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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덕수궁 함녕전 준명전 · 창덕궁 낙선재 수강재 '덕혜옹주의 행복한 기억이 머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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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덕수궁 함녕전 준명전 · 창덕궁 낙선재 수강재 '덕혜옹주의 행복한 기억이 머무는 곳'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6.09.06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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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와 문화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조선왕조의 역사와 5대 궁궐의 역사는 떼레야 뗄 수 없다. 궁궐은 그 시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라는 점에서 당시 최고의 건축기술과 예술적 혼을 쏟아붓기 마련이다. 그래서 궁궐에는 왕조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 덕수궁(德壽宮)의 함녕전(咸寧殿)의 표지석이다. 함녕전이 보물 제820호로 지정돼 있음을 알리고 있다. 고종 황제가 침전으로 사용했던 함녕전은 덕혜옹주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1395년(태조 4) 경복궁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5대 궁궐의 역사는 조선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정궁’과 ‘이궁’의 지위가 바뀐 것은 물론,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전란과 국란을 겪으며 소실되거나 뜯기고 헐리기도 하고 과거의 영광을 찾아 복원되기도 했다.

궁궐은 그곳을 주무대로 살았던 인물들의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5대 궁궐에는 조선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희로애락이 곳곳에 배어 있다. 특히 궁궐에서 출생해 역사의 한복판에 섰던 왕족들의 삶은 한 개인사를 넘어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 흐름과 맞닿아 있다.

궁궐에서 왕조의 화려함과 위엄, 영광의 역사를 누린 인물이 있었는가 하면, 좌절과 고독, 비애와 비운의 역사를 경험해야 한 인물들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권상실을 겪어야 했던 일제강점기는 5대 궁궐에게 최대의 수난기였고, 구중심처에서 귀하게 성장하고 생활해야 했던 조선왕조의 후손들에게는 치욕과 몰락의 시기였다. 요즘 스크린 속에서 만나는 ‘덕혜옹주’의 삶은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 덕수궁은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된 뒤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새로운 정문으로 삼았다.
▲ 대한문 밖에서 바라본 덕수궁 입구.
▲ 대한문을 들어서면 맨 먼저 금천교(오른쪽)를 만난다. 금천교 왼쪽 옆 관람객이 걸어가는 곳에 '하마비'가 보인다.
▲ 대한문을 들어서면 금천교 직전 왼쪽 한켠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쓰여진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대소인원 모두 말에서 내려라"는 뜻처럼 여기서부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위엄을 담은 비석이다. 조선시대 종묘와 궐문 앞에 세웠고, 왕이나 장군, 고관,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 존경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덕수궁 하마비는 본래 문 밖에 있었으나 개발 과정에서 궁궐이 뒤로 밀려나면서 안에 들어온 모양새가 됐다고 한다. 덕수궁의 위상 변화처럼 느껴져 씁쓸한 느낌이 든다.
▲ 덕수궁 입구. 대한문과 금천교를 건너서 중화문을 향해 가는 길이다.
▲ 덕수궁 입구. 전면에 보이는 게 대한문이다.

덕혜옹주처럼 국가의 존망이 비극적인 개인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조선 왕족의 불운한 일대기도 없을 것이다. 그는 고귀한 핏줄로 태어났으나 정략 결혼으로 일본 대마도의 백작 부인이 돼야 했고, 밀려오는 공포감과 트라우마에 인생의 절반 이상을 정신분열증 환자로 살아야 했다.

또 평민의 신분이 된 광복된 이후에는 조국과 일본 양측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가 뒤늦게 귀국을 허락받고 돌아온 조국에서는 희미한 의식의 끝을 부여잡고 궁궐의 한 켠에서 힘겨운 생을 보내야 했다.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 중에 불행한 공주와 옹주의 삶은 많았다. 하지만 덕혜옹주가 소설과 뮤지컬, 영화 등 많은 예술작품들의 소재가 돼 왔고 뉴스의 초점이 되어 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의 삶이 비극적이었고 드라마틱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 중화전(中和殿) 일원 안내도
▲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 1902년에 임시 정전으로 쓰던 즉조당(卽祚堂) 남쪽에 행간을 두르고 중화전을 중심 건물로 건축했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대화재로 이 일대가 모두 불타 버린 후, 1906년에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재건하였다. 보물 제819호.
 
▲ 중화문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중화전.
▲ 뒤에서 본 중화전 일원. 왼쪽에 보이는 이층 전각은 석어당(昔御堂)이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했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임시로 정치를 행했던 곳이다. 1904년 화재로 불탄 뒤 같은 해 다시 지은 것이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이었고 어머니는 궁궐 소주방 나인 출신의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楊氏)였다.

겉보기 신분은 화려했지만 내용은 허울 뿐인 왕가였다. 일제는 5년 전인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회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 잡아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에게 양위시켰다.

또 1910년 8월에는 일제의 강제병탄조약으로 국권마저 상실한 경술국치를 겪어야 했다. 그후 519년 역사의 찬란했던 조선왕조는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에 따라 '왕공족(王公族)'의 신분이 돼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며, 일본 천황가의 하부 단위로 편입됐다.

▲ 함녕전(咸寧殿)과 덕홍전(德弘殿) 안내도.
▲ 정면에서 바라 본 함녕전과 덕홍전 외부 모습. 대문을 지나 가운데 큰 기와집이 함녕전이고 왼쪽에 보이는 지붕이 덕홍전이다.
▲ 왼쪽 측면에서 바라 본 함녕전과 덕홍전 모습. 왼쪽 뒷편 건물이 덕홍전이고 뒷편 오른쪽에 지붕만 보이는 곳이 함녕전이다. 함녕전 지붕 위로 저멀리 서울시청 지붕이 보인다.
▲ 함녕전(咸寧殿). 고종황제가 침전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고종은 고명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왕가의 전통을 깨면서까지 곁에 두고 함께 생활하며 아낌없는 사랑을 표현했다.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에 다시 지었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였고, 사방 툇간에 방을 두른 전형적인 침전 건물이다. 고종은 1919년에 이곳에서 승하했다.
 
▲ 함녕전 내부 모습. 이곳에서 고종은 어린 덕혜옹주의 성장을 보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줄기 빛을 보았을 터다.
▲ 함녕전 옆에 있는 덕홍전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접견하던 곳으로, 1911년에 건립한 전통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내부는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등 서양풍으로 장식했다.
▲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咸寧殿)의 정문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1938년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 · 현 덕수궁미술관)이 개관하면서 현재는 덕수궁 서남쪽으로 이전되었다.
▲ 광명문 내부에는 자동 시보 장치가 있는 창경궁 자격루(自擊漏·국보 제229호)와 1462년에 제작된 정릉동 흥천사명동종(興天寺銘銅鐘·보물 제1460호)과 화약을 이용하여 100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인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등을 전시하고 있다.
▲ 창경궁 자격루(自擊漏)의 국보 표지석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고종은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으로 봉작되며 사실상 거주지가 덕수궁 안에 한정됐고, 고종의 아들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가 된 순종은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을 떠나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으로 격하당하고 창덕궁 대조전에서 조용히 지내야 했다.

고종과 순종에게 더 이상 세상을 호령할 권세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이왕가의 왕족들은 ‘일본천황-궁내성-이왕직’으로 내려오는 일제 행정조직의 관리·통제하에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이왕직(李王職)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와 관련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로, 조선총독부가 아닌 이본 국내성(宮內省)에 소속돼 있었다.

고종은 궁궐에 침입한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부인인 명성황후의 처참한 최후(1895년 을미사변)를 지켜봐야 했고, 강제적인 양위와 국권 상실을 경험해야 했다. 거기에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은 일제의 총칼 아래 감시를 당했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던 고종에게 ‘덕혜옹주’의 탄생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솟아난 한줄기 빛이었을 터다.

▲ 정관헌(靜觀軒) 안내도
▲ 덕홍전 뒷편에서 바라본 정관헌(靜觀軒). 정관헌은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휴식용 건물로 '정관(조용히 바라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조용히 궁궐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 I. Sabatin)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고종은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 정관헌 내부. 고종은 이곳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때로는 쓰디쓴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때로는 덕혜옹주도 그 옆에 있지 않았을까?
▲ 정관헌에서 내려다 본 함녕전(왼쪽 건물)과 덕홍전(오른쪽 건물).

환갑에 얻은 늦둥이 고명딸. 지금으로 말하면 ‘딸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삼칠일(아이가 태어난 후 스무하루 동안. 또는 스무하루가 되는 날. 일반인은 대개 이날 금줄을 거뒀다)도 깨고 7일 만에 복녕당을 찾아 예쁜 딸을 봤고, 21일 째에도 방문했다.

게다가 곧이어 종친을 불러 잔치도 열었고, 7월 13일에는 자신의 거처인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으로 데려와 곁에 두고 고명딸의 재주를 보며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또 1916년 4월 1일에는 침전인 함녕전에서 150여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준명당(浚眀堂)에 유치원을 개설하고 딸이 외로울까 봐 귀족의 또래 딸들을 함께 입학시켰다.

함녕전에서 준명전까지는 가까운 길이었지만 가마를 태워 보낼 정도로 막내딸에 대한 사랑은 극진했다. 덕혜옹주에게는 77년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지만 그같은 기간은 너무 짧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 즉조당(卽祚堂) 일원 안내도.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昔御堂)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건물이다. 준명당(浚眀堂)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은 준명당에 유치원을 개설해 덕혜옹주를 다니게 했다.
▲ 중화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석어당(오른쪽), 즉조당(가운데), 준명당(왼쪽).
▲ 준명당
▲ 준명당 내부 모습.
▲ 즉조당
▲ 측면에서 바라본 즉조당(오른쪽)과 준명당. 준명당 옆으로 석조전이 약간 보인다.
▲ 석어당
▲ 석조전(石造殿) 일원 안내도. 덕수궁미술관과 석조전이 보인다.
▲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서양식 석조건물로, 영국인 건축가 하딩(G. R. Harding)이 설계하여 1910년에 완공하였다.
▲ 덕수궁미술관. 현재 정식 명칭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다. 이 건물은 석조전 서관으로 불리기도 하며, 1938년 이왕가미술관으로 완공됐다.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하였다.
▲ 함녕전·덕홍전 행각 앞에서 바라본 중화전(왼쪽) 뒤편. 멀리 석조전이 보이고 그 오른편으로 준명당, 즉조당, 석어당 일원이 보인다. 함녕전에서 준명당까지는 150여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에도 덕혜옹주는 왕공족의 족보에 올리지 못했다. 조선 왕조 후예가 늘어나는 것을 꺼려하던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의 탄생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덕혜옹주의 모친인 귀인 양씨가 궁인 출신이라는 사실도 부정적인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1917년 6월에야 비로소 ‘복녕당 아기씨’라는 이름을 버리고 왕공족의 신분을 얻으며 ‘덕혜’ 옹주가 되었다.

고종이 고명딸을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 자존심을 꺾고 테라우치 총독을 불러 덕혜옹주를 소개시킴으로써 왕족에 올리는데는 성공했지만, 이 일은 결과적으로는 덕혜옹주의 운명을 뒤바꿔 놓는 최대의 악수가 되어 버렸다. ‘덕혜’라는 호는 1921년 5월에야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昌德宮)의 정문이다. '돈화(敦化)'는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광해 원년)에 중수했다. 보물 제 383호.
▲ 창덕궁(昌德宮) 안내도. 창덕궁 관람은 전각관람(적색 라인)외에 별도의 후원관람이 가능하다. 창덕궁은 아름답고 넓은 후원 때문에 다른 궁궐보다 왕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8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다. 나무는 높이 15~16m, 가슴높이 줄기둘레 2~3m,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천연기념물 제427호.
▲ 창덕궁 금천교(昌德宮 錦川橋).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 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간다.
▲ 창덕궁의 명당수(明堂水), 즉 금천(禁川).
▲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일원 안내도.
▲ 일종의 중대문인 진선문(進善門)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진선문에서 인정문(왼편 가운데)을 지나 마주 보이는 문은 숙장문(肅章門)이다. 진선문에는 신문고(申聞鼓)가 설치돼 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 1609년에 재건된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신하들의 조회, 외국 사신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인정'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앞쪽으로 어도와 품계석을 둔 조정 마당을 마련해 국가적인 상징 공간을 이루고,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두어 뒷산인 매봉의 맥을 잇고 있다. 국보 제225호다.
 

고종은 강제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의 정략 결혼을 우려해 덕혜옹주와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의 약혼을 은밀히 추진했다. 하지만 일제의 철통 감시와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돌연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다.

의민황태자(영친왕) 이은은 만 10살의 나이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야 했다. 덕혜옹주에게는 이같은 사실상의 볼모 신세를 겪지 않게 하려던 고종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런 고종의 승하는 덕혜옹주의 운명을 다시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빠트렸다. 고종의 죽음을 놓고 일제의 독살설이 나돌았고, 이는 조선 백성의 울분을 불러일으키며 나라 잃은 설움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큰 계기가 되었다.

▲ 선정전(宣政殿) 일원 안내도.
▲ 청기와 지붕인 선정전(宣政殿)은 궁궐의 편전(便殿·사무공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 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렸다. 선정전은 한때 신주를 모시던 혼전(魂殿)으로 쓰였다. 조선 중기에는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곳이기도 하다.
▲ 동궐마루.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빈청 건물이 위치한 자리로, 빈청의 원래 명칭은 비궁청(匪躬廳)이었다. 조선시대 고위 관료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거나, 국가의 긴급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관계자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순종황제 때 황제의 자동차를 보관하던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어차고(御車庫)로 불리게 되었다.
▲ 대조전(大造殿) 일원 안내도. 대조전 우측에 자리한 원래의 흥복헌(興福軒)은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돼 공식적으로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일주일 전인 8월 22일 오후 1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비운의 장소다. 당시 어전회의에서는 한일병합조약의 최종 승인과 이의 실행을 내각에 위임하는 결정을 단 1시간 만에 내렸다. 당시 병풍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순종의 왕비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했지만 실패로 끝나자 통곡했다는 비화가 전해진다.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이곳에서 운명했다.
 

▲ 대조전(大造殿)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세상을 떠났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건설됐으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해 다시 지었다. 아래 사진은 대조전과 연결된 흥복헌(興福軒)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 희정당(熙政堂) 일원 안내도.
▲ 희정당(熙政堂)은 원래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으나 연산군대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좁은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편전으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의 화재를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전면에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바로크풍의 가구를 갖추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 인정전(왼쪽 건물)과 희정당(오른쪽 건물).
▲ 성정각(誠正閣) 일원 안내도. 현재 후원으로 가는 넓은 길에 큰 건물인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다. 이 일대는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었다.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때 주로 기거하면서 정궁으로 쓰던 곳이기도 했다. 성정각(誠正閣)은 세자의 공부방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왕가의 내의원으로 쓰였으며, 단층의 몸채에 중층의 날개채가 직각으로 붙은 독특한 모습이다. 육각누각인 삼삼와(三三窩), 그 옆의 칠분서(七分序), 승화루(承華樓)는 복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 희정당(가운데 건물)과 성정각 일부(오른쪽 건물).
▲ 희정당(가운데 건물)과 성정각(오른쪽 건물).

고종의 승하 소식은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고종이 불면 날아갈까 아끼었던 덕혜옹주에 대한 식민지 조선 백성의 기대감과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일제와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에 대한 반응을 경계하게 됐고, 결국은 1925년 3월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일본에 건너간 덕혜옹주는 여자 가쿠슈인(학습원)에 입학한다.

덕혜옹주는 타국땅 일본에서 두 차례의 비보를 더 전해들어야 했다.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 거처하던 순종이 승하했고, 1929년 5월 30일에는 유방암으로 생모인 복녕당 귀인 양씨가 세상을 떠났다. 옹주는 순종과 생모의 사망 소식에 잠시 귀국했지만 또다시 망국의 한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덕혜옹주는 순종의 장례식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고, 생모의 신분이 천했다는 이유로 상복도 제대로 입지 못했다. 모두 덕혜옹주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과열 반응을 염려한 일제에 의한 술책이었다.

▲ 승화루(承華樓) 일원과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으로 가는 입구.
▲ 창덕궁 후원 입구와 후원 매표소.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었던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다.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존덕지 같은 연못을 만들고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등 아담한 규모의 정자들을 세워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하였다.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둔 사대부 집처럼 지었으며,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을 입히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후원의 정취를 더한다.
▲ 후원 입구로 가는 길 옆의 누정 앞에서 예쁘게 한복을 차려 입은 관람객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아버지의 독살설과 강제 유학, 순종과 생모의 사망 등 일련의 사건들은 덕혜옹주의 심신을 극도로 피폐시켰다. 일본에는 영친왕 이은 부부(일본 왕족 출신의 이방자 여사와 1920년 정략결혼)가 있었지만 옹주의 허망한 심신을 온전히 달래줄 수는 없었다.

일본 여자학습원 동창생 증언록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매일 보온병을 들고 학교에 다녔다. 그 이유를 묻자 독살당하지 않으려고 보온병의 물만 마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방에 둘러싸인 적의 감시 속에 살아야 하는 옹주의 심리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결국 덕혜옹주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조발성치매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요즘 병명으로는 ‘조현병’에 해당하는 증상으로 피해망상, 환청 등의 증상에 시달렸다.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백작 출신의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했고, 1932년 외동딸 마사에(정혜)를 출산했다. 하지만 조발성치매증은 이후에도 호전되지 않고 악화일로를 걸었다. 버티다 못한 다케유키는 1946년 덕혜옹주를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1947년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부부는 일제의 패망 이후 왕족과 백작의 특권을 모두 잃었고,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이혼한다.

▲ 창덕궁 후원 입구로 가는 삼거리 길목에 세워진 이정표. 오른쪽 방향으로 낙선재를 안내하고 있다.

덕혜옹주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외동딸 마사에는 성장해 가면서 ‘조선인’인 어머니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1955년 대학 때 사귄 스즈키와 결혼해 잘 사는 듯했으나, 1957년 유서를 남기고 거대한 봉우리가 있는 일본의 미나미(南)알프스에 들어가 실종됐다. 태풍이 오던 날이었고, 소 다케유키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행방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꿈에 그리던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덕혜옹주가 당장 돌아올 곳은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고종이 비밀리에 약혼을 추진했던 김장한의 형인 신문기자 김을한이 덕혜옹주의 행적을 수소문해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를 귀국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흔적을 지우려던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꺼려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미국 방문 길에 도쿄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방자 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사됐다.

▲ 낙선재(樂善齋) 일원.
▲ 낙선재 일원 전경. 조선 제24대왕 헌종(재위 1834~1849)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순화궁 김씨)으로 맞이하여 중희당 동쪽에 낙선재((樂善齋),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등을 지었다.
▲ 낙선재 일원 전경.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신 곳이었다. 헌종의 뜻에 따라 낙선재는 일반 사대부 건축물처럼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외형을 지녔다. 낙선재 창살무늬와 상량정(上凉亭)의 건축 양식 등에서 청나라 양식을 볼 수 있다. 낙선재는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석복헌과 수강재는 상당 부분이 변형되어 있다.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에야 힘겹게 귀국길에 올랐다. 일제에 의해 강제 유학길에 오른지 38년, 정신병원에서 지낸지 15년 가까이 돼서야 대한민국으로 바뀐 조국에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김포공항에는 72세의 유모 변복동 등이 마중했다.

덕혜옹주는 이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하였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간간이 정신을 찾았지만 끝내 온전한 심신을 찾지 못했다.

▲ 낙선재(樂善齋)는 남행각에 나있는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로 자리 잡고 그 좌측에 서행각이 남행각과 직교로 연접해 있다.
▲ 낙선재는 헌종 13년(1847)에 왕이 왕비와 대왕대비를 위해 마련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고 그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조선왕실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거처한 공간인 것이다.
 
▲ 낙선재 실내 모습. 이 건물에는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다양한 문양의 창호들이 설치되어 있다.
▲ 낙선재 실내 모습
▲ 옆에서 본 낙선재. 맨 좌측에 앞으로 돌출한 1칸이 기둥같은 초석 위에 놓여 누마루가 되면서 시선을 끈다.
▲ 낙선재 뒤뜰. 굴뚝과 수석, 화초들이 정원의 풍취를 전해준다.
▲ 낙선재 뒤뜰. 건물 뒤에는 쪽마루가 길게 깔려 있어 공간 간 이동이 편리하도록 설계돼 있다.
▲ 낙선재 옆에서 바라 본 상량정(上凉亭).
▲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는 이어져 있다. 오른쪽 문은 낙선재 뜰에서 석복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낙선재 수강재에서 기거하던 덕혜옹주는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에는 딸의 이름과 아리랑을 불렀으며, 낙서처럼 한글로 소망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정신은 혼미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일제에 의한 독살의 위험이나 어떤 감시와 통제도 받지 않는 진정한 해방이었기에, 덕혜옹주에게는 아마도 고종의 품에서 철없이 놀았던 어린 시절 이후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이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삐뚤빼뚤 쓴 글이었지만,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조국과 가족에 대한 정과 사랑을 잊지 못했던 덕혜옹주의 영혼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 석복헌(錫福軒)은 후손을 잊기 위해 맞아들인 후궁 경빈 김씨(慶嬪金氏)를 위해 헌종이 마련해 준 처소였다.
▲ 석복헌(錫福軒). 1966년 3월 3일,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가 세상을 떠났다.
▲ 수강재(壽康齋). 정조 9년(1785)에 지었으며,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壽康宮) 자리에 세워져 이렇게 이름 붙였다.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했던 효명세자(익종)의 별당이었고, 헌종 14년(1848)에 헌종의 조모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했다.
▲ 수강재(壽康齋)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77세의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덕혜옹주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 수강재(壽康齋). 정조 9년(1785)에 지었으며,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壽康宮) 자리에 세워져 이렇게 이름 붙였다.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했던 효명세자(익종)의 별당이었고, 헌종 14년(1848)에 헌종의 조모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했다.
▲ 수강재(壽康齋) 옆 뜰. 생전의 덕혜옹주는 저 푸른 나무를 매일 지켜봤을 터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후 그의 가까운 왕족들도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났다. 1963년 혼수상태인 채 영구귀국해 병상에서 생활하던 영친왕 이은은 1970년 5월 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순종 왕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는 1966년 3월 3일 창덕궁 낙선재 석복헌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3년 가족과 함께 입국한 일본 황족 출신인 영친왕비(의민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시누이인 덕혜옹주를 보살피며 사회봉사 활동을 하며 살다가 덕혜옹주가 떠난 아흘 뒤인 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출처= 덕수궁과 창덕궁과 관련된 내용은 안내판과 팸플릿을 기본으로 하되, 부족한 내용은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를 중심으로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피디아 등의 자료도 참고했습니다. 덕혜옹주와 관련된 이야기는 '덕혜옹주'(한국역사논술연구회), KBS 1TV 교양 역사 토크쇼 '역사저널 그날'의 '왕의 딸, 격랑 속에서 3편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편 등의 내용을 참조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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