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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단편영화계 전도연' 박주희, '마녀'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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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단편영화계 전도연' 박주희, '마녀'되다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09.10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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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노민규기자] 올해 한국 독립영화의 성장세는 현기증이 일 정도다. 예전 같지 않은 뜨거운 관객 반응이나 무시로 해외 영화제에서 알려오는 수상소식은 이를 입증한다. 묻혀 있던 배우들의 발견은 또 하나의 수확이다. 국내 영화계가 상반기 ‘한공주’의 천우희를 발굴했다면, 하반기엔 ‘마녀’의 박주희(27)라는 걸출한 여배우를 건져 올렸다.

한국영화가 무섭게 성장하던 시절의 정취가 남아 있는 충무로 뒷골목의 자그마한 카페. 영화 개봉(9월11일)을 앞두고 가을을 부르는 짙은 브라운 컬러 원피스 차림의 귀여운 마녀가 등장했다.

 

◆ 오피스 호러 ‘마녀’에서 섬뜩한 신입사원 세영으로 빙의

‘마녀’는 오피스 호러, 그러니까 일상 공간인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공포를 담았다. ‘알고보니~’식 소문이 꼬리를 무는, 주변을 위험에 몰고 가는 신입사원 세영이 자신을 갈구며 왕따시키는 깐깐한 팀장 이선(나수윤)을 향해 벌이는 오싹한 행동이 점층된다. 유영선 감독은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의 10분의1에도 못 미치는 3000만원의 제작비로 때깔 좋은 호러영화를 만들어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공포영화를 전혀 못 봤어요. 관습적 연기에 갇힌 호러퀸에 대한 편견도 있었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공감 가는 독특한 이야기라 끌렸어요. 생활소품을 활용한 아이디오도 좋았고요. 감독님이 저를 위해 세영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죠.”

촬영 전 감독으로부터 해외 공포영화 ‘캐리’ ‘오디션’ ‘배드 시드’를 추천받았다. 일본영화 ‘오디션’(1999)은 충격적이었다. 그 분위기의 반만 살려도 성공적이겠다 싶었다. 연기할 땐 공포영화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사와 동료들 이야기라 현실적인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떻게 하면 진짜처럼 보일까’가 크랭크 업 순간까지 박주희를 따라다닌 고민이었다.

▲ '마녀'의 극중 장면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씩 밝혀지는 세영의 정체는 악마성을 지닌 채 태어나서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악행을 벌이는 인물이다. 병적인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해하거나 저주의 주술을 건다. 어떠한 고통이나 죄책감도 없이 오로지 사랑에 눈 먼 캐릭터를 박주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발산하며 스산한 공포로 엮어낸다.

“캐릭터 분석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이유를 찾게 되잖아요. 세영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게 부모님의 사랑이 부재해서일까, 타고난 욕망이 많은 사람이라서일까 파고들었죠. 그렇다고 누구나 세영처럼 되진 않잖아요. 허구의 인물이라 여기다가 TV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성향의 사람을 보고나서 ‘타고나길 악하게 태어났구나’란 결론에 이르렀죠. 현실이 영화보다 더 무서운 것 같아요. 그 뒤부터는 연기하기가 쉬어졌어요.”

◆ 생활소품 이용한 자해와 살인…재미나게 연기

영화에는 가위, 압정, 커터칼, 과도, 면도칼, 연필 등 생활소품을 이용해 가해와 살인이 이뤄진다. 특히 세영이 쌍둥이 언니 세민(이미소)의 입안에 과도를 천천히 집어넣었다가 빼는 장면이라든가 사랑을 거부당한 뒤 제사의식처럼 행하는 자해장면은 섬뜩하다.

 

“잔인한 장면은 오히려 재밌게 촬영했어요. 압정을 상대의 배에 박는 신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서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반면 화장실 안에서의 자해장면은 감을 못잡아 헤맸죠. 너무 강하게 하면 웃길 것 같고 수위조절이 힘들었어요. 대부분의 공포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에서 쾌감을 제공하는데 따라 하기 싫었거든요.”

직장생활 경험 없던 박주희가 이물감 없이 ‘마녀’에 임할 수 있었던 데는 직장인 친구들과 아르바이트 경험이 큰 도움을 줬다. 이유 없이 갈구는 상사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고, 호텔 주방에서 3개월 동안 조식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간에선 위계질서, 왕따, 이상한 소문 등이 나돌게 됨을 경험했다.

“생활인들이 공감할 법한 이야기라고 여겼어요. 공포영화 마니아를 겨냥한 작품이라기보다 드라마, 스릴러, 블랙코미디 장르가 어우러진 웰메이드 오락영화라고 봐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때 첫 공개가 됐을 때 관객 반응을 보고 확신이 들었어요. 예감이 좋아요.(웃음)”

◆ 건국대 1학년부터 단편영화 출연…중편·장편·시트콤 섭렵

박주희는 자기 방어기제가 강하다. 단편영화 ‘동면의 소녀’(2012)에서 인연을 맺은 유영선 감독이 박주희를 염두에 두고 세영 캐릭터를 창조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차갑고 날선 표정을 짓다가 어느 순간 무장 해제되는 양면적 모습에서 호러의 영감을 얻었다.

 

“낯가림이 심해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긴장하면 굉장히 방어적이 돼요. 증상은 세영이처럼 시니컬한 표정에 단답형으로 대답해요. 시나리오를 보니 감독님이 저를 잘 캐치하셨더라고요. 후후. 시나리오를 보고 내게 최적화된 캐릭터라 잘할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대신 나만 알고 있는 부분을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랐죠.”

박주희는 ‘단편영화계의 전도연’으로 불릴 만큼 숱한 단편영화 여주인공으로 활약해 왔다. 대학(건국대 연극영화과) 1학년 때 시작해 외부 인력과 일한 건 ‘졸업여행’(2012)부터였다. 배창호 감독의 중편영화 ‘여행’,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MBC에브리원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아이돌 가수 역으로 출연했다.

“익숙하고 재밌고 스트레스 없이 작업할 수 있어서 단편영화에 줄곧 출연했어요. 엉뚱하고 중성적인, 독특한 캐릭터가 많았어요. 사연 있는 여고생 역할을 정말 많이 한 것 같아요. 이번엔 호러물인 데다 영화를 책임지는 여주인공이라 부담과 책임감이 컸어요. ‘마녀’ 이후 상업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오는데 작은 역할이나마 연기적으로 보여줄 캐릭터를 해내고 싶어요.”

 

올해 미장센 단편영화제에는 ‘만일의 세계’와 ‘비행소녀’가 출품됐다. 다음달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자전거도둑’ ‘거인’ ‘주는 마음’ 등 무려 3편이 초청받았다. 각각 가출한 여고생, 권태에 빠져 연인에 이별을 고하는 취업준비생, 등록금을 벌기 위해 자전거를 훔치는 여대생, 상냥한 성당 누나, 술만 먹으면 남친에게 전화를 거는 여자 캐릭터를 연기했다.

◆ 많은 이야기 하는 큰 눈이 매력 포인트

롤모델 여배우는 전도연과 드라마 ‘연애의 발견’에 출연 중인 정유미다. 관객 입장에서 실망한 적이 없을 정도로 작품 선택을 잘 하며, 박주희가 추구하는 연기를 하는 매력적인 여배우라서다.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감독으로는 허준호, 김태용, 홍상수, 박찬욱 감독을 꼽는다. 최근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 오디션 공고가 떠서 이에 도전할 계획이다.

“예전에 홍상수 감독님께 ‘어떤 기준으로 캐스팅을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러자 ‘예쁜 건 얼마 안 간다. 못생겨도 귀여운 사람, 함께 있으면 즐거운 배우를 캐스팅한다’고 대답하시더라고요. ‘내가 원하는 게 저거였어!’라며 무릎을 쳤어요. 외모가 아닌 매력적이고 귀여운 배우가 되려고요.”

 

[취재후기] 여고시절, 박신양 주연의 ‘파리의 연인’을 본 뒤 심장박동 소리에 이끌려 배우의 길을 선택한 소녀는 혹독한 무대공포증을 극복하고는 배우로 맹활약하고 있다.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만 바꾸면 여러 얼굴이 나오는 이 여배우의 가장 큰 매력은 또랑또랑한 딕션과 많은 이야기를 하는 큰 눈이다. 그의 연기는 눈에 고스란히 비쳐진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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