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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일본프로야구 승부조작 '구로이키리(검은 안개) 사건'이 한국프로야구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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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일본프로야구 승부조작 '구로이키리(검은 안개) 사건'이 한국프로야구에 주는 교훈
  • 류수근 편집국장
  • 승인 2016.08.12 0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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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야구] 규정에 의거한 일벌백계는 '선영향', 포퓰리즘적 희생양 만들기는 '악영향' 미쳐

[스포츠Q(큐) 류수근 편집국장] 승부조작은 스포츠 경기에서 한쪽이 지기로 미리 약속하고 겉으로는 제대로 승부를 벌이는 척하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도 프로축구와 프로야구 등 인기 종목에서 잇따라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며 스포츠 팬들을 실망시켰다.

승부조작을 일본어로는 ‘야오초(八百長)’라고 한다. 예전에 채소가게(야오야)의 주인인 ‘초베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앞 글자를 따서 ‘야오초’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는 바둑 실력이 뛰어났지만 일부러 패해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하는 방법으로 상품을 판매했다. 여기서 ‘야오초’는 ‘승부조작’을 의미하게 됐다.

일본프로야구(NPB)의 역사에는 큰 오점으로 남아 있는 대규모 승부조작 사건이 있었다. ‘구로이키리(黒い霧, 검은 안개)’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일본프로​야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일련의 ‘야오초’ 사건을 통틀어 말한다. 단지 야구 경기와 관련된 승부조작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선수만이 아니라 오토 레이스(오토바이 경주) 승부조작에 관련된 프로야구 선수들의 처벌도 포함한다.

선수 6명이 ‘영구추방’ 당한 전례없는 ‘구로이키리(검은 안개) 사건’

▲ '구로이키리(검은 안개) 사건은 일본프로야구(NPB) 역사이 큰 오점을 남겼지만 영구처분 선수 6명을 포함한 일벌백계의 징계 조치는 그후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는데 기여했다. [사진= 스포츠Q DB]

‘구로이키리 사건’은 규모가 컸던 만큼 당시 일본 프로야구계에 미쳤던 영향도 그만큼 막대했다. 사건의 처리 과정은 규정 적용의 형평성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그후 승부조작 사건에 대한 ‘일벌백계’의 선례가 됐다.

이 일련의 소동으로 모두 선수 19명, 구단직원 1명에게 징계가 내려졌다. 이 중 7명(선수 6명, 구단직원 1명)이 ‘영구추방’ 처분을 받았고, 3명의 전·현직 선수는 이 사건을 전후해서 은퇴해 사실상의 영구추방 처분을 당했다. 또 10명의 선수에게는 출장정지와 감봉, 견책, 근신, 엄중주의 처분 등이 내려졌다.

‘구로이키리(黒い霧)’는 그대로 해석하면 ‘검은 안개’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일본에서 정재계 등에 파급되는 직권 남용이나 부정, 이권 추구 따위를 일컫는다.

‘구로이키리 사건’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처럼, 이 대규모 야오초 사건은 일본프로야구계 전체를 일순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었다. 사건의 영향은 선수들에 대한 엄벌에서 끝나지 않았다. 팬들이 등을 돌리면서 프로야구, 특히 퍼시픽리그의 인기하락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퍼시픽리그 구단이었던 니시테쓰(西鉄) 라이온즈와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즈가 매각되는 등 일본프로야구, 특히 퍼시픽리그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초래했다. 1950년 양 리그로 분리된 후 흥행몰이를 하던 퍼시픽리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급전직하, 그후 30여년 간 센트럴리그의 그늘에서 허덕여야 했다.

니시테쓰 라이온즈는 현재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이며, 도에이 플라이어즈는 니혼햄 파이터즈의 전신이다. 특히 도에이 플라이어즈는 두 명의 한국계 강타자가 활약한 팀이었다. 구로이키리 사건이 벌어질 당시 재일교포 ‘안타왕’ 장훈(선수생활 1595~1981년 중 도에이 1959~1972년)과, 한국에서 건너간 백인천(선수생활 1963~1981년 중 도에이 1963~1972년)이 타자로서 맹활약하고 있었다.

프로야구 경기 승부조작의 키맨 ‘나가이 마사유키’의 폭로 

구로이키리 사건은 1969년 10월 7일 시작됐다. 전 니시테쓰 투수 나가이 마사유키가 정규시즌 경기에서 폭력단 관계자로부터 일부러 경기에 지도록 ‘패퇴행위(敗退行爲·승부조작 행위)’를 제의받은 뒤 이를 실행에 옮긴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니시테쓰 구단은 나가이를 시즌 종료와 함께 해고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 사실은 다음날인 8일 요미우리신문과 호치신문(현 스포츠호치)에 특종 보도로 대서특필됐다. (두 신문은 같은 계열의 종합지와 스포츠신문이다)

이와 관련, 일본프로야구(NPB)의 최고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는 커미셔너위원회는 같은해 11월 28일 나가이 마사유키에게 ‘영구추방’을 의미하는 ‘영구 출장정지 처분’을 내렸다. 일본프로야구 사상 가장 강도 높은 엄벌이자 최초의 영구추방 조치였다. 당시 커미셔너위원회는 미야자와 도시요시 위원장 등 3명이 합의제로 징계를 결정했다.

▲ 전성기 시절 니시테쓰 라이온즈는 헤이와다이 야구장(후쿠오카시 쥬오구 소재)을, 도에이 플라이어즈는 고마자와 야구장(도쿄 세타가야구 소재)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사진은 일본 잡지에 소개된 두 구장의 모습. [사진= 스포츠Q DB]

나가이의 영구추방 조치와 함께 승부도박 사건은 더 큰 상처없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듬해 나가이가 폭로한 한마디는 일본프로야구 전체를 뒤흔들었고, 야오초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1970년 4월 1일, 한 일본 주간지 기자와 나가이가 독점 인터뷰를 한 녹음 테이프 내용이 유명 방송을 통해 전파를 탄 것이다.

여기서 나가이는 "패퇴행위를 한 선수들이 더 있다"고 폭탄선언을 하며, 승부조작이 의심되는 니시테쓰 소속 6명의 선수를 공표했다. 투수 3명(이케나가 마사아키, 요다 요리노부, 마스다 아키오), 포수 1명(무라카미 기미야스), 내야수 2명(후나다 가즈히데, 모토 미쓰오)이었다. 폭로 이후, 커미셔너위원회는 나가이와 이들 6명을 불러 승부조작과 관련한 진위 여부를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 나가이 마사유키는 2015년 일본의 한 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야오초 주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3경기 정도 관여했다. 한 차례는 성공했지만 두 차례는 실패했다. 실패하면 배당금을 받지 못했다. 성공하면 보수는 20만 엔이었다. 폭력단 사람과는 전혀 관계 없었고. (실제로 보수를 준 사람은) 간사이 지역의 상인이었다”고 털어놨다.

나가이는 또 이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니시테쓰 구단의 오너가 직접 나서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도피 중인 그에게 입막음 대가를 제공했고, 감독도 참고 있으라고 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밝혔다. 그는 당시 니시테쓰 구단주로부터 “힘들겠지만 팀을 생각해서 혼자 죄를 짊어져 달라. 그 대신 평생 보살펴 주겠다. 괴롭겠지만 참고 있어 달라. 어떻게든 2~3개월은 숨어 있어라”는 요청을 받았다. 니시테쓰 구단주와 구단직원으로부터 입막음 대가로 수 차례에 걸쳐 모두 550만엔을 받았다는 것이다. )      

오토 레이스에서도 들통난 일본프로야구 선수의 승부도박

‘구로이키리 사건’은 프로야구 선수와 관련된 야오초 사건이지만 프로야구 경기 승부조작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엉뚱한 곳에서 또 다른 승부조작 사건이 터진 것이다.

같은 해 4월 22일, ‘오토 레이스(일본의 오토바이 경주)’ 도중 위반 사건으로 입건된 레이서의 입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오토 레이스의 승부조작에 참여한 의혹이 있다”는 자백이 나왔다.

이튿날, 일본 수사당국은 소형자동차경쟁법 위반 혐의로 주니치 드래건스 투수 다나카 쓰토무, 전 다이요 웨일스 투수 다카야마 가오루, 전 폭력단 준(準)조직원 후지나와 히로타카를 체포했다. 다나카 투수는 니시테쓰에서 주니치로 막 이적한 상태였다. 수사당국은 5월 6일 오토 레이스의 승부조작에 참여한 혐의로 주니치의 에이스 오가와 겐타로를 추가로 체포했다.

프로야구 선수가 관련된 야오초 사건은 프로야구 경기에서 시작돼 오토바이 경주로 수사가 확대되었고, 두 종목에서 행해진 승부조작 연루 혐의자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5월 9일에는 프로야구 패퇴행위에 관여한 혐의로 다나카 미쓰구, 모리야스 도시아키 등 도에이 소속 두 투수의 이름이 공표됐다. 또 5월 14일에는 긴테쓰 버팔로스의 구단 직원인 야마자키 아키라가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사실도 보도됐다. 이어 5월 19일에는 센트럴리그의 명문팀인 한신 타이거스 내야수 가쓰라기 다카오가 오토 레이스 승부조작 연루 혐의로 체포됐다.

5월 25일, 커미셔너위원회는 나가이가 승부조작 의혹을 제기했던 니시테쓰 6명의 선수에 대해 역시 강력한 징계 처분을 결정했다.

이케나가, 요다, 마스다 3명의 투수에게는 ‘영구추방’ 조치가 내려졌다. 요다와 마스다는 ‘패퇴행위’를 인정했고, 이케나가는 승부조작 권유시 받은 100만 엔의 반환을 게을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라카미와 후나다에게는 1970년 11월 30일까지 야구 활동 전면 금지 처분이, 모토에게는 엄중주의 처분이 각각 발표됐다.

▲ 2004년 일본특파원 시절 필자가 삿포로돔 외야에서 촬영한 모습이다. 현재 삿포로돔을 홈으로 사용하고 있는 니혼햄 파이터스는 도에이 플라이어즈가 그 뿌리다. [사진= 스포츠Q DB]

야오초 연루 선수와 구단 직원에 대한 처분도 잇따라 발표됐다. 주니치 투수 오가와 겐타로와 긴테쓰 구단 직원 야마자키 아키라, 도에이의 모리야스 도시아카에게는 영구추방, 한신 가쓰라기에게는 3개월 출장정지, 도에이 투수 다나카 미쓰구에게는 엄중견책이 각각 조치됐다.

이후 7월 1일에는 긴테쓰 외야수 도이 마사히로가 도박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고, 나중에 출장정지 1개월 처분이 부과됐다.

승부조작 사건은 이들에 대한 징계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8일 야쿠르트 내야수 구와타 다케시가 오토 레이스 승부도박 혐의로 체포됐고, 출장정지 3개월을 받았다. 또 11월 30일에는 한신의 유명 투수 에나쓰 유타카가 야구도박 의혹이 있는 폭력단과 교류했다는 이유로 커미셔너위원회로부터 견책을 받았다.

야오초 관련 사건은 해를 넘겨서도 이어졌다. 1971년 1월 11일에는 난카이(南海) 호크스 투수 미우라 기요히로가 팀 동료 투수인 사토 기미히로로부터 패퇴행위를 권유받았지만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견책을 받았다.

반면, 오토 레이스 야오초 사건에 관련된 다카야마 이사오(다이요), 다나카 쓰토무(주니치), 사토 기미히로(난카이) 3명은 곧바로 은퇴를 택했다. 이때문에 이들은 커미셔너위원회로부터 징계를 받지 않았지만, ‘사실상 영구추방 조치’를 당했다.

다나카 쓰토무는 주간지에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됐다고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주니치와 자유계약 신분이 된 뒤, 그대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다카야마 이사오는 은퇴 후 2년 반이 경과한 지점에서 수사당국에 야오초 가담 사실이 밝혀져 체포됐다. 이후 충격으로 우울증이 발병했고, 1978년 수면약을 과다복용하고 젋은 나이에 자살했다.

준 폭력단원 후지나와 히로타카는 당초 프로야구 승부조작과 오토 레이스 승부도박의 주모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수사결과 폭력단과의 중개역에 불과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수사과정에서 야오초의 실체를 밝혔다는 이유로 동업자와 폭력단 두목으로부터 원한을 사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고 한다.

1972년, 지리했던 구로이기리(검은 안개) 사건의 수사가 모두 마무리됐다. 하지만 누가누가 가담했다는 의혹은 그후에도 꼬리를 물었다. 그럼에도 더이상 추가 연루자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후지나와 히로타카가 살해 위협에 처한 경위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들이 지배적이다.

이케나가는 ‘본보기’의 희생양? 혐의 비해 가혹한 ‘영구추방’에 논란 가열

나가이 마사아키의 승부조작 사건이 들통났을 때만해도 일본프로야구(NPB)의 지각판 자체를 재편할 만큼 대사건으로 번질 줄은 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긴테쓰 구단은 물론 일본야구기구도 처음에는 나가이 한 명의 영구추방 만으로 사건을 종결지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나가이의 폭로를 계기로 어쩔 수 없이 추가 조사를 진행해야 했고, 수사당국은 승부조작 혐의를 잇따라 포착해 혐의자들을 체포하면서 사건은 끝모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 커미셔너위원회가 승부조작 가담자들을 징계한 근거는 ‘야구협약 제355조(패퇴행위)’ 규정이었다. 당시 이 규정은 “① 이 협약에 참가하는 클럽의 임직원 또는 선수 및 코치를 포함한 감독이, 해당 팀 경기와 관련해 의식적으로 패하거나 패배를 시도하거나, 혹은 승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거나, 또는 승부조작을 공모한 경우, 소속 연맹 회장의 요구에 따라, 커미셔너는 영원히 그 직무를 정지시킬 수 있다. 또한 ② 승부조작 권유를 받은 경우, 그 사실을 소속 연맹 회장에게 낱낱이 보고해야 하는데 이를 태만하면, 전항에 의거해 제재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규정 그대로 적용하면, 승부조작과 관련해 권유 받은 사실을 사전에 연맹(리그) 화장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구추방’ 조치를 당할 수 있다. 그 이외의 다른 징계조치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승부조작에 직접 가담한 선수는 물론, 권유를 받은 뒤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보고하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영구추방’을 당할 수 있다’고 유추해석할 수 있다.

이 규정은 1953년 7월 25일부터 발효됐다. 하지만 나가이의 승부도박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 규정의 존재에 대해 특별히 주목한 일본프로야구 관계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선수들에게 이 규정에 관해 제대로 교육을 시킨 적도 없었다.

하지만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자 주요 언론들은 이 규정을 들어 사건 가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커미셔너위원회를 압박했다. 니시테쓰 계열의 신문이 영향력을 발휘하던 규슈 지방에서 부수 확장을 꾀하던 주요 중앙 언론의 전략도 작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처음에는 직접 승부조작 가담자에게만 ‘영구추방’이라는 엄벌을 내리려던 커미셔너위원회도 들끓는 여론에 더 큰 칼을 뽑아들 수밖에 없었다. 커미셔너위원회는 일벌백계의 본보기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규정 2항에 해당하는 선수에게 1항의 혐의자와 동일한 ‘영구추방’ 조치를 내리는 전무후무한 케이스가 나오게 된 것이다. 바로 이케나가 마사아키 선수에 대한 가혹한 처분이었다.

출장정지나 엄중한 경고 정도로 예상했던 이케나가는 영구추방 소식을 전해듣고 "나는 승부조작을 하지 않았다"고 언론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으며 억울해 했다. 커미셔너위원회가 그에게 영구추방 조치를 내리자, 일본 프로야구계는 물론 팬들도 충격을 받았다. 같은 팀 선배로부터 잠시 돈만 받아 놓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차마 거절하기는 사실상 힘들었을 것이라는 동정심에다, 승부조작을 실행했다는 어떠한 정황도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영구추방은 지나치게 가혹할 뿐아니라 징계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됐고, 이는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수많은 야구관계자들과 팬들이 그의 복권을 주장했지만 당시 커미셔너위원회는 징계를 번복하지 않았고, 당시로는 한번 내린 영구추방 처분을 되돌릴 수 있는 근거 규정 자체도 없었다. 이케나가는 그후 35년이 지난 뒤에야 복권됐다.

야구협약 개정 통해 35년 만에 일본프로야구에 복권된 '이케나가 마사유키'

▲ 일본프로야구(NPB)의 메카이자 최고 인기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도쿄돔의 야간 전경(2004년)이다. 도쿄돔 한 켠에는 일본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이 있다. 구로이키리 사건 연루자 중에는 장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만한 대기록을 남길 전도유망한 선수도 포함돼 있었다. [사진= 스포츠Q DB]

이케나가의 복권은 2005년 3월 16일 야구협약에 복권 가능 규정이 추가되면서 성사됐다. ‘영구실격처분을 받은 자라고 해도, 처분 후 15년이 경과한 자로, 그 간 지속적으로 선행을 하고, 개전의 정이 현저한 자에 대해서는 본인의 신청에 의해 커미셔너가 장래를 향해 그 처분을 해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일본프로야구 야구협약에 생긴 것이다.

당시 커미셔너위원회는 정말로 그를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을까? 이케나가 마사아키가 영구추방을 당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런 개연성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1946년 마구치현 도요우라군(현 시모노세키시) 출신의 이케나가 마사아키는 영구추방을 당할 당시 니시테쓰 라이온즈의 주축 투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영구추방 처분을 받기 전까지 프로 6년간 103승 65패 방어율 2.36을 기록했을 만큼 팀의 마운드를 이끌던 핵심 선발투수였다.

이케나가는 당시 수사당국에 “절대로 승부조작 등은 하지 않았다. 선배가 ‘맡아 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받아놓고 있었을 뿐이다”고 주장했고, 결국 법원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커미셔너위원회는 1970년 5월 25일 그를 프로야구로부터 ‘영구추방’한다는 최고의 징계를 내렸다. 징계의 배경으로 내세운 이유는 세 가지였다. 이케나가가 (승부도박용) 의뢰금을 받고 되돌려 주지 않았다는 점, 권유 받은 사실을 연맹 사무국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 1969년 시즌 종반에 짧은 이닝만에 KO당한 경기가 2게임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이 중 앞선 두 가지 이유는 부정할 여지가 없었으나 2경기 승부조작이라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반면 그와 함께 승부조작 의심을 받았던 팀메이트인 모토이 미쓰오에게는 엄중견책만이 내려졌다. 이때부터 이케나가는 “본보기를 위해 영구추방된 비운의 에이스”라고 불렸다. 커미셔너위원회로서는 세간의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이름값 있는' 선수의 희생이 필요했다고 보는 견해다.

당시 그와 함께 영구추방 처분을 당한 마스다 아키오와 요다 요리노부 조차도 “이케나가가 우리들과 동일한 처분을 받는 것은 야구계의 손실이다. 그 같은 투수는 이제 나오지 않을 것이다”며 눈물로 징계의 완화를 호소했지만, 처분은 바뀌지 않았다.

이후 니시테쓰 선배와 동기들은 그의 영구추방 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서명활동을 수차례에 걸쳐 행했고, 일본 국회 차원에서도 논의됐다. 2001년에는 요미우리의 구단주 와타나베 쓰네오가 “일본프로야구 기구는 언제까지 그를 영구추방할 건가”라며 복권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이케나가 복권운동’은 더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2005년 봄 구단주 회의에서 영구추방자의 복권에 관한 야구협약이 개정되면서 그에게 복권의 길이 열렸고, 마침내 이해 4월 25일 일본야구기구는 이케나가에 대한 영구추방 처분을 해제하고, 복권시켰다. 같은 해 11월, 이케나가는 사회인야구팀의 감독에 이어, 마스터스리그 팀인 후쿠오카 돈탁스의 감독에 취임했다.

‘구로이키리 사건’ 관련 징계 처분이 남긴 '선영향'과 '악영향'

법원이 특정 소송사건에 대하여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내린 판단을 ‘판례’라고 하다. 유사한 재판에 있어서의 선례는 아주 중요하다. 4년여 동안 진행됐던 ‘구로이키리 사건’의 처리 과정은 공(功)과 과(過)를 모두 남겼고, 이후 일본프로야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로이키리(검은 안개) 사건’의 핵심을 다시 한 번 간단히 정리하면, 실제로 승부조작 사건에 참여하고 의뢰금을 받은 나가이 마사유키를 '영구추방' 시키며 시작됐고, 승부조작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돈을 받아 두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이케나가 마사아키에게 나가이와 똑같은 '영구추방' 조치를 내리며 일단락된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커미셔너위원회가 내린 처분은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악영향을 동시에 불렀다. 과정이야 어떻든간에, 예상을 뛰어넘는 강력한 징계는 그후 일본프로야구에 ‘절대적인 판례법’처럼 작용했다. 선수들은 '승부조작 연루 = 영구추방'이라는 수식으로 인식하게 됐고, 유사한 사건을 예방하고 억제하는데 상당히 선기능으로 작용했다.

반면, 이케나가에게 적용한 무리한 처분은 징계의 형평성 논란에 불을 지피며 커미셔너위원회의 진정성에 의심을 품는 계기가 됐다. 수십년 동안 불필요한 소비적 논쟁도 야기했다. 여론을 의식한 포퓰리즘적인 징계조치가 한 선수의 선수생명을 조기에 끝내고 비극적인 삶의 나락으로 장기간 빠뜨렸기 때문이다. 일벌백계라는 취지 아래 희생양을 내세움으로써 피해 당사자의 인생을 망가뜨린 것은 물론, 두고두고 논란의 불씨를 남겨 최상위 결정기구에 대한 야구계의 불신과 권위실추를 초래한 것이다.

구로이키리 사건이 구단 운영자에게 주는 교훈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니시테쓰 구단은 선수들의 부정을 적발하고도 입막음을 하려다 사건을 더 키우고 말았다. 구단주를 비롯한 구단 상층부의 안이한 판단과 그릇된 초기 대응은,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키고 소속 구단은 물론 일본프로야구, 특히 퍼시픽리그 전체의 인기 하락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니시테쓰는 물론 도에이까지 구단 매각이라는 존망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같은 과정은, 사건이 터지면 감추려 하지 말고 초기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문제를 밝히고 잘못된 점을 숨김없이 찾아낸 뒤 정확한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면 진심으로 사죄하고 신속하게 상응한 책임을 지는 것이 오히려 사건의 악영항을 최소화하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이같은 교훈은 구단의 위기관리프로세스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최근 야구도박문제가 다시 큰 이슈로 떠올랐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가 야구도박에 관계된 사실이 2015년부터 2016년에 걸쳐 밝혀진 것이다. 조사 결과,  후쿠다 사토시, 가사하라 쇼키, 마쓰모토 류야 등 3명의 투수가 야구도박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은 일본고교야구, 일본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경기를 대상으로 야구도박을 하고 불법 카지노에도 드나들었다. 그러나 도박 이상의 야오초(승부조작)는 하지 않았으며, 다른 구단에 추가 관련자는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 관련해 요미우리 구단은 사건이 밝혀진 지 한 달여만인  2015년 11월 9일 즉각 3명과 계약 해지 방침을 밝혔다. 또 선수 감독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구단대표가 사임했다. 11월 10일 일본야구기구 커미셔너는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징계처분을 내렸다. "야오초(승부조작)는 없었지만, 많은 야구팬의 프로야구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현저하게 훼손했다는 점을 중시하고, 3선수의 유해행위가 일본프로야구계에 미치는 악영향은 한없이 헤아릴 수 없다"며 '무기실격처분'을 내렸다.

실격선수가 된 이들에 대한 징계처분은 최저 5년간은 해제될 수 없다. 이들은 일본프로야구와 선수계약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메이저리그, 한국프로야구, 대만프로야구에서도 뛸 수 없다. 일본야구기구는 지도·관리 책임을 물어 요미우리 구단에게도 1000만 엔의 제재금을 부과했다.

'구로이키리 사건'의 아픈 경험은 이번 요미우리 선수 도박사건의 처리 과정에서도 작동했다. 실제 승부조작에는 관여하지 않았더라도 야구경기와 관련한 도박만으로도 프로야구의 신뢰를 뒤흔드는 심각한 유해행위라는 점을 인식하고, 신속하게 선수들에게 책임을 묻는 등 강력한 징계조치를 취했다. 또 구단대표는 일본야구기구의 최종 징계처분이 내려지기 전에 선수 감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났다.

36년 전 일본프로야구계에서 터졌던 ‘구로이키리(검은 안개) 사건’은 최근 승부도박에 흔들리는 한국프로야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편집자주> 필자는 스포츠서울에서 체육부 기자, 야구부 차장, 연예부장을, 스포츠서울닷컴에서 편집국장을 거치면서 스포츠와 대중문화를 두루 취재했다. 특히 두 차례에 걸쳐 근무한 일본특파원 시절에는 주니치의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요미우리의 조성민 정민태 정민철, 오릭스의 구대성, 지바롯데의 이승엽 등을 전담 마크하며 한국 선수들의 성공과 좌절은 물론, 일본 야구의 겉과 속을 살펴봤다. 현재 스포츠Q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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