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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병자호란 국치' 삼전도비의 굴욕과 롯데월드타워·매직아일랜드 자이로드롭의 역사적 콘트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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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병자호란 국치' 삼전도비의 굴욕과 롯데월드타워·매직아일랜드 자이로드롭의 역사적 콘트라스트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6.07.0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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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나라의 수치’를 ‘국치(國恥)’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간지(干支)로 ‘국치’를 붙이는 두 해가 있다. ‘병자국치’와 ‘경술국치’다.

‘병자국치(丙子國恥)’는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며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고 군신 관계를 맺은 ‘삼전도의 굴욕’을, ‘경술국치(庚戌國恥)’는 일제에 의해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돼 우리 역사상 최초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첫 국치의 현장은 우리의 발길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곳은 서울시민은 물론 전국민의 휴식처이자 놀이마당이 된 석촌호수의 한 켠이다. 석촌호수 동호와 서호 중 서호의 북동쪽 끝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 삼전도비는 380여 년전 조선시대 인조 임금이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리며 군신의 예를 다한 치욕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지난 5월 19일, 삼전도비를 찾았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나루였으며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한양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한강나루였던 삼전도는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70년대 이후 한강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삼전도는 병자호란(1636년) 때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한 수항단(受降檀)을 쌓고 청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에게 항복한 치욕의 장소다. 이곳에는 청나라에게는 전승비(戰勝碑)였지만 조선에게는 치옥의 상징이었던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세워졌다.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어떤 수모를 당하는지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太宗)의 강요로 세워진 비석이다. 정식 이름은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린다는 뜻의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비문은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 행위를 공덕으로 찬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전도비’라는 이름은 문화재 지정(사적 101호) 당시 지명을 따서 붙여졌다.

 
▲ 삼전도비 앞면에는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뒷면에는 한자로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삼전도비는 대리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졌다. 비의 전체 높이는 5.7m, 비신의 높이는 3.95m, 폭은 1.4m이고 무게는 32t에 이르는 대형 비석이다.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받침돌인 ‘귀부(龜趺)’ 위에 비문을 새긴 비신(碑身·몸돌)을 세우고, 맨 위는 이수(螭首·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로 장식했다.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 인조 15년 당시 이조판서 겸 대제학 이경석(李景奭)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 오준(吳竣)이 썼으며, 전액의 글씨는 예조참판 여이징(呂爾徵)이 썼다고 한다. 비석 앞면에는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뒷면에는 한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때문에 안내판에는 ‘17세기 세 나라의 언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삼전도비는 19세기 말 청나라의 국력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위치도 급전직하했다. 뒤웅박 팔자가 돼 이리저리 옮겨지고 땅 속에 파묻히기도 했다. 청일전쟁 이후 청의 세력이 약해지자 1895년(고종 32)에 강물 속으로 쓰러뜨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세웠다가 1956년에 묻어 버렸다. 1963년 홍수로 모습이 드러나면서 다시 지상 위에 세워졌다.

 
▲ 삼전도비는 '치욕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여러 차례 자리가 바뀌었다.

현재 ‘삼전도비’가 서 있는 오른 편에는 비석이 없는 ‘귀부’ 기단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 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가 용도 폐기되면서 비석 없이 남겨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다. 삼전도비는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를 곱씹으며 두 번 다시 그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삼전도비가 전해주고 있는 역사적 교훈은 무엇일까? 국제 정치에서는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하다는 점과 유비무환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 삼전도비 옆에는 비석이 없는 거북받침이 하나 있다. 더 큰 비석을 원하는 청 태종의 요구로 용도폐기 된 것으로 추측된다.

청(淸)은 본래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명나라의 국운이 쇠퇴하는 틈을 타 누르하치가 여러 여진족 부족을 통합한 뒤 후금을 세웠다. 명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힘이 막강해진 후금은 조선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정묘호란(1627년)을 일으켰다.

당시 광해군은 탁월한 중립외교로 실리를 챙겼다. 명나라의 지원군 요청에 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후금에 투항하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광해군을 왕좌에서 끌어내린 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다시 금나라를 배척하고 명과 친하게 지내는 ‘배금친명’ 정책을 썼다. 유효했던 광해군의 ‘실리주의’ 정치를 버리고 힘 빠진 명나라를 위해 ‘명분’을 택한 것이다.

 
▲ 삼전도비를 보호하는 지붕 위로 초고층의 롯데월드타워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에 청 태종은 직접 1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군신관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조선 조정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약을 맺고 훗날을 기약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했으나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어 삼전도에서 3번 큰 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예로 청 태종에게 군신의 예를 다해야 했다.

‘실리’보다 ‘명분’을 택한 인조의 결정은 혹독한 결과로 이어졌다. ‘썩은 동아줄’ 명(明)에 대한 의리를 중요시한 나머지,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된 청나라의 힘을 무시하고 ‘실리’를 저버리는 바람에,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씻을 수 없는 국가적 치욕을 당하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틈에 끼여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명분’과 ‘실리’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지정학적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삼전도비는 그 해답을 명징하게 전하고 있다.

삼전도비 가는 길

삼전도비는 지하철 2호선 3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석촌호수 기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가는 길에는 롯데월드의 마스코트 '로티' 밑을 지난다.

 
▲ 횡단보도 저편으로 언뜻 보기에 정자처럼 보이는 곳이 삼전도비다.
 
 
▲ 횡단보도 저편으로 언뜻 보기에 정자처럼 보이는 곳이 삼전도비다.

삼전도비에서 50여 m만 내려가면 석촌호수를 감싸는 산책길이 나오고 석촌호수의 수려한 경관도 눈에 들어온다.

 
 
 
 

석촌호수와 매직 아일랜드

삼전도비는 우리 역사의 치욕적인 순간을 증언하고 있지만 석촌호수의 풍광은 너무 풍요롭게 느껴졌다.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가 동화의 나라로 안내하는 듯했다.

청 태종 앞에서 한없이 낮아졌던 조선의 위상을 대변하는 삼전도비의 굴욕 현장과, 대한민국 최고층이자 세계 6번째 높이의 롯데월드타워(123층·첨탑 포함 555m)와 매직아일랜드 자이로드롭의 치솟은 위상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현재에 자만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민족은 언제든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있다. 석촌호수와 매직아일랜드, 롯데타워호텔 사이에 서 있는 삼전도비의 치욕적인 교훈은 그래서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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