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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3) 스타선수 없이 수비배구에서 길을 찾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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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3) 스타선수 없이 수비배구에서 길을 찾는 법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4.09.01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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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구단' 고려증권 전성시대 열었던 명장 진준택 KOVO 경기운영위원장

케이블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년 10월 18일~12월 28일)’가 지난해 연말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극 중 간간이 보여준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 장면은 스포츠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물론 1994년에는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만 인기를 모았던 것은 아니다. 그 해에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미국 월드컵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가 넘쳐났다. 여기에 K리그는 물론 배구 슈퍼리그가 스포츠팬들의 시선을 집중케 했다. 그리고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리즈 ‘응답하라 스포츠 1994’가 그들을 만나러 간다. <편집자주>

[300자 Tip!] 배구 올드팬들에게 추억의 팀이 된 고려증권은 현대자동차서비스와 더불어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실업배구팀이었다. 장윤창, 유중탁이 스타트를 끊은 계보는 이경석, 정의탁, 이재필, 박삼용, 이성희로 이어졌다. 선수 개개인의 화려함보다는 조직력과 끈기로 똘똘 뭉친 이들은 1984년부터 11년간 대통령배에서 5회, 1995년 시작된 슈퍼리그에서 1회 등 총 6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여기에 대통령배 준우승을 3번 차지했고 최우수선수(MVP)를 6차례나 배출했다. IMF 사태로 모기업이 쓰러져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전성기 시절 고려증권 선수들의 플레이는 올드 배구팬들 머릿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상암=스포츠Q 글 이세영·사진 이상민 기자] 1996년 슈퍼리그 챔피언결정전 4차전은 배구팬이라면 명승부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 경기다.

당시 고려증권은 초창기 주전이었던 장윤창과 유중탁이 은퇴해 전력이 크게 약해진 상황이었다.

▲ 진준택 위원장이 이끌었던 고려증권은 화려함보다는 끈끈한 조직력으로 상대를 괴롭혔던 팀이었다.

하지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공포의 외인구단’ 같았던 고려증권은 마낙길, 임도헌, 강성형, 윤종일 등 초호화 스타들이 즐비한 현대자동차서비스를 3승1패로 제압하고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2년 전 당했던 패배를 고스란히 돌려준 고려증권이다.

당시 고려증권 감독을 맡았던 진준택(65)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위원장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끼친다”며 짜릿했던 승부를 떠올렸다.

◆ "1994년 좌절 있었기에 1996년 우승 결실"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서비스는 1980~90년대 실업배구를 양분했다. 1984년부터 고려증권이 2연패를 달성했고 현대자동차서비스는 1986년 대회부터 3연패를 이뤘다.

이후 고려증권이 또다시 2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대통령배 마지막 두 시즌은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서비스가 한 차례씩 나눠 우승했다. 1994~1995시즌부터 시작된 슈퍼리그에서도 현대자동차서비스와 고려증권은 한 번씩 우승을 거두며 라이벌 관계를 유지했다.

우철우 감독 후임으로 1986년부터 고려증권 사령탑에 오른 진준택 위원장은 “현대자동차서비스가 존재했기에 고려증권이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막강한 모기업을 뒤에 두고 있는 현대자동차서비스에 비하면 고려증권은 자금이 넉넉한 팀은 아니었다. 현대자동차서비스에 비해 회사 규모가 현저하게 작았던 고려증권은 외부 수혈보다는 내부 육성으로 선수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 진준택 위원장은 고려증권이 해체된 이후 동해대(현 한중대) 교수,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감독을 역임한 뒤 지난해부터 KOVO 경기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이 고려증권의 1994년 우승을 막았다. 대통령배 1, 2회 대회에서 MVP를 나눠 수상했던 장윤창과 유중탁은 선수 생활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실력을 능가하는 선수는 없었고 고려증권은 세트스코어 0-3, 1-3, 2-3으로 패하며 3전 전패로 우승컵을 현대자동차서비스에 내줬다.

“우리팀 주전들이 노쇠화를 겪고 있는 사이에 현대자동차서비스는 대학에서 좋은 기량을 갖춘 선수들을 많이 데려갔습니다. 드래프트 제도가 없었을 때니까 돈이 많은 팀들이 좋은 선수를 뽑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죠. 그때는 우리가 신구조화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승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1996년 우승이 1994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선수들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기 살기로 노력했거든요.”

◆ 현대차(車) 불매운동까지 불사했다

1993~1994시즌 현대자동차서비스의 아성을 넘지 못했던 고려증권은 이듬해에는 결승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대통령배 5회 우승에 빛나는 명성에 자존심이 긁힌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려증권은 다시 실업배구 왕좌를 찾아야 했고 라이벌에게 뺏겼던 트로피도 가져와야 했다. 잃었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고려증권 선수들은 힘든 훈련도 견뎌내며 결전을 기다렸다.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서비스는 실업 원년부터 라이벌 의식이 있었어요. ‘다른 팀에는 져도 저 팀한테는 지지 말자’는 분위기가 형성됐지요. 그러다보니 선수들 간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선수단 내부에서 현대자동차를 사지도 타지도 말자는 운동까지 있을 정도였지요.”

서로를 향한 견제가 대단했던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서비스는 1995~1996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또 한 번 만났다. 대통령배까지 포함하면 5번째 결승 맞대결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챔프전 3차전까지 2승1패로 앞섰던 고려증권은 4차전에서 무조건 끝내려 애썼다. 장기전으로 갈 경우 선수 평균연령이 높은 고려증권이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현대자동차서비스는 선수가 20명이나 있었는데 우리는 12명에 불과했어요. 그만큼 교체 멤버가 적었기 때문에 장기전은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 1995~1996시즌 슈퍼리그 챔프전 우승이 확정된 순간 고려증권 선수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사진=KBS 방송 화면 캡처]

챔피언 결정전 4차전은 고려증권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한 판이었다. 선수들의 눈은 불이 켜져 있듯 반짝이면서도 날카로웠고 공 하나에 목숨을 바치듯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를 펼쳤다.

이에 맞선 현대자동차서비스도 마낙길, 임도헌, 강성형 등 화려한 스타군단을 앞세워 고려증권에 응수했다.

양 팀의 명승부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4세트까지 세트스코어 2-2 승부가 펼쳐졌고 우승 트로피의 주인공은 5세트 듀스까지 가서야 갈렸다.

14-14 듀스 상황에서 고려증권이 달아나면 현대자동차서비스가 쫓아오는 식으로 경기가 전개됐다. 17-16으로 고려증권이 앞선 상황. 고려증권 이성희가 서브를 넣었고 현대자동차서비스 강성형이 회심의 스파이크를 날렸다. 하지만 이것이 최성영의 디그에 막혔고 고려증권은 이성희의 토스에 이은 이수동의 스파이크로 경기를 끝냈다.

통산 6번째 우승이자 슈퍼리그 첫 우승을 거머쥔 순간이었다. 우승이 확정되자 고려증권 선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벅차오르는 기쁨을 만끽했다. 이것이 고려증권의 마지막 우승이었다.

◆ 고려증권, 배구의 진수를 맛보게 한 팀

1996년 슈퍼리그 패권을 차지한 고려증권은 이듬해 뜻밖의 암초를 만난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문에 선수단이 존폐 위기에 놓인 것.

1997년 한국을 강타한 IMF 사태로 많은 스포츠팀이 해체됐다. 고려증권도 그 중 하나였다. 모기업의 부도가 결정되면서 배구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 진준택 위원장의 배구 지론은 '선 수비 후 공격'이었다. 그는 공격수를 뽑을 때도 수비 실력을 먼저 점검했다.

진준택 위원장은 “1997시즌은 배구협회가 재정을 지원해 줘서 구단을 운영할 수 있었는데 끝내 인수 기업이 나타나지 않았다”며 “결국 금전적인 어려움에 부딪쳐 구단이 해체됐다”고 안타까워했다.

“1996년에 조직력으로 화려함을 꺾는 이변을 연출했지만 회사 상황이 안 좋아 더 끌고 갈 수 없었어요. 고려증권이 해체되고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잘 성장한 선수는 별로 없었습니다. 고려증권에 있을 때 빛을 발하던 선수들이 다른 팀에서는 잘 적응하지 못했지요.”

다른 팀의 일원으로 들어간 제자들이 줄줄이 배구를 그만두자 진 위원장은 시름이 컸다. 고려증권은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약속된 플레이로 전력을 극대화시킨 팀이었고 특정 선수들이 주전에 있어야 힘이 발휘되는 팀이었다. 대신 개개인의 능력은 다른 구단 선수들에 비해 떨어졌으며 이것이 때 이른 은퇴를 불렀다.

진준택 위원장은 은퇴를 한 선수들의 근황을 전했다. 그는 “배구계에 몸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초창기 멤버였던 이경석(전 LIG손해보험 감독)은 올시즌부터 KOVO 경기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세터 이성희는 프로배구 여자부 대전 KGC인삼공사 감독을 맡고 있으며 류중탁 역시 명지대학교 감독이다. 장윤창은 경기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진 위원장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고려증권 멤버들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나는 바빠서 잘 가지 못했다”며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서 배구계를 떠난 선수들의 근황을 잘 모른다”고 멋쩍게 웃었다.

마지막이 좋지 않았지만 진준택 위원장은 고려증권이 배구의 참맛을 알게 해 준 팀이라고 고백했다.

“자로 잰 듯 돌아가는 플레이는 제가 맡은 팀이었지만 예술이었어요. 그 당시 배구를 봤던 팬들은 지금 이런 배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따금 고려증권을 떠올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공격수를 뽑을 때도 수비 실력을 먼저 점검했어요. 그만큼 수비가 우선시 되는 배구를 추구했죠. 수비가 잘 됐을 때 공격도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증권은 나에게 배구의 진수를 맛보게 한 팀입니다.”

[취재후기] 고려증권 같은 배구팀이 또 나올 수 있을까. 고려증권 선수들은 자신이 돋보이는 플레이를 하지 않았다. 항상 팀을 먼저 생각했으며 조직력을 중요시 여겼다. 이제 실업배구가 프로화 된 지 10년이 지났다. 외국인 선수들의 화려한 스파이크는 팬들의 오감을 자극하지만 이들에게 집중된 공격은 전체 배구판의 발전을 막고 있다. 때로는 고려증권의 투박하지만 이타적인 플레이가 팀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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