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준급 성적이었다.

프로 적응을 마친 그는 이듬해 꽃을 피웠다. 12승3패 평균자책점 3.20으로 승률왕(0.800)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인천 홈경기와 잠실 원정경기에만 출장하며 이뤄낸 성적이었기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조금씩 닳고 있었다. 2년간 무려 9번이나 완투를 했다. 1993년 6월20일 LG전에서는 187개를 던지며 13이닝 16탈삼진 3실점하며 승리를 거둔 적도 있다.

2014 시즌 완투를 한 투수는 10명. 그 가운데 2명은 우천으로 5이닝 완투를 한 것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절대 못하죠. 요즘엔 그렇게 시키는 지도자도 없겠지만요. 어떻게 견뎠나 모르겠어요.”

▲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등판한 김홍집. 그는 그 해 방위로 20경기에만 나서고도 12승을 거두는 빼어난 활약을 했다. [사진=KBSN스포츠 방송 화면 캡처]

다른 팀들의 보약이나 다름없던 태평양은 1994년 김홍집을 필두로 정민태, 최창호, 정명원이 살아나며 정규리그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연승으로 가볍게 따돌리고 인천팀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1차전 선발은 ‘당연히’ 김홍집이었다. 그는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도 한화 정민철과 맞대결에서 승리했다. 대학 시절부터 줄곧 라이벌이었던 LG 이상훈과 태평양 김홍집의 맞대결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매치업이었다.

그러나 김홍집은 141구째 통한의 홈런을 얻어맞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 뒤 단 한 번도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하지 못했다. 반면 동기생 구대성과 이상훈은 한국 무대를 정복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1994년 이후 현대와 한화를 거치며 9년을 더 뛰었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통산 29승25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4.08은 화려했던 김홍집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성적이었다.

“그 형 미워하는 마음 있었죠. 왜 없었겠어요. 선진이 형이 2군에서 그러셨대요. 홍집이 언제 1군 올라가냐고. 그래야 나도 올라갈 수 있다고. 그 말 들었는데 속상하더라고요. 이제는 뭐 소주나 한잔 하고 싶네요. 하하.”

▲ 김선진의 1차전 끝내기 홈런으로 기세를 올린 LG는 4연승으로 우승을 확정지었다. 1994년 10월23일 통산 두 번째 우승 후 팬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는 LG 선수단. [사진=LG 트윈스 제공]

[응답하라 스포츠1994](2) 한국시리즈 극과 극 인생 김홍집과 김선진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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