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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스피드배구 그 후, 한국배구가 진정 가야할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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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스피드배구 그 후, 한국배구가 진정 가야할 길은?
  • 최문열
  • 승인 2016.04.1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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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최문열 대표] “엉덩이가 허리에 붙어 있네요. 저러니 점프와 탄력이 좋을 수밖에.”

“저 큰 신장과 체형의 비율을 보세요. 참 부럽네요.”

과거 국제대회에 취재하러 갔을 때 쿠바와 네덜란드 여자대표팀 선수들의 우월한 신체구조를 보고 국내 배구인들은 이렇게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동양인의 체형 상 신장이 크면 느리거나 또는 힘이 약하기 마련인데 외국 선수의 경우는 큰 키에 신체비율 좋고 힘과 속도까지 갖추고 있으니 부러울 수밖에.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요즘 한국배구가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배구협회(회장 박승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위해 지난해 10월 고교 대학 유망주 14명을 대표로 선발하고 올해 1월 특별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세계 배구의 흐름인 ‘스피드 배구’의 효과적인 장착을 위해서다. 이어 협회는 2016년 리우올림픽 세계여자배구예선전(5월 14~22일 일본 도쿄)과 6월 열리는 2016년 월드리그 국제남자배구대회를 앞두고 오는 20일과 5월 18일 여자와 남자 대표 팀 기술 간담회를 차례로 연다. 한국배구의 현주소와 미래 방향 등 대표 팀 운영 전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다.

남자배구의 경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4회 연속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등 요즘 국제 무대에서 영 맥을 못 추고 있는 터여서 협회가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한 협회의 노력이 머잖아 빛을 보길 바라는 것은 팬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자연스레 들었다. 현재 세계배구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는 스피드배구를 하면 대외 경쟁력이 크게 상승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한발 더 들어가면 스피드배구는 동양인 체형의 열세까지 뒤집을 만큼 위력적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지난 3월 막을 내린 V리그에서는 스피드배구의 단 맛과 쓴 맛을 동시에 맛봤다. 현대캐피탈이 사상 처음으로 단일 시즌 18연승의 대기록을 세우며 정규리그 우승을 한 것은 스피드배구의 위엄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시몬을 앞세운 OK저축은행에 3승1패로 일격을 당한 것은 선수 전원이 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배구’의 실체를 드러냈다.

앞으로 남자대표팀은 쿠바 출신의 시몬과 오레올 같은 선수로 구성된 최강 팀들과 대적해야 한다. 스피드배구의 후발주자가 과연 그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을까?

더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것은 옳다. 한데 그것만으로 높이와 힘의 배구를 능가할 수 없다면 우리만의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모방과 답습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것을 뛰어넘는 우리만의 특별한 것이 있어야 정상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1895년 윌리엄 G, 모건이 처음 만들고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첫 정식종목이 된 이래 배구는 새로운 기술 및 전술 반란의 역사를 갖고 있다. 올림픽은 주 무대였다.

먼저 일본은 1960, 70년대 ‘힘의 배구’를 구사하던 러시아에 맞서 기술 배구로 전성기를 구가한 바 있다.

고 다이마쓰 히로부미 감독이 이끄는 일본여자팀은 회전 수비(rolling dive)와 볼 끝의 변화가 심한 체인지업 서브(floating change-up service)를 앞세워 당시 175연승을 달렸으며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아시아 구기 종목 사상 올림픽 첫 금의 감격을 맛봤다.

일본남자대표팀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땄는데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마쓰다이라 야스타카 감독은 다양한 속공 기술과 함께 시간차 공격을 개발해 ‘기술 배구’의 돌풍을 주도한 인물이다. 또 센터 모리타 준고는 개인시간차 공격을 처음 선보였다.

러시아와 일본의 양 강 구도를 깨부순 것은 폴란드였다. 폴란드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남자배구 결승에서 러시아를 꺾고 최종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폴란드는 마쓰다이라 일본 감독이 개발한 속공의 변형을 꾀했으며 중앙 속공수인 토마스 오이토위츠(Tomasz Wojtowicz)는 처음으로 후위 공격을 뽐내며 공격배구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이변은 일어났다. 동구권이 불참해 반쪽대회로 치러진 1984년 LA올림픽에서 우승한 덕 빌 감독의 미국남자팀은 서울올림픽에서도 연속 우승하며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당시 덕 빌 감독은 서브리시브를 카치 키랄리(Karch Kiraly)와 팻 파워스(Pat Powers) 2인에게 전담시키는 ‘분업배구’ 전술을 들고 나왔다.

초창기에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네덜란드가 ‘높이배구’라는 개념을 앞세워 정상에 오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도 배구 반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206cm에 육박하는 세계 최장신 세터 피터 블랑게를 비롯해 당시 남자배구 최장신 팀이었던 네덜란드는 1985년 올림픽 금 사냥을 위한 프로젝트를 가동한 뒤 10년 만에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1988년 서울올림픽 5위를 시작으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2위에 이은 정상 등극은 감독이 한 차례 바뀌면서도 ‘높이배구’를 밀어붙인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의 기본 구조 아래 서브리시브가 불안해도 한 박자 빠르게 공격하는 스피드배구를 들고 나온 브라질이 우승한 것도 같은 연장선상이다.

이처럼 올림픽 무대는 다양한 배구 전술의 장으로 자리매김해왔다.

한국배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스파르타식 강한 훈련과 정신력으로 똘똘 뭉친 1960, 70년대 일본여자대표팀을 연구한 한국은 국내 실정에 맞는 한국 형 조직배구를 구축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유정화 유경화의 더블세터 시스템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다. 또 1977년 11월 일본 오사카에서 벌어진 제2회 월드컵여자배구대회에서는 H퀵이라는 새로운 공격무기를 선보여 3위를 차지했고 현지 언론과 국제 배구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H퀵은 일본 언론이 당시 전호관 감독의 이름 첫 이니셜을 따 붙였는데 전위에 3명의 공격수가 있을 경우 공격수 2명이 A퀵과 B퀵을 할 것처럼 점프해 상대 블로킹을 따라 붙게 한 뒤 제3의 공격수가 그 중간으로 파고들어 속공을 하는 방식이다.

자 이제, 한국배구가 다시 세계 정상권을 두들기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서구와의 신체적 불리를 인정하고 올림픽 본선 진출에 만족하고자 한다면 열심히 남의 것을 모방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좀 더 높은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만의 전술 전략, 우리만의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남미와 유럽 선수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선수들은 과거에 비해 체형 상 많은 발전을 이뤄왔다. 국내에 프로가 도입되면서 그 기반도 점점 단단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배구도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여자배구가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메달(동)을 따낸 것처럼, 남자배구가 1979년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4강에 오른 것처럼 다시 한 번 돌풍을 일으키기 위해선 ‘스피드배구 그 이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스피드배구는 하나의 과정이지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배구인들의 창의적인 사고와 뚝심 있는 도전이 그 무엇보다 절실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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