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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챌린저] 8년 설움 날린 '오! 해피' 오혜리, 늦었기에 아름다운 태권여제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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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챌린저] 8년 설움 날린 '오! 해피' 오혜리, 늦었기에 아름다운 태권여제 대관식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6.08.20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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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 3기' 금빛 발차기, 한국 최고령 태권도 금메달…"후회 없는 경기 펼치고 싶었다"

[스포츠Q(큐) 이세영 기자] “이제는 2인자라는 소리를 안 듣겠죠?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국제대회 문턱에서 8년 동안 좌절했던 오혜리(28‧춘천시청)가 활짝 웃었다. 두 번의 좌절끝에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데뷔한 올림피아드에서 포디엄 맨 위에 오르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훌훌 털어냈다.

세계랭킹 6위 오혜리는 20일(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아레나3에서 벌어진 2016 리우 올림픽 태권도 여자 67㎏급 결승전서 세계랭킹 1위 하비 니아레(프랑스)를 13-12로 꺾고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이로써 이번 대회에 출전한 한국 여자 태권도대표 둘은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오혜리에 앞서 김소희가 이틀 전 49㎏급에서 먼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오혜리가 금빛 발차기를 펼치면서 한국은 태권도가 처음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2000년 시드니 대회부터 여자 67㎏급에서 5회 연속 메달(금 4, 동 1)을 이어가는 쾌거를 올렸다.

28세 11개월. 한국 태권도 올림픽 최고령 금메달리스트로 뒤늦게 도전한 보람을 확인했다. 종전 최고령 금메달은 2004년 문대성이 80㎏이상급에서 따낸 것이었다.

첫 경기부터 장기인 머리 공격을 시원시원하게 펼친 오혜리는 결승에서도 화려한 회전 뒤차기에 이어 두 차례 연속 머리 공격을 작렬,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경기 후 플래시 인터뷰에서 오혜리는 “상대가 세계랭킹 1위인데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보였다. 결승에서 나에게 운이 많이 따라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 국내용 시선-2인자 꼬리표 지운 '태권여제'

리우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까지 오혜리는 지독한 ‘국제대회 징크스’에 시달리며 절치부심해왔다.

국내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상급 기량을 펼쳤다. 강릉 관동중학교 2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한 오혜리는 강원체고 진학 후 여고부에서 적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또래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고교 졸업반이던 2006년 전국체전 여고부 웰터급에서 은메달을 따냈고 2008년 전국체전 여대부 미들급 동메달, 2009년 전국체전 여대부 미들급 은메달을 거쳐 대학 졸업반이던 2010년 전국체전 여대부 미들급 73㎏급 금메달을 획득했다.

실업팀 서울시청에 입단한 이후에도 2011, 2012년 전국체전 73㎏급 2연패를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혜리는 유독 국제대회와 인연이 없었다.

우선 2번의 올림픽 도전에서 실패를 맛봤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대표 최종선발전까지 나갔지만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던 황경선에게 밀렸다. 2008, 2012년 2연패를 달성한 황경선의 훈련 파트너로 조연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4년 뒤 런던 올림픽대표 선발전에선 대회 2주 전에 왼쪽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바람에 제대로 경기도 해보지 못하고 역시 탈락했다.

오혜리는 리우 출정 전 스포츠Q와 인터뷰에서 "대표선수가 되면 언제라도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다보니 세계선수권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고 메달 따는 것도 더 어려웠다"며 회상한 뒤 "점점 올림픽은 '하늘이 점지해준 사람만 나가는 거구나'하는 생각만 들면서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애써 위로했다"고 털어놓았다.

시련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2013년 초 오른쪽 발목 인대가 끊어졌고 오랜 부상 후유증으로 인천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도 떨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오혜리는 2014년 고향팀인 춘천시청에 새 둥지를 틀고 새 출발하면서 늦깎이로 기량을 꽃피웠다. 지난해 첼랴빈스크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했다. 2011년 경주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에 그친 한을 풀면서 '2전 3기' 올림픽 도전에 자신감을 붙였다.

‘국내용이다’, ‘2인자다’라는 말이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지만 올림픽 랭킹에 의해 리우 대회 출전권을 따낸 오혜리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금 도복 띠를 졸라맸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리우에서 세계 최고가 됐다.

◆ 후회 없이 누빈 첫 올림픽, '쇼맨십도 금메달'

처음으로 출전한 올림픽. 성적도 중요했지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열심히 뛰고 싶었다.

오혜리는 “원래 내 스타일이 공격적이기도 하지만, 후회 없는 경기를 펼치고 싶었다. 소극적으로 경기하면 나에게 득이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매 경기마다 우렁찬 기합소리를 내며 상대의 기를 꺾었다. 동시에 팬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화려한 공격에 기합소리까지 더해지니 팬들 입장에선 몰입도 만점이었다.

오혜리는 올림픽 4경기를 치르는 동안 무려 49점을 뽑으며 공격적인 태권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그는 “아직 다 끝나지 않은 것 같다. 한 경기 남은 것 같다”는 말로 흥분된 감정을 표현했다.

금메달 세리머니도 일품이었다.

결승전이 끝난 뒤 태극기 세리머니를 펼친 오혜리는 안내요원에게 다가가 ‘KOREA’가 적힌 팻말을 들고 박계희 감독과 함께 옥타곤 매트를 돌았다. 금메달리스트의 당당한 행진은 승리를 염원한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오혜리는 “앞서 세계선수권대회 때 세리머니를 제대로 못 했다”며 “기회가 되면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에 하게 됐다. 작은 나라인 한국을 알리고 싶어 팻말을 들었고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지긋지긋한 국제대회 악몽을 씻어내고 일생일대의 미션을 이뤘다. 미리 생각해뒀던 금메달 세리머니를 원 없이 펼친 오혜리에게 리우 올림픽은 오랜 꿈이 실현된 장이었다. '오! 해피' 시련을 이겨낸 오혜리의 화려한 대관식에 어울리는 감탄사다.

■ 오혜리 프로필

△ 생년월일 = 1988년 4월 30일
△ 소속팀 = 춘천시청
△ 출신학교 = 관동중-강원체고-한국체대
△ 주요경력
- 2009년 유니버시아드 대표
- 2010년 아시아선수권 대표
- 2011년 경주 세계선수권 대표
- 2015년 첼랴빈스크 세계선수권 대표
- 2016년 리우 올림픽 대표
△ 수상경력
- 2006년 전국체전 여고부 웰터급 은메달
- 2008년 전국체전 여일반부 미들급 동메달
- 2009년 전국체전 여일반부 미들급 은메달
- 2009년 베오그라드 유니버시아드 72kg급 은메달
- 2010년 전국체전 여대부 73kg급 금메달
- 2010년 아스타나 아시아선수권 73kg급 금메달
- 2011년 전국체전 여일반부 73kg급 금메달
- 2011년 경주 세계선수권 73kg급 은메달
- 2012년 전국체전 여일반부 73kg급 금메달
- 2013년 전국체전 여일반부 73kg급 은메달
- 2014년 라스베이거스 US오픈 67kg급 금메달
- 2014년 카스텔론 스페인 오픈 67kg급 동메달
- 2014년 인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오픈 67kg급 금메달
- 2014년 로잔 스위스 오픈 67kg급 동메달
- 2015년 춘천 한국오픈 73kg급 금메달
- 2015년 첼랴빈스크 세계선수권 73kg급 금메달
- 2015년 멜버른 호주 오픈 67kg급 동메달
- 2015년 모스크바 그랑프리 67kg급 금메달
- 2015년 맨체스터 그랑프리 67kg급 동메달
- 2015년 알마티 카자흐스탄 오픈 67kg급 금메달
- 2016년 리우 올림픽 67㎏급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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