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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어찌 그날을 잊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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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어찌 그날을 잊을쏘냐"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6.07.26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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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와 문화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법궁(法宮)’은 왕이 사는 궁궐들 중 으뜸이 되는 궁궐을 일컫는다. 경복궁(景福宮)은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1395년에 새 왕조의 궁전으로 세웠다.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복궁은 조선의 으뜸 궁궐이었고 지금은 수도 서울의 중심이다.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 대한민국을 찾는 전세계 관광객들이라면 대부분 꼭 들르는 최고의 명승지가 됐다. 근정전의 위엄과 경회루의 낭만적 품격, 향원정의 수채화같은 아름다움, 그리고 건물들의 화려한 단청과 격식은 전세계 관광객들의 마음을 단번에 빼앗는다. 겉으로 보이는 경복궁은 온통 화려하고 웅장함 일색이다. 영광스런 순간만 기억하고 있을 듯하다.

하지만 경복궁은 역사적으로 아픔을 많이 겪은 궁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화제로 불탔다가, 275년이 지나서야 다시 태어났다. 고종 때인 1867년 흥선대원권의 주도로 중건되었고, 당시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 광화문 과장에 최북단에서 바라본 광화문
▲ 광화문 사이로 흥례문이 보인다.
▲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이다.
▲ 근정문(勤政門)은 근정전으로 향하는 모두에게 엄숙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 근정문(勤政門)

하지만 경복궁은 조선 최고 법궁으로서의 본분을 되찾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시련을 맞이한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나라에서 경복궁은 더 이상 법궁의 역할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는 고난을 당했고, 근정전 등 아주 일부 중심 건물만 남았다. 그 대신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근정전 정면에 떡하니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광복된 대한민국에서도 경복궁은 1990년이 돼서야 비극적인 역사를 뒤로하고 온전한 활기를 되찾는 걸음을 떼게 됐다.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興禮門) 일원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泰元殿·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 일원의 모습을 회복했다. 현재는 2차 복원사업 계획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흥복전(興福殿) 권역 등을 복원하고 있다.

▲ 경복궁 약도
▲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지금은 전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소다.
▲ 근정전
▲ 근정전

경회루(慶會樓)는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이 곳은 왕이 신하들과 큰 규모의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경회루는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조선 건축 미학의 절정으로 꼽힌다.

안내문에 따르면, 경회루는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년(태종 12)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돌기둥만 남은 것을 1867년에 재건하였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이며, 넓이 931㎡의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경회루는 주역의 원리에 기초하여 지었다고 한다. 중앙의 3칸은 천지인(天地人)을, 12칸은 1년 열두 달을, 20칸 바깥에 있는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추녀마루에는 우리나라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11개의 잡상(雜像 · 궁전이나 전각의 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신상(神像)을 새겨 얹는 장식 기와)이 있다. 1867년 재건 당시에 청동으로 만든 두 마리 용을 연못에 넣어 물과 불을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1997년 11월 준설작업 도중에 출토돼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 경회루(慶會樓)
▲ 경회루
▲ 경회루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중심이 되어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고 일본의 세력 강화를 꾀했던 정변을 일컫는다.

을미사변과 관련해 경복궁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혀질 수 없는, 한 국모의 비극적인 죽음의 현장이 오늘도 후세에 뼈아픈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조선의 최초 황후인 명성황후 시해 현장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경복궁 북쪽 끝 부분에 위치한 건청궁 곤녕합에서 일본인들에게 시해되었다. 조선을 지배하려던 일본은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자 타국의 왕궁을 무단 침입해 국모를 시해하는 반인륜적인 폭거를 저지른 것이다.

건천궁은 고종을 위해 지은 '궁 안의 궁'이었다. 향원정 북쪽,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고종은 1873년(고종 10)에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을 하는 상징적이자 실질적인 장소로 건천궁을 세웠다.

건청궁은 왕의 처소인 장안당(長安堂),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坤寧閤), 서재인 관문각(觀文閣)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  건청궁(乾淸宮)은 고종 황제가 세운 뒤 명성황후와 함께 계셨던 곳이다. 명성황후는 이 곳 안에 있는 처소 곤녕합에서 일본 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했다.
▲ 건청궁
▲ 건청궁 약도
▲ 고종이 계시던 장안당(長安堂)·)
▲ 장안당(가운데)과 추수소용루(왼쪽)

1895년 2월 청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군이 조선에 잔류하려고 하자 고종은 완전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일본 군부는 조선 왕실을 압박하는 비상 상황을 조장하기 위해 10월 8일 새벽, 민간인 복장을 한 민완 장교들이 주축이 돼 장사패를 끌고 건청궁에 난입했다.

이들은 광화문으로 들어와 근정전 서쪽 담장을 돌아서 건청궁으로 잠입했다. 건청궁에는 고종이 계시던 장안당과 명성황후가 사시던 곤녕합이 있었다. 폭도들은 왕비를 반인륜적으로 살해하고 시신을 건청궁 동쪽 언덕 녹산(鹿山) 자락에서 태운 뒤 재는 향원정 연못에 버리고 타다 남은 시신은 그 자리에 묻었다고 한다.

장편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김진명 작가는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당하던 상황을 상세히 기술한 이시즈카 에조의 충격적인 보고서 내용을 채널A ‘쾌도난마’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는 입에 담기도 어려운 반인륜적인 내용이었다.

일본인 자객은 40여 명에 불과했지만 궁중수비대 300여 명은 제대로 대적 한 번도 해보지 않고 모두 궁을 넘어 달아났고, 고종과 왕세자(후일 순종), 명성황후는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일제의 만행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고, 유사시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못한 '힘 없는 민족'이 겪어야 하는 설움을 단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인 건천궁(乾淸宮)의 역사를 잠시 되짚어 보자.

▲ 함광문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
▲ 함광문
▲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 의해 무참히 시해된 곤녕합(坤寧合)
▲ 곤녕합과 옥호루(玉壺樓)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鹿山)과 향원정(香遠亭) 사이에 건청궁(乾淸宮)을 건립케 하고 명성황후와 기거하였다.

안내문에 따르면, 건청궁의 건축양식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달리 양반가옥 살림집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함), 부속건물(복수당), 행각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규모는 양반가옥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었다.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으며,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할 때까지 10여 년간 이곳에서 지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경복궁의 건물들은 차례로 파괴됐다. 건청궁도 1909년 철거된 뒤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으며,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헐렸다. 문화재청은 건청궁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 전기발상지 표석
▲ 전기발상지 표석과 향원지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건청궁 앞에는 이와 관련한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명성황후가 비극적인 생애를 마친 곤녕합(坤寧合)은 명성황후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침전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인 자객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다.

곤녕(坤寧)이라는 이름은 ‘도덕경’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늘은 하나로 맑고(淸), 땅은 하나로 평안하다(寧)”라고 한 것에서 건청곤령(乾淸坤寧)이란 사자성어가 나왔고, 이를 빌려온 것이다. '임금은 맑은 하늘같아야 세상의 질서가 서고, 왕후는 지내기 편안한 땅처럼 만물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일제는 그를 시해한 후 각종 안 좋은 소문을 내었고 '명성황후' 대신에 후궁 이름에나 붙이는 '민비'를 일반화시키는 작태를 보였다. 이런 영향은 광복 후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황후를 '민비'로 낮춰부르고 표독한 며느리같은 이미지로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7년간 시의(侍醫)로서 명성황후를 모신 엘러스 벙커 여사는 명성황후에 대해 "성품이 부드럽고 친절하며 조선여성으로서의 미를 갖춘 미인"이라고 회상하였다고 한다. 또 고종 황제는 친히 쓴 ‘행록(行錄)’에서, '황후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기억력이 비상하여 어려운 책을 두어 번 읽으면 다 기억했으며, 학식이 많고 판단력이 뛰어나 자신이 외교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에 도움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적었다고 한다.

▲ 관문각터 안내판에 있는 훼철 이전의 관문각(觀文閣)
▲ 관문각터

건청궁 내 장안당 뒤쪽에는 관문각지(觀文閣址)가 있다. 고종 10년(1873년)에 걸립된 관문각 터이다. 서재인 관문각은 당초에 관문당(觀文堂)으로 불렸으나, 고종 12년(1875)에 어진을 봉안하고 관문각으로 고쳤다.

안내문에 따르면, 고종 28년(1891)에 러시아 건축가 세레친 사바틴과 친군영(親軍營 · 임오군란을 계기로 편제된 조선의 중앙군제)이 공사를 맡아 2층(일부 3층)의 서양식 건물로 개축되었다. 최초의 양관(洋館)으로 불리기도 한 이 건물은 국왕의 서재 겸 집무실인 집옥재(集玉齋)와 대조를 이뤘다.

사바틴은 러시아공사관, 덕수궁(경운궁) 정관헌(靜觀軒) 등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는 관문각에 기거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여 고발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건청궁 오른편 뒷뜰에는 '자선당(資善堂) 기단(基壇)과 주춧돌'이 있는데,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의 비극적인 경복궁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자선(資善)은 ‘어진 성품을 기린다’는 뜻으로, 자선당(資善堂)은 동궁에 있는 왕세자 및 세자비의 거처였다. 세종 9년(1427) 근정전의 동쪽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고종 25년(1888)에 중건되었다.

▲ 왕세자와 세자비의 처소였던 자선당은 일제강점기 이후 해체되어 일본인에 의해 반출돼 개인소유로 전락됐다 기단만 남은 채, 1993년에야 되돌아오는 비운을 겪었다.
▲ 자선당 기단

조선의 국권이 상실된 이후 1914년에 일본은 자선당을 철거하여 일본으로 옮겨갔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郎)는 1916년에 자선당을 일본 도쿄에 있는 자신의 자택으로 얾겨 ‘조선관(朝鮮館)’이라는 현판을 달고 사설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923년 도쿄 지역에 발생한 간토대지진으로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안내문에 따르면, 1993년 당시 문화재전문위원이었던 김정동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가 발견하여 1995년에 국내로 들여왔다. 하지만 구조 안전상의 문제로 동궁 권역인 자선당 복원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재사용되지 못하고 이 자리에 놓이게 됐다. 우리나라 근대의 비운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건청궁 앞에는 명성황후 시해라는 비극적인 역사와는 달리, 이 땅에 '새로운 빛과 원천'이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또 기원했던 두 곳이 있다.

하나는 건청궁 앞에 있는 '한국의 전기 발상지'다.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전소를 설립하여 1887년 3월 6일 건청등 전등에 점화하고 경복궁에 150개의 전등을 가설 점등함으로써 이땅에 비로소 문명의 빛을 밝힌 유서 깊은 곳이다.

또 하나는 열상진원 샘(洌上眞源泉)이다. 건청궁 앞에 있는 연못인 향원지의 북서쪽 기슭에 있는 샘이다. 이 곳은 경복궁 창건(1395년) 당시부터 있던 왕궁의 샘으로 옛날부터 물이 맑고 차서 음료수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천년 대계와 불멸성을 기원한 샘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열상진원 샘

글을 새긴 우물 뚜껑은 경복궁 중건(1868년) 때 만든 것으로,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 번 직각으로 꺾여서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들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은 향원지에 드리워진 정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미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꺾어지는 수로(水路)는 둥근 돌로 통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한다.

경복궁 북쪽 후원 영역에는 향원지(香遠池)라는 네모난 연못이 조성돼 있고, 그 가운데 정육각형 정자인 향원정(香遠亭)이 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왔다고 한다. 애련설은 연꽃을 사랑하는 주돈이의 고매한 기품을 담은 글로, 중간에 香遠益淸(향원익청)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는 뜻이다.

원래는 북쪽 건천궁으로 이어지는 다리 취향교(醉香橋)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된 후 지금처럼 남쪽으로 놓았다. 향원정은 세조 때 세운 취로정 터에 건천궁을 지으면서 조성한 것이다.

을미사변 전까지 고종은 명성황후와 함께 매일 건청궁을 나와 향원지를 거닐고, 취향교를 통해 향원정에 올라 연꽃의 향기를 맡으며 잠시나마 정사의 고단함을 잊었을 터다. 그러다가 문득 조선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도 했을 것이다.  이때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더없는 정치적 조언자요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을 것이다.   

▲ 향원지(香遠池)
▲ 향원정(香遠亭)
▲ 취향교(醉香橋)
▲ 향원지와 향원정
▲ 향원지와 향원정
▲ 향원지 옆에서 온갖 풍파를 겪어온 굴곡진 가지의 소나무가 이곳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 향원지와 향원정
▲ 향원지와 향원정
▲ 향원지와 향원정

향원정은 지금도 비운의 역사를 뒤로하고 향원지를 수놓은 연꽃과 수채화같은 최상의 조경을 완성하고 있다. 향원정은 보물 제176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자료참조= 문화재청 경복궁 가이드북, 경복궁 내 안내문, 두산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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