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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충무공이야기', 이순신 장군이 주는 희망가치를 다시 곱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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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충무공이야기', 이순신 장군이 주는 희망가치를 다시 곱씹다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4.09.11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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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세월호 참사. 정국 표류, 민생 외면... 2014년 갑오년도 어느덧 하반기의 한복판을 향해 치닫고 있다. 한해의 출발점은 아득해졌고 끝자락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되돌아 보면 올 한해는 기쁨 보다는 슬픔, 후련함 보다는 답답함이 만성두통처럼 우리를 지겹게 짓눌렀다. 온통 불신의 시대다. 위기에는 믿고 따를 리더가 필요하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우리를 의지할 든든한 리더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명량’이 세우고 있는 ‘공전의 히트’ 기록에는 암울한 세태가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충무공이야기'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두 영정을 만날 수 있다. 왼쪽 영정은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으로, 1973년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충남 아산시 현충사 소장). 오른쪽 영정은 1977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구군복 차림의 영정이다(경남 통영시 제승당 소장).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이 원하는 영웅은 누구일까? 국민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이익은 물론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고,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강자보다 약자 편에서 일을 처리하고, 사람의 감성을 어루만질 수 있고, 혜안으로 위기에 미리 대비하고, 시작과 끝이 일관하고, 필요할 경우 목숨까지도 내놓을 있는 인물이 아닐까?

이러한 인물이라면 언제든 ‘나를 따르라!’를 외칠 것이고 그때마다 백성은 주저없이 그를 따를 것이다.

이러한 ‘영웅’은 어쩌면 영화 속에나 가능한 캐릭터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에는 이같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인물이 실재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영화 ‘명량’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300여 척이 넘는 왜선에 맞서 단지 12척의 배로 대승을 거두면서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 ‘리더’의 중요성과 핵심가치를 일깨워줬다.

지난주 추석을 앞두고 대한민국의 중심지인 광화문에 들를 일이 있었다. 영화 ‘명량’을 보고난 후라 그런지 광화문 사거리에 우뚝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내친 김에 세종문화회관과 광화문 공원 지하에 있는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2시간 남짓, 지난해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울림이 마음 속에 다가왔다.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에 꾸며져 있는 설명문을 최대한 활용해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리더십을 되짚어 봤다.

광화문 네 거리에서 일본의 기운을 막고 있는 이순신 장군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광화문 네 거리에 꿋꿋하게 서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전체 높이 17m(동상 6.5m, 기단 10.5m)의 청동 입상 형태로 1968년에 건립되었다.

동상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워라”는 지시로 세워졌다고 한다. 직선으로 뻥 뚫려 있는 세종로와 태평로로 들어오는 일본의 기운을 막기 위한 풍수지리도 작용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설 때부터 여느 동상과는 전혀 다른 상징성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다.

▲ 이순신 장군 동상은 광화문 네 거리에서 오늘도 남쪽을 향해 강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하지만 동상은 건립된지 50년도 지나지 않아 2010년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곳곳에 녹물이 흘러내리고 겉이 벗겨지는 등 손상이 심했기 때문이다. 동상은 대대적인 이동작전을 통해 다른 위치로 옮겨져 40일간의 장기 치료를 마친 뒤 제자리에 돌아왔다.

동상은 제작과 보수과정은 물론 칼과 갑옷의 형태, 기단의 모양과 북의 위치 등이 역사 속의 충무공 당시와 다르다는 문제가 잇따라 제기되면서 지속적으로 논란이 돼 왔다. 지금도 일각에서는 부실시리즈라는 혹평과 힘께 다시 제작돼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논란을 배제한다면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기념물이자 국가와 국민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어 왔다.

◆ 광화문 광장 지하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두 '이야기'

광화문 광장에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런 위인 두 분의 동상이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이다. 그리고 세종대왕상과 세종문화회관 사이 지하공간에는 두 분의 일대기와 업적을 만날 수 있는 '세종이야기'와 '충무공이야기' 전시장이 있다.

'세종이야기'는 세종대왕 동상 바로 뒤쪽에 입구가 있고 '충무공이야기'는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입구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두 전시장은 서로 연결돼 있어 어느 입구로 들어서든지 편하게 관람할 수 있다. '충무공 이야기'만 둘러보려면 세종문화회관 왼편 출입구가 편리하다.

▲ 세종문화회관 왼편에 '충무공이야기'와 '세종이야기'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있다.

 

 

 

▲ '충무공 이야기' 입구의 벽에서부터 이순신 장군의 불굴의 기개가 느껴졌다.

 

▲ '충무공이야기'와 '세종이야기' 전시관의 안내도. 지하 전시관은 출입구 어느곳으로 들어가도 통하게 설계되어 있다.

6개 테마로 만날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리더십

'충무공이야기'는 6개의 테마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성웅 이순신의 생애' 관에서는 이순신의 삶과 일대기, '충무공' 시호의 의미를 소개하고, 이순신 장군의 대표 유물인 난중일기와 무과급제 교지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함선' 관에서는 조선의 주력 전투함인 판옥선과 당대 세계 최고의 돌격선인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 명나라 등 3국의 전투함을 소개하고 있다. 거북선 승선과 노젓기, 수군 무기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7년간의 해전사' 관에서는 임진왜란의 발생 배경과 해전의 역사, 임진왜란 후 3국의 변화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사와 해전술을 3면 복합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또 '난중일기를 통해 본, 인간 이순신' 관에서는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이순신의 리더십' 관에서는 당시 해전에서 사용했던 무기와 유물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국내외의 높은 평가와 리더십의 위대함을 접할 수 있다.  이외에도 '4D 체험관'에서는 체험의자에 앉아 3D영상물을 감상하며 전쟁의 현장을 체험해 볼 수 있다.

▲ 부조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모습에 생동감이 넘친다.

 

▲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진중(陣中)에서 쓴 난중일기(亂中日記).

 

▲ 무과급제 교지. 이순신 장군이 1576년 3월 무과시험에 급제학 받은 합격 증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 4월부터 1598년(선조 31년) 11월까지 장장 7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순신 장국은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남해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위태로운 나라를 구했다. 그는 주위의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하는 등 온갖 시련을 극복하면서도 묵묵히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이순신 장군은 리더십의 표상이다. '준비의 리더십' '원칙의 리더십' '불굴의 리더십' '애민의 리더십'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실천하며 열악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패하지 않는 '불멸의 기록'을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겼다.

이순신 장군의 창의력이 결집된 '거북선'

임진왜란 기간 중 조선 수군의 최첨단 전투함이었던 거북선은 당대 세계 최고의 돌격선이었다. 일본 수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거북선에는 이순신 장군의 유비무환 정신과 창의력이 번뜩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바로 하루 전에 제작이 완료된 거북선은 배 위를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쇠못을 촘촘히 꽂았다. 검술에 능했던 일본군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선체 안쪽에 노를 배치해 다른 배와 충돌해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거북선의 전후와 좌우에는 강력한 화력을 지닌 총통을 배치하였다. 일본군이 어느 방향에서 공격해 오더라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거북선의 탄생은 조선 수군에게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거북선은 조선수군의 연전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창의성과 준비성이 탄생시킨 당대 세계 최고의 돌격선이었다.

◆ 규모와 성능면에서 일본 군선을 능가했던 '판옥선'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판옥선(板屋船)'의 존재가 컸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이 1555년에 만든 신형 전투함이다. 그 전까지는 조선 전기에 개발된 '맹선(猛船)'을 주로 사용하였다. 화포로 무장하고 규모를 키운 일본 군선이 침략해 오자 조선의 맹선으로는 격퇴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맞서기 위해 배의 규모를 크게 키우고 상장 갑판을 설치하여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공간을 나누어 만든 것이 판옥선이다.

판옥선은 기동성이 좋고 견고해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으로 거북선과 더불어 큰 활약을 펼쳤다.

일본군은 검술이 뛰어나 백병전에 능했고 주로 상대방의 배에 올라타 싸움을 벌였다. 이런 일본군을 막기 위해 조선은 판옥선의 몸체를 높고 크게 제작하였다. 판옥선의 높은 구조는 위에서 아래로 활을 쏠 때 매우 유리했고, 함포를 올려놓은 포좌(砲座)가 높게 만들어져 명중률 또한 뛰어났다.

판옥선에는 또다른 장점이 있었다. 공간을 2,3층으로 구분하여 설계해 노를 젓는 격군(格軍)과 함포를 발사하는 포수(砲手)가 서로 방해받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으로 수심이 비교적 얕은 곳에서도 효과적으로 운용되었다. 키를 잡고 돌리면 제 자리에서 바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일본군의 전투함인 아다케부네와 세키부네는 첨저선이었다. 첨저선은 선체의 밑 부분이 V자형으로 되어 있어 속도가 빠르고 대양 항해에 유리하다. 하지만 빠른 방향회전이 어렵고 펄과 암초가 많은 연안에서의 항해에는 불리했다.

판옥선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견고함이 떨어진 일본 수군으로부터 조선의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 판옥선의 모습.

 

▲ '조선의 판옥선과 거북선, 일본의 아다케 부네와 세키부네를

 

▲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은 밑이 평평한 '평저선'(왼쪽)이었고 일본의 주력선은 및이 V자 모양의 '첨저선'이었다.

승리의 해전술= 치밀한 준비+전략적 사고+사기 진작

전투력은 병력과 무기만 많다고 해서 샘솟지 않는다. 여기에 조직력이 조화를 이룰 때 극대화 될 수 있으며 때와 장소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태'. 병서(兵書)에도 능했던 이순신 장군은 해전에 임할 때 항상 전략적 사고로 형세를 살피고 최적의 전술을 구사하였다. 또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정신력과 조직력을 강화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조선 수군이 유리한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뛰어난 해전술을 펼쳤다.

이순신 장군은 신뢰받는 진휘관의 전형이었다. 통제영 지휘소(指揮所)인 운주당(運籌堂)에서 휘하 장졸들과 작전 회의를 할 때도 그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회의에 참여시켰다.

상벌과 징벌도 확실히 했다.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는 상을 주고 ‘장계(狀啓)’에도 상세히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처음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20여 일이 지난 옥포 앞바다에서였다.

'옥포해전(玉浦海戰)'은 1592년 5월7일 정오 옥포(경상남도 거제시)에서 벌어졌다. 해안가에 배를 정박하고 약탈하고 있던 일본군을 화포와 화살로 공격하여 순식간에 26척을 분멸(焚滅)하면서 첫 승전고를 울렸다. 조선 수군은 첫 승리와 함께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 이순신이라는 최고의 지휘관을 필두로 연전연승의 해전사를 써갔다.

세계 3대 해전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7월 8일 오전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전개됐다.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적을 섬멸했다.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 수로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대형 군선인 판옥선으로 해전을 치르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육지가 가까워 일본 수군이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할 것을 염려하여 일본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먼저 전선(戰船) 5~6척이 견내량의 좁은 수로에 들어가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거짓으로 패한 척 물러나니 일본 함대는 돛을 펴고 추격해 왔다. 일본함대가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에 도달하자, 조선 함대는 일제히 선회하여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진향)을 형성하고 일본 함대를 에워쌌다. 이어 거북선 3척이 적진을 뚫고 지자·현자 총통을 발사하면서 일본 함대의 전열을 무너뜨리고 총공격을 퍼부었다. 마침내 일본군을 궤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산대첩은 조선 수군의 위용을 확인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충격을 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 명령을 내리게 되고, 해안에 성을 쌓고 지키도록 하는 등 일본군의 전략을 바꾸었다. 한산대첩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회피하는 전술로 일관하였다.

▲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을 거뒀던 해전 지역 지도.

◆ 단 12척, 그러나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

영화 '명량'의 소재가 된 '명량해전(鳴梁海戰) '은 1597년 9월 16일(오전 10시 전후~오후 3시)에  명량 수로(진도와 해남군의 화워반도 사이)에서 전개됐다.

명량해협을 침입한 일본 군선은 130여 척이었는데, 명량 해협 밖에서 대기한 척수까지 합하면 300여 척이 넘었다. 좁은 수로를 통과하기 어려운 대형 군선 아다케부네(安宅船)는 해협 밖에서 대기하고, 세키부네(關船) 위주로 협수로를 통과하여 조선 함대와 대결하였다.

당시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여 겨우 12척의 전선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선두에 서서 각종 함포와 화살을 쏘며 홀로 오랜 시간을 버텼다. 휘하 장수들이 이끈 나머지 전선들은 겁을 먹고 뒤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거제 현령 안위와 중군 김응함 등을 불러 군법을 시행하겠다며 질책하였다.

시간이 흘러 주선 수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류가 바뀌자 뒤에서 주춤하던 조선 함대가 돌진하여 본격적으로 접전을 벌였다. 피난선들로 구성된 해상 의병들도 후방에서 응원하였다. 강력한 반격으로 인해 31척의 군선을 잃은 일본군은 퇴각하였고 조선 수군은 승리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명량 수로 지도(왼쪽)와 조선 수군과 일본군의 대치도(오른쪽).

 '노량해전'에서 임종의 순간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하다  

노량해전(露梁海戰)은  1598년 11월 19일 (이른 새벽부터 정오경까지) 노량해협과 관음포(경남 남해군)에서 전개된 해전으로, 7년 해전 중 가장 치열한 근접전이 벌어졌다.

일본 함대가 노량 수로를 통과해 올 것을 예측한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진린(陳璘) 함대를 노량 수로 좌측에, 조선 함대를 수로 우측인 관음포(觀音浦) 위쪽 해상에 포진시켰다. 해전은 어두운 새벽녘에 일본 함대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됐다.

조·명 연합 함대의 화공 전술에 큰 타격을 입은 일본 함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퇴로를 찾아 관음포 쪽으로 이동하였다. 날이 밝아 퇴로가 막힌 것을 알게 된 일본 함대의 일부 병력은 남해도로 상륙하여 도주하고, 나머지 함대는 퇴로를 찾아 죽기를 각오하고 해전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7년 해전 중 가장 치열한 근접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화력 면에서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일본군보다 먼저 노량 수로를 막고 유리한 위치에서 전투를 시작했던 조명 연합 함대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포함한 장수 10여 명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 등 많은 장졸이 전사하였다.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노량 해전이 한창일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에 군사들이 슬퍼하고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며 최후의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작전도. 그는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해전을 이끌었다.

 

▲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승리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일본군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 평소 장검을 보며 승리를 향한 기개를 키우다

이순신 장군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기를 적절히 제작, 배치하고 상황에 맞게 활용해 전력을 극대화했다.

철환(鐵丸)과 장·편전, 피령전, 화전 및 천자·지자총통 등 다양한 화약 무기와 화살 등을 사용하였다. ‘임진장초(壬辰狀草)’에는 이와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적을 분멸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은 명문이 새겨진 장검(長劍)을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평소에 기상을 가다듬었다. 장검은 한산도에 있을 때 제작됐다. 하나에는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이, 또 하나에는 '일휘소통 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라고 새겨져 있다.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는 뜻이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그의 뛰어난 전략 전술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하자 명나라 황제는 도독의 벼슬을 내려주고, 특별히 '팔사품'을 보내 주었다. ‘팔사품(八賜品)은 ’황제가 내린 8가지 물품‘이라는 뜻이다.

'팔사품'에는 네 자루의 칼이 있다. 두 자루는 '귀도(鬼刀)'이고 따른 두 자루는 '참도(斬刀)'였다. 귀도는 손잡이가 귀신 모양과 같아 붙여진 호신용 칼이고, 참도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들의 목을 뵐 때 사용하는 칼이었다. 이외에도 수군 도독의 직위를 상징하는 도독인과 도독함, 군대를 지휘할 때 사용하는 나발인 '곡나발' 등이 포함되어 있다.

▲ '충무공이야기'에는 천차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화살, 장검 등 당시의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 이순신 장군은 '장검'을 항상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절개를 가다듬었다. 장검에는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 조선 수군이 사용했던 화살들.

 

▲ 중국 황제가 이순신 장군에게 하사한 '팔사품'. 맨 위는 '귀도', 맨 아래는 '참도', 가운데 왼쪽은 '도독인함', 가운데 오른쪽은 '곡나발'이다.

이순신이 전하는 12개의 희망 가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 동안,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승리를 엮어낸 그의 삶과 정신은 오늘날에도 희망과 리더십의 상징이 되고 있다.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은 12척의 적은 전선으로도 해전의 승리를 이끌었던 이순신 장군의 '불굴의 삶과 정신'을 ‘12개의 희망가치’로 표현하고 있다.

'충, 효, 애민, 도전, 혜안, 창의, 인품, 용기, 책임, 희생 소통, 감성'이 그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대표적인 어록에는 희망가치가 짙게 녹아 있다.

* 도전=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적의 전선을 적지만 보잘 것 없는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혜안=  "호남 땅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곧바로 나라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지을 옮겨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혜안)

창의= "신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적선 수백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쏠 수 있습니다"(창의)

= "혼자 수루에 앉아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한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인물이 없으니, 나라가 앞으로 어찌 될지 마음이 산란했다"

책임= "적과 서로 맞서서 이기고 지는 것이, 한 호흡 사이에 결정되는데, 장수의 임무를 맡은 자가 죽지 않았거늘 편히 누워있을 수 있겠느냐?"

* 용기= "병법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 희생=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 애민=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 참혹한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것 외의 노역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 겠다."

* 감성= "이날 밤 으스름 달빛이 수루를 비치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를 읊으며 긴 밤을 새웠다."

* = "아침에 나가 미처 돌아오지만 않아도, 어버이는 문밖에 서서 바라본다’ 하는데, 하물며 못 뵌지 3년째나 되니 어찌 하오리까...남이 들어도 눈물이 날 말씀이거늘 하물며 그 어머니의 자식 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 인품= "나와 율곡은 성이 같은 까닭에 만나 볼 만도 하지만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는 만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 소통=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한 것은 내 스스로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는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해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

▲ '충무공 이야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주는 '12가지 희망가치'를 만날 수 있다.

세계의 제독들이 존경하는 인물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세계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버나드 로 몽고메리와 같은 서양의 장군들은 물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도 이순신 장군에 대해 최고의 존경을 표했다.

이들은 이순신 장군을, 나폴레옹으로부터 영국을 구한 '트라팔가 해전'의 넬슨 제독과도 견줄 수 없는 명장으로 칭송하고 있다.

▲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전략은 세계의 해전사에서 불멸의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 '충무공(忠武公)', 시호 속에 녹아 있는 치열한 생전의 궤적

조선 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 가운데 나라에 큰 공이 있으면 사후에 시호를 내렸다. 시호는 살아생전의 행적을 참고하여 신중하게 결정하였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에게 내려진 '충무(忠武)'이다. 내 몸이 위태로워도 위를 받드는 것을 '충(忠)'이라하며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쳐 치욕을 막는 것을 '무(武)'라 한다는 뜻의 '충무'는 무관에게 가장 영예로운 시호였다.

이순신 장군이 공적은 시대가 흐르수록 더욱 높이 평가받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올랐고, 순국한 지 45년이 지난 1643년(인조 21년)에 드디어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의 직함이 더해졌고 그 직함이 82자에 이르렀다.

▲ '충무공이야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연출한 불멸의 해전사를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누구? (출처= '충무공이야기' 팸플릿에서 인용)

   * 본관 : 덕수(德水)

   * 자   : 여해(汝諧)

   * 시호: 충무(忠武)

   * 출생지 :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

   * 생년월일 : 1545년 3월 8일 ~ 1598년 11월 19일(음력)

   * 성격 : 진중하고 올곧음.

   * 취미 : 일기쓰기

   * 특기 : 활 쏘기, 격투, 말타기

   * 보물1호 : 일기장 "나의 모든 소중한 순간들과 그때그때 기분을 모두 담은 나의 역사서"

   * 좋아하는 음식 : 장국, 어육각색간랍(쇠고기 내장과 생선으로 만든 전), 장김치, 멸치젓

   * 대표업적 : 임진왜란 기간 동안 나라를 지킴. 조선수군의 주력 전투함인 거북선 고안.

 

philip@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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