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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8) '레슬링 명예의 전당' 지도자 박장순의 행복론, 챔피언보다 더 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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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8) '레슬링 명예의 전당' 지도자 박장순의 행복론, 챔피언보다 더 중한 것은?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6.06.20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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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형 부활' 열정 쏟는 올림픽 3연속 메달리스트 박장순 대표팀 감독…'꿈을 먹는 레슬러' 키우기

[200자 Tip!] 올림픽 3회 연속 메달을 획득한 레슬링 선수는 전 세계적으로도 몇 되지 않는다. 두 체급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심권호(42)가 한국의 대표적인 레슬러로 손꼽히지만 그 이전에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레슬러가 있었다. 바로 박장순(48·삼성생명) 레슬링 자유형 국가대표팀 감독. 박 감독은 1988서울 올림픽부터 3회 연속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고 메이저 4개 대회를 휩쓰는 그랜드슬램도 달성했다. 모두 한국 레슬링 최초의 위업. 세계 레슬링 역사에 남긴 이 업적을 최근 세계레슬링연맹(UWW) ‘명예의 전당’ 헌액으로 인정받은 박 감독은 “장기적으로 좋은 선수를 육성해 레슬링 자유형의 부활을 이끌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용인=스포츠Q(큐) 글 이세영·사진 이상민 기자] 지난달 26일 한국 레슬링에 낭보가 하나 날아들었다. 심권호 대한레슬링협회 이사 헌액 이후 2년 만에 UWW ‘명예의 전당’ 입회자가 배출된 것.

주인공은 바로 박장순 레슬링 자유형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박 감독은 선수 시절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자유형 74㎏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세계 매트를 호령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자유형 68㎏급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자유형 74㎏급에서도 각각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 박장순 감독이 용인 삼성생명 휴먼센터에 위치한 레슬링 훈련장에서 스포츠Q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밖에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 1996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모두 정상에 오르며 한국 레슬링 사상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 '자유형의 레전드'로 명성을 떨쳤다.

UWW는 이번에 각 부문 15명의 명예의 전당 입회자들을 발표했는데, 박 감독은 전‧현직 한국 레슬러들 가운데 유일하게 자유형에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UWW 오피셜 1명, 지도자 2명, 팀 리더 2명, 여자 자유형 2명, 그레코로만형 4명, 자유형 3명이 선정된 이번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 중 박 감독은 유일한 한국인이자 아시아인이었다.

경기도 용인 삼성생명 휴먼센터에서 만난 박 감독에게 명예의 전당 입회 소감을 먼저 묻자 그는 “처음에는 얼떨떨했는데, 자유형 3명 중에 아시아인이 처음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분이 좋았다”며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20년 동안 묻혀있었는데, 세계레슬링연맹에서 날 인정해 준 것 같아 영광이었다. 개인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자유형의 침체기 속에서 후배들에게 자극제가 된 것 같아 기쁘다”고 활짝 웃었다.

◆ '올림픽 3연속 메달', 그 과정은 힘겨웠다

올림픽 3회 연속 메달과 한국 레슬링 최초 그랜드슬램 달성. 운동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지만 박장순 감독의 레슬링 인생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레슬링 전향부터 선수생활을 위협한 부상까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가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전국소년체전에서 우승하는 등 씨름선수로서 남다른 실력을 발휘했던 박 감독은 지금은 폐교된 충남 보령 청웅중학교 때 레슬링으로 전향했다. 체구가 작아 씨름선수로서 한계가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청웅중 감독이 하체 중심이동이 좋은 박 감독의 재능을 높이 산 것도 전향을 결심한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상대를 들고 넘기는 게 버거웠는데, 씨름할 때 배운 재빠른 기술을 레슬링에 적용하다보니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온 몸을 사용하는 자유형 종목을 선택했습니다.”

▲ 박장순 감독은 2년간 조금씩 먼데이와 기량차를 좁혔고 마침내 가장 큰 무대인 올림픽에서 짜릿한 승리를 맛봤다. 뒤에 보이는 사진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한 뒤 포효하고 있는 박 감독이다.

그렇게 모래판 대신 매트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박 감독은 불과 스무 살에 생애 첫 올림픽을 경험했다. 1988 서울 올림픽이 그의 첫 올림피아드였다. 자유형 68㎏급에서 은메달을 딴 박 감독은 4년 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체급을 올려 74㎏급에 도전한다. 이번에도 결승까지 진출했다. 상대는 이 체급 디펜딩챔피언 캐니 먼데이(55‧미국). 당시 해외 전문가들은 먼데이의 우승을 예상했지만 박 감독은 경기 종료 15초 전 총알 같은 태클을 성공시키며 1-0 승리, 세계를 놀라게 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치르기 2년 전부터 먼데이 선수와 자주 붙었는데, 6번 정도를 졌어요. 그런데 지면서도 두려운 게 없었어요. 저는 밑에서 올라오는 체급이었기 때문이죠. 여러 번 상대하다보니 처음엔 버겁다가도 나중에는 이 선수에 대한 방어력이 생기더라고요. 올림픽 두 달 전에 마지막으로 맞대결을 했는데, 그땐 ‘내가 조금만 집중하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결전의 그날 금메달을 땄습니다.(웃음)”

박 감독은 먼데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면 지도자로 입문하기도,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선수로서 가장 화려한 순간을 보낸 박장순 감독에게도 남모를 시련이 있었다. 레슬링 경기 도중 머리를 크게 다쳐 트라우마를 겪은 것. 한국체대 1학년 때인 1987년 한 선배와 경기를 하다 매트 바깥에 머리를 쿵하고 찧었다. 머리에 큰 충격을 입은 박 감독은 바로 정신을 잃었고 가까스로 눈을 뜬 뒤에도 사고 당시 기억 때문에 매트에 쉽게 오를 수 없었다.

“3개월 뒤에 그 선배와 다시 경기를 했는데, 제가 폴로 이겼어요. 그 자신감으로 서울 올림픽에 나갔고 메달까지 딸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엇나갈 수 있었는데, 남들 놀 때 훈련하고 운동한 게 나중에 저에게 돌아오더라고요.”

▲ 박장순 감독은 "매트에 오는 것이 늘 즐겁고 매트에서 뒹굴 때가 가장 행복한 선수로 키우는 게 내 꿈이다"라고 말했다.

◆ 금메달리스트보다 '바른 꿈을 꾸는 레슬러'

이렇게 굴곡진 레슬링 인생을 걸어온 박장순 감독의 지도자로서 꿈은 무엇일지 궁금했다.

돌아온 대답은 바로 ‘꿈을 먹는 레슬러 키우기’다. 올림픽 챔피언을 키우는 게 모든 지도자의 로망이라지만 그것보다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남겼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게 박 감독의 철학이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레슬러로 키우고 싶다. 그래서 매트에 오는 것이 늘 즐겁고 매트에서 뒹굴 때가 가장 행복한 선수로 키우는 게 내 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힘들어지면 꿈도 열정도 포기하게 된다. 그때 지도자가 ‘넌 할 수 있다’라며 꿈을 불어넣어주면 선수도 용기를 얻게 된다. 난 아직 부족하지만 선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한 지도자 생활을 하는 거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레슬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을 어필해야"

꿈을 먹는 선수를 발굴하고 키우기 위해서는 레슬링에 접근하는 방법부터 바꿔야 한다는 게 박장순 감독의 생각이다.

해마다 출산율이 떨어짐에 따라 선수 수급도 날로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 이런 실정에서 매우 한정된 인원으로 국가대표팀을 꾸리고 올림픽에 나가는 건 경쟁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박 감독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직접 찾아 아이들에게 레슬링의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슬링에 대한 직접적인 느낌을 주기보다 레슬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어필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레슬링을 함으로써 예의범절과 부모님의 사랑, 친구들과의 우정 등을 느낄 수 있다”며 “이런 가치를 전달했을 때 전문적으로 배우길 원하는 아이들이 나온다. 그때 아이의 부모를 슬기롭게 설득시켜 아이가 거부감 없이 레슬링에 입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늦었을 때가 기회라고 생각하는 그다. 통합체육회 시대에 생활체육으로서 레슬링의 가치를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전한다면 아이들의 마음도 열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유소년 레슬링을 전담하는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전국을 돌면서 레슬링을 알릴 생각입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직접 레슬링을 가르쳐준다고 하면 학교 측에서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저는 모든 걸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죠. 토대만 만들지 못했을 뿐이지,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지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과 힘을 합쳐서 조만간 유소년 레슬링 활성화를 위해 재능기부를 할 생각입니다.”

▲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 획득을 확정지은 뒤 왼팔을 들고 있는 윤준식.(왼쪽)

◆ '24년째 올림픽 노골드', 자유형의 도전은 계속된다

박장순 감독은 레슬링 부흥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미래의 레슬링, 그 중에서도 이번 리우데자네이루 림픽에서 자유형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간판선수인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 윤준식(25‧삼성생명‧57㎏급)이 있지만 이란을 비롯해 러시아, 몽골, 북한 등 자유형에서 강세를 보이는 나라들이 많다.

그럼에도 박장순 감독은 자신이 정상을 차지한 이후 끊긴 올림픽 금맥이 24년 만에 이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윤준식은 2년 전 아시안게임 때 이란의 강호를 꺾은 경험이 있다. 그 선수를 이겼다는 건 세계 정상급 선수와 백지 한 장 차이라는 것”이라며 “경기를 하면서 자기 몸 안에 있는 에너지가 완전히 나온다면 충분히 금메달도 바라볼 수 있다”고 낙관했다.

“지도자로서 롱런한 비결은 따로 없어요. 그저 제 길을 꾸준히 묵묵하게 걸어왔기 때문에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떨 때는 내 주도권을 내려놓고 선수 입장으로 돌아가는 형 같은 지도자, 선수의 편에서 이야기해주는 지도자가 되려고 애썼어요. 하지만 선수의 힘이 없었다면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전 행복한 지도자입니다.”

■ 박장순 감독 프로필

△ 생년월일 = 1968년 4월 10일 (충남 보령)
△ 체격 = 172㎝ 80㎏
△ 출신학교 = 청웅중-대전체고-한국체대
△ 주요 경력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팀 임원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팀 코치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팀 감독
- 2008년 삼성생명 레슬링단 감독
-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레슬링 국가대표팀 코치
- 2016년 리우 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팀 감독
- 대한레슬링협회 이사
- 대한레슬링협회 강화위원회 위원
△ 수상 경력
- 1988년 서울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8kg  은메달
-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자유형 74kg 금메달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자유형 74kg급 금메달
- 1993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자유형 74kg급 금메달
- 1996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자유형 74kg급 금메달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74kg급 은메달

[취재후기] 박장순 감독에게 레슬링은 ‘팥소 없는 찐빵’이다. 그의 인생을 모두 바꿔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 레슬링을 접하지 못했다면 보령 산골짜기에서 계속 살았을 거란다. 자신에게 인생의 환희와 좌절, 기쁨과 슬픔을 안겨준 레슬링에 박 감독은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레슬링을 통해 얻은 것을 이제 대중들에게 베풀려 한다. 박 감독을 ‘레슬링 전도사’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그가 유소년 레슬링에 눈을 돌려 토대를 닦고 저변을 넓히려는 데 팬들도 마중물이 돼 소통의 접점을 찾아주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이라. 좋은 아이디어는 레슬링 자유형의 부활을 위해서도 뜻깊을 것 같다.

▲ "선수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겸손해 하는 박장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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