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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HIV감염사실 축제로 바꾼 문화게릴라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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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HIV감염사실 축제로 바꾼 문화게릴라 이정식
  • 이희승 기자
  • 승인 2014.02.27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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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자 Tip!] 작가, 인터넷 방송PD, 독립영화 감독, 공연기획자, 장애인 활동 보조인…. 하는 일 많은 이정식(28)씨는 HIV 감염인이다. 사회의 차별과 싸늘한 시선으로 인해 벼랑 끝에 선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삶이 즐겁고 행복한데 뭐가 문제냐”면서 최근 감염 사실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조만간 단편소설을 마무리하고 소설가로 데뷔한다. 이미 13분 분량의 단편영화를 완성시킨 이씨는 “나 같은 성 소수자도 이성애자와 똑같이 결혼이라는 행복을 누리고 싶다”며 속내를 털어 놓았다.

 

 

[스포츠Q 글 이희승기자ㆍ사진 이상민기자] 오는 3월 6일 개봉하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에이즈 감염으로 30일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 남자가 그에게 등돌린 세상에 맞서며 7년을 더 살았던 실화를 다룬 영화다. 효력은 있으나 수입이 금지된 약품을 구해 자신과 같은 처지의 환자들과 공유하는 내용은 깊은 감동을 안겼다. 할리우드 배우 매튜 매커너히는 20kg이 넘는 체중 감량을 한채 열연해 제71회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살기 위해 법을 어겨야 했던 남자가 있었다면, 2014년 서울 한복판에는 천형과도 같은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리고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한 남자가 있다. 지난해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 확진 판정을 받은 이정식씨. 선 고운 훈훈한 외모에 짧게 자른 머리를 왁스로 멋지게 스타일링하고, 패딩 조끼와 청바지를 매치한 모습이 꾸미기 좋아하는 딱 20대 청년이다. 17세 무렵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은 후 ‘숨기고 살아가는 삶’에 익숙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편견과 차별의 동토에서 자기만의 따뜻한 영역을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봤다.

지난달 25일 성북동의 카페 별꼴에서 ‘4+HIV감염 토크콘서트’를 성공리에 치렀다. 인디밴드 서교동미녀집단과 가수 김해원 등이 공연하고, 자신이 직접 감독한 단편영화를 상영했다. 입장권(1만5000원)의 절반은 에이즈 인권 운동 단체에 기부했다.

 

 

왜 어마무시한 질병을 '축하'하느냐고 묻자 "주어진 권리를 찾고 싶은 욕심"이라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자신을 비롯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찾아가야 한다는 의지가 확고히 내비쳤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병명이 뜨질 않고, 특별 코드로 뜨거든요. ‘큰 병원으로 가라’며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요. 의사가 환자를 거부하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싫어 차라리 드러내 놓고, 맘껏 즐기자는 생각에 콘서트를 열게 됐어요.”

그는 이미 작가이자 인터넷 라디오 PD, 감독으로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단지 동성애자이고, HIV에 감염됐다고 해서 자신의 재능과 지금까지 쌓아온 삶을 뺏길 수는 없었다. 콘서트에 붙은 숫자 ‘4’의 의미를 묻자 바이오맨 4호인 ‘옐로우’의 열혈 팬이었다며 웃는다. 소년의 얼굴이 내비쳤다.

“단편 영화요? 성매매를 하는 주인공의 사연을 담은 퀴어장르 영화예요. 저 역시 며칠이긴 하지만 업소(호스트바)에서 일한 경험이 있거든요. 성 소수자의 삶은 드러내는 사람이 많아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걸 깨달아 영화까지 찍게 됐어요. 부모님께 감염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어요. 단지 상황이 많이 안 좋아질 수 있는 희귀병에 걸린 정도까지만 말씀드렸죠. 제가 동성애자인 걸 아시니 어렴풋이 눈치를 채셨을 지는 모르지만요.”

이정식씨는 병역 거부 시위를 벌여 구속이 되고, 성 소수자로서 고단한 생활을 이어왔으나 표정은 유난히 밝았다. 면역력이 약해지면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에도 현재를 즐기려는 유쾌함이 묻어났다. 비결을 물으니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친구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친구들 숫자 만큼이나 그의 재능은 차고 넘쳤다. 평일에는 장애인들의 외출, 식사, 목욕 등을 도와주는 활동을 해 생활비를 벌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 방송을 진행한다. 또 빠듯한 시간을 쪼개 글을 쓴다. 그는 최근 신춘문예에 출품하기 위해 단편소설을 마무리했다.

"제가 읽은 책들이 자꾸 내면을 건드려요. 절로 쓰게 된 거죠. 단편소설의 내용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트렌스젠더 이야기예요. 실제 경험한 이야기기도 하고요. 예전에 친구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사고를 당해 한달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적이 있어요. 그때의 충격과 우리 사회의 비합리성을 다룬 작품이에요.”

 

 

이정식씨는 수다스러울만큼 말이 많았으나 솔직했고 진심이 묻어났다.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풀어내며 앞으로 살아갈 나날을 관조하는 태도가 빛났다. 치료에 대해 묻자 “앞으로 얼마나 살지 걱정되진 않아요. 충분히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많이 살았다고 생각하거든요”라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 인생이라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이 남자의 사랑은 얼마나 치열할까,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결혼하고 싶어요. 이성애자들이 누리는 권리를 제가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25세부터 28세에 이르는 동안 3명에게 제 마음을 당당히 고백했어요. 다들 반응이 나쁘지 않아 '아직 인기가 안 죽었구나’ 싶어요. 하하.”

[취재후기]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은 대화나 악수, 땀, 타액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 2009년 모자보건법상 낙태 허용 질환 항목에서도 에이즈는 제외됐다. HIV 바이러스는 완치는 힘들지만 관리만 잘하면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게 의학계의 평가다. 하지만 여전히 에이즈 환자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환한 미소를 잃지 않는 청년의 무거운 이야기를 듣고나니 우리 사회의 편견과 폭력이 얼마나 잔인한지 곱씹게 된다.

ilove@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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