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6 23:00 (화)
[열정 2016] (20) 경보 간판 김현섭, 쿵쾅쿵쾅 가슴 뛰는 극한 50km '뒤뚱뒤뚱 걸어서 세계속으로'
상태바
[열정 2016] (20) 경보 간판 김현섭, 쿵쾅쿵쾅 가슴 뛰는 극한 50km '뒤뚱뒤뚱 걸어서 세계속으로'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6.07.08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우에서 올림피아드 50㎞ 경보 첫 출격…세계대회 마수걸이 메달 꿈꾼다

[200자 Tip!]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걸린 306개의 금메달 중 가장 많은 47개가 육상에서 나오지만 한국은 유력한 금메달 후보가 없는 상황이다. 마라톤 외 육상 종목에서 한국이 딴 올림픽 메달은 단 1개도 없다. 마라톤에서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이봉주가 은메달을 딴 게 전부다. 저변이 좁은 한국 육상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라톤이 아닌 또 다른 로드(도로) 종목인 경보에서 올림픽 메달을 꿈꾸는 도전자가 있다. 바로 한국에서 가장 빨리 걷는 남자 김현섭(31‧삼성전자). 자신의 3번째 올림피아드인 2016 리우 올림픽에서는 20㎞ 대신 극한의 50㎞를 주 종목으로 선택했다. 회심의 카드를 꺼낸 김현섭은 리우에서 웃을 수 있을까.

[화성=스포츠Q(큐) 글 이세영‧사진 최대성 기자] “경보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뒤에서 보면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거든요.(웃음)”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경보를 하는 게 예전에는 민망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호기심을 가져 주는 게 좋단다. 이렇게라도 경보의 저변이 확대됐으면 하는 게 김현섭의 생각이다.

▲ 한국 경보의 '간판' 김현섭이 화성에 있는 삼성전자 육상단 훈련장 트랙을 걷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경보는 결코 만만한 운동이 아니다.

경보는 두 발을 지면에서 동시에 떨어뜨리지 않고 나아가는 레이스이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앞다리가 땅에 닿을 때 무릎을 굽히거나 양 발이 지면에서 모두 떨어진 순간이 나오면 반칙이다. 처음엔 주의를 주지만 경고 3번을 받으면 실격이다.

규칙 안에서 속도를 내려면 골반을 활용해야 하는데, 이때 특유의 오리걸음이 나온다. 김현섭은 “내가 훈련하는 걸 본 분들이 한 번 따라해 보고 웃고 즐기는 게 좋다. 이런 식으로 경보가 계속 언급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보를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김현섭은 한국 20㎞ 경보의 간판이다. 올림픽 다음으로 이름값이 있는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회 연속 ‘톱10’에 들었다. 2011년 대구 대회에서 4위, 2013년 모스크바 대회에서 10위, 지난해 베이징 대회에서 다시 10위를 차지했다. 세계선수권대회 3회 연속 톱10 진입은 한국 육상 최초다.

또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 1개와 동메달 2개를 땄고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를 목에 걸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체전을 8연패로 휩쓸었으니 국내에는 적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절대강자 없는 50㎞ 주종목 선택, 변수는 '체력'

김현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20㎞ 경보 23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같은 종목 17위에 랭크됐다.

두 번의 올림픽을 치르면서 순위가 올랐다. 하지만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는 20㎞가 아닌 50㎞를 주 종목으로 선택했다. 20㎞와 50㎞ 두 종목 모두 참여하지만 50㎞ 경기에 더 중점을 두기로 했다.

■ [WHO Q] 한국 올림픽 경보, 누가 걸어왔나?

올림픽 20km 50km
1988 서울

정필화 46위
정명호 49위

 
2000 시드니 신일용 30위  
2004 아테네

신일용 29위
이대로 33위
박칠성 41위

김동영 27위
2008 베이징 김현섭 23위
박칠성 33위
김동영 31위
2012 런던 김현섭 17위
변영준 31위
박칠성 중도기권
박칠성 12위
임정현 33위
김동영 37위

 

이유는 무엇일까?

김현섭은 “경기 전에 소화하는 훈련량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50㎞를 걷는 것을 싫어했다. 완주에 대한 두려움과 의구심도 있었다”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은퇴하기 전에 올림픽에서 한 번은 50㎞를 걷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도전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민호 삼성전자 육상단 수석코치의 끊임없는 설득이 김현섭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있었다. 이 코치는 2012년부터 “20㎞와 50㎞를 병행하면서 50㎞ 메달권 진입을 노리자”고 설득했고, 김현섭은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서 3회 연속 톱10을 달성한 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로 했다.

▲ 훈련량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처음에는 50㎞를 선택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20㎞와 50㎞를 병행하면서 50㎞ 메달권 진입을 노리자"는 이민호 코치의 설득에 김현섭은 50㎞ 경보에 도전했다.

동양인 선수가 50㎞ 종목에서 선전한 것도 주 종목 변경에 영향을 줬다. 지난해 베이징 세계육상선수권대회 50㎞ 경보에서 일본의 다니 다카유키가 3시간42분55초로 동메달을 따내는 장면이 김현섭에게 자극을 준 것. 다니는 20㎞에서 김현섭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선수였지만 50㎞를 주 종목으로 택한 뒤 세계선수권 메달을 거머쥐는 쾌거를 울렸다.

“비슷한 신체조건의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메달을 땄기 때문에 ‘나라고 못할 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 종목이 뚜렷이 정상권으로 분류되는 선수가 없는 ‘춘추전국시대’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50㎞에 도전한 김현섭은 리우 올림픽 출전권까지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3월 19일 슬로바키아 두딘스에서 열린 세계경보챌린지 남자 50㎞에 출전해 4시간1분6초(25위)를 기록, 올림픽 출전 기록인 4시간3분보다 일찍 피니시 라인을 끊었다. 생애 처음으로 50㎞ 완주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리우행 티켓 획득이라는 목표는 달성했지만 경기력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날 초반부터 선두그룹에서 뛰며 40㎞까지 3, 4위권에서 레이스를 펼쳤지만 42㎞ 지점에서 체력적인 한계를 드러내며 기록과 순위가 뚝 떨어졌다.

김현섭은 “50㎞는 20㎞와 반대로 경기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우 올림픽에서는 앞에서 선두를 운영하기보단 뒤에서 경쟁자들의 움직임을 보며 추월 기회를 노리겠다. 보강운동과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체력을 더 끌어 올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첫 50㎞ 레이스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리우행 티켓을 따는 데는 성공했다. 김현섭은 절대강자가 없는 50㎞에서 깜짝 금메달을 꿈꾼다.

◆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경보가 '신의 한 수' 될 줄이야

‘걷기의 달인’ 김현섭이 처음부터 경보에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었다.

강원도 설악중 1학년 때 체육교사의 추천으로 육상에 입문한 김현섭은 800m와 1500m를 뛰는 중거리 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기량이 좀처럼 늘지 않아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

이때 김현섭의 경보 전향을 이끈 이가 바로 김형성 당시 설악중 감독이었다. 김현섭은 “그때 감독님이 ‘운동 그만 둘래? 경보 시작할래?’라고 설득 아닌 설득을 하셨다. 운동을 그만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경보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는 동계훈련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때부터 기량이 늘었고 속초상고 3학년 때 전국체전 경보 1만m 남고부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제 길에 대한 확신이 들기 시작했어요.”

선수 은퇴 기로에서 경보를 선택했고 이것이 김현섭에게 ‘신의 한 수’가 됐다.

▲ 중거리 선수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선수 은퇴 기로까지 놓였던 김현섭에게 김형성 감독이 손을 내밀었고 경보 선수로서 새 삶을 살게 됐다.

◆ '러시아 출전 불투명' 호재, 세계대회 노메달 한 푼다

경보 선수로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김현섭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국내와 아시아 무대에서는 금메달을 많이 땄지만 세계무대에선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 2011년 대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위를 차지한 게 최고 순위. 최초 성적은 6위였지만 금메달과 은메달을 딴 러시아 선수 2명이 금지약물을 복용해 ‘기록 삭제’ 처분을 받았고 김현섭은 4위로 올라섰다.

김현섭은 “시상대 맨 위에 서고 싶은 마음은 어느 선수나 간절하다. 모두가 우승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50㎞에 출전한 경험은 적지만 독보적인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금메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올림픽을 기다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리우 올림픽에서 김현섭의 호성적을 기대할 수 있는 요소가 또 있다. 경보 최강국 러시아가 도핑 파문으로 올림픽 출전이 어려워진 것. 러시아가 빠지면 중국, 일본, 스페인 등이 혼전 구도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김현섭은 “한 명이라도 덜 나오면 나에게 좋을 수도 있겠지만 크게 따지진 않는다. 어차피 나중에 또 상대해야 할 선수들이기에 이번 올림픽 출전 여부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 김현섭은 경보 최강국 러시아가 리우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해 "어차피 나중에 또 경쟁해야 할 선수들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육상하면 김현섭을 떠올릴 수 있도록"

김현섭은 리우 올림픽이 자신의 마지막 올림피아드라고 못박지는 않았다.

이유가 있다. 한국 성인 남자 경보선수가 7명에 불과하기 때문. 경보가 육상에서도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실업팀이 적고 새로운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 실정이다.

김현섭은 “후배들이 올라온다면 선배로서 자연스럽게 선수생활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당분간 내가 더 끌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씁쓸해했다.

이어 “선배들이 그만 두면 후배들이 우리가 겪었던 걸 똑같이 경험해야 한다. 난 그걸 원하지 않는다. 후배들이 편한 길로 갈수 있게끔 하는 게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성적을 잘 내서 경보가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보 간판의 남다른 책임감이다.

김현섭은 열리지 않은 길을 개척한 선수들을 롤모델로 꼽았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까지 외로운 길을 걸어간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리라.

“김연아와 박태환은 비인기 종목이었던 피겨스케이팅과 수영을 큰 꽃으로 만들어준 선수들이에요. 한국인으로서 메이저리그(MLB) 마운드를 가장 먼저 밟은 박찬호 형님도 마찬가지이고요. 저는 그런 선수들을 우상으로 삼고 있어요. 저 또한 제가 몸담고 있는 경보에서 선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커요.”

김현섭은 현역 은퇴 후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을까. 경보를 넘어 육상의 대표선수로 불리고 싶단다.

“지금은 육상하면 마라톤, 마라톤 하면 이봉주 형을 떠올리는데, 앞으로는 ‘육상하면 김현섭’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게 제 꿈이자 바람입니다.”

■ 김현섭 프로필

△ 생년월일 = 1985년 5월 31일 (강원 속초)
△ 체격 = 176㎝ 61㎏
△ 출신학교 = 설악중-속초상고-경운대
△ 주요 경력
-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한국 남자 육상 국가대표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 2011년 대구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2년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 2013년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 2015년 베이징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국가대표
△ 수상 경력
- 2004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1만m 경보 동메달
- 2005년 아시아경보선수권대회 20㎞ 은메달
- 2006년 유럽육상연맹 경보대회 20㎞ 금메달
-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20㎞ 경보 은메달
-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20㎞ 경보 동메달
- 2011년 아시아경보선수권대회 20㎞ 은메달
-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20㎞ 경보 동메달
- 2014년 아시아경보선수권대회 20㎞ 은메달
- 2015년 아시아경보선수권대회 20㎞ 은메달

[취재후기] 리우에서 마라톤 풀코스보다 긴 거리를 걸어야 하는 김현섭. 3시간이 넘도록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그가 레이스를 펼치는 자신에게 내리는 주문은 ‘포기하지 말자’다. 완주가 경보의 최고 가치라 생각하는 김현섭에게 ‘포기’는 배추 세는 단위일 뿐이다. 부디 지금처럼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 한국 경보의 큰 별로 남길 바란다.

▲ 김연아와 박태환처럼. 김현섭은 비인기 종목인 경보의 개척자가 되길 원하고 있다.
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관련기사

주요기사
포토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