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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9) 문성길, 짧고 굵었던 '돌주먹의 추억' 그리고 길어진 '복싱 경계인'문성길복싱체육관, 철판볶음밥집 운영…프로에서 두 체급 석권하고도 파이트머니 문제로 은퇴 뒤 걸어온 길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6.09.19 10:59 | 최종수정 2016.09.29 10: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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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자 Tips!] 지금은 세계 챔피언이 단 한 명도 없는 한국 복싱이지만 1970, 1980년대 경량급의 장정구, 유명우, 김광선 등 월드챔피언을 중심으로 세계를 주름잡았다. 그런데 팬들의 뇌리에는 "경량급은 KO가 잘 나오지 않아 재미가 없다"는 선입견이 있다. 실제로도 KO로 화끈하게 승패가 가려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착실하게 점수를 뽑아내며 판정으로 이기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68%라는 무시무시한 KO승률로 세계를 평정했던 경량급 복서가 한국에도 분명 있었다. 탄탄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펀치와 저돌적인 경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돌주먹' 문성길(53)을 모르는 복싱 팬은 거의 없지 않을까.

[스포츠Q(큐) 글 박상현·사진 이상민 기자] 얼마 전 젝스키스가 복귀 콘서트를 열어 큰 성황을 이뤘다. 젝스키스가 해체 16년이 지나 재결성됐는데도 '노랭이'라고 불리는 팬들을 몰고 다닐 수 있는 비결이 궁금하다.

▲ 문성길은 60kg도 안되는 체중의 경량급 복서지만 60%가 넘는 무시무시한 KO승률로 세계의 링을 평정했다. 지금은 복싱에서 멀어져 있지만 그 누구보다 링에서 자신의 청춘을 불태웠다.

데뷔부터 해체 직전까지 불과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너무나 강력한 임팩트를 던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해체가 아쉬웠고 지금 복귀를 그렇게 열렬히 반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맞다면 문성길은 바로 젝스키스와 같은 존재의 복서가 아닐까. 복싱 입문 4년 만에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세계선수권에서 정상에 오르며 아마추어 시절 빛나는 기록을 남겼다. 또 프로에서는 무시무시한 '돌주먹'을 날리며 두 체급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무엇보다도 문성길은 저돌적이었고 화끈했다. 너무나 저돌적이어서 상대의 머리에 부딪히는 헤드버트가 일어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대의 펀치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탱크같은 문성길의 경기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팬들이 적지 않았다.

또 짧고 굵었다. 복싱에 데뷔해 은퇴할 때까지 기간이 15년이었다. 이 가운데 프로에서 6년밖에 뛰지 못했으니 좀더 롱런해주길 바라는 팬들이 많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링을 떠난지 23년. 혈기왕성했던 청년 문성길은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아재'가 됐다.

▲ 1980년대와 1990년대 아마와 프로 복싱을 휩쓸었던 문성길은 저돌적인 플레이와 돌주먹을 앞세워 세계 경량급을 평정했다. 그의 플레이에 매료된 뮤지션이 '선길문'이라는 그룹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 파란만장 복싱인생, 청춘을 모두 쏟아부었다

"돌아보니 정말 파란만장하네. 내 청춘을 모두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문성길은 지난 복싱인생을 되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복싱에 입문한 것은 1978년이었다. 전남체육고등학교 육상부에 들어가려다가 입학이 좌절됐다. 1년 동안 성남에 있는 한 가구공장에서 일한 뒤 목포 덕인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문성길은 이때부터 복싱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종목을 바꿨다. 고교생으로 각종 신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쉽게 한국체대에 가지 못하고 목포대(체육학과)를 들어갔어요. 하지만 목포대에도 전칠성(1984년 LA 올림픽 라이트급 동메달리스트) 등 쟁쟁한 선수가 많아서 전국대회를 제패하곤 했죠. 1980년대 초에 목포대도 강호에 속했어요."

목포대 1학년이었던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문성길은 밴텀급에서 당당하게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8강에서 상대의 헤드버트에 눈가가 찢어지면서 아쉽게 메달 획득에 실패했지만 1986년 미국 리노에서 열렸던 세계아마추어복싱선수권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밴텀급 금메달을 따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 2연패를 달성했다.

"주위에서 호불호가 엇갈리긴 하지만 내가 복싱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이었던 김승연 한화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1984년 LA 올림픽에서 메달을 자신했었는데 따내지 못하면서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고 우울해지기도 했죠. 그때 옆에서 다독였던 분이 바로 김승연 회장이에요. 격려를 받고 1986년에 재기할 수 있었던 거죠."

▲ 문성길은 1982년과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2연패를 차지하며 한국 경량급의 스타가 됐다. 그러나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상대 선스의 헤드버트에 아쉽게 졌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이전에 프로로 전향하면서 올림픽 정상에 서진 못했다. 사진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당시 북한 편성호와 경기를 하고 있는 문성길.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서울 아시안게임까지 제패했으니 내심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한 욕심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행을 선언했다. 1986년 12월의 일이었다.

"서울 올림픽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까지 제패하고 나니 일종의 성취감이랄까. 그래서 고민을 하기 시작했죠. 이 문제를 놓고 김승연 회장을 만나려고 했는데 제대로 논의하지 못했어요. 결국 5000만 원을 받고 프로로 갔죠."

하지만 프로행을 선언하면서 하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뉴델리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병역혜택을 받고도 군대를 가야했던 것이다. 금메달을 딴 뒤 5년 동안 아마추어 선수로 뛰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를 6개월 남기고 프로로 전향한 것이다. 이에 대해 문성길은 "내가 잘 몰라서 그랬지. 그걸 알았다면 6개월 참았겠지"라며 웃었다.

◆ 청춘을 바쳤던 복싱, 지금은 왜 마음이 떠났을까

현재 그의 이름을 딴 문성길복싱체육관이 전국에 여러 곳 있다. 일종의 체인 형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문성길은 체육관 일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는다. 트레이너를 맡았던 조영섭 관장과 2002년 자신의 이름을 단 첫 번째 복싱체육관을 열었고 3, 4년 동안 관원들의 주먹을 받아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운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운영을 조영섭 관장에게 일임했다.

"왜 복싱을 하지 않느냐고요? 글쎄,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질렸다거나 환멸을 느꼈다는 표현은 좀 그렇고, 지쳤다고 해두죠."

문성길은 국내 선수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심폐지구력을 지녔다. 복싱을 하기 전에 육상선수를 꿈꿨고 기계체조와 씨름도 했기 때문에 하체도 탄탄했다. 그 탄탄한 하체와 심폐지구력이 돌주먹 문성길을 만들었다.

▲ 문성길은 지난 2002년 후배이자 자신의 트레이너를 했던 조영섭 관장(왼쪽)과 함께 문성길복싱체육관을 열었다. 이후 국내 여러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체육관을 열었지만 정작 운영이나 지도는 모두 후배들에게 맡기고 있다.

"태릉선수촌에서 매주 불암산을 올라가는 훈련이 있거든요. 5km 거리를 달려 올라가는 건데 아직까지도 그 기록이 깨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내가 21분대를 찍었지. 또 기계체조, 씨름에서 비롯된 탄탄한 하체도 있었고 팔 힘도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강한 주먹을 가질 수 있었던 거죠."

그 결과 문성길은 아마추어에서 219승 22패를 기록했다. 219승 가운데 164번을 KO로 이겼다. 경량급으로는 높은 68%의 KO승률을 기록했다.

프로에서도 20승 2패를 기록했고 이 가운데 15번을 KO로 이겼다. 프로의 KO승률 역시 68%다. 10번을 싸워 7번은 KO로 이겼다는 계산이다. 52~53kg을 제한 체중으로 하는 슈퍼플라이급이나 밴텀급 등 경량급 복서로는 꽤 높은 수치다.

문성길이 성공적인 복서로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신체 능력도 있었지만 성실하고 집중력이 뛰어났던 것도 일조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영섭 관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성길이 형은 복싱을 하면 거의 수도승이었어요. 경기가 잡히면 2개월 동안 형수님과 각방을 썼어요. 거의 무념무상이었죠. 체육관에 오면 샌드백만 열심히 쳤어요. 신들린 사람인줄 알았다니까요. 성실함과 집중력에 있어서는 유명우 선수도 최고였는데 제가 봤을 땐 유명우 그 이상이었죠. 오직 운동밖에 몰랐어요. 어쩌면 이렇게 오직 복싱에만 청춘을 바쳤기 때문에 지금은 질릴 법도 해요. 나라고 그럴 것 같아요."

문성길이 복싱에서 완전히 손을 뗀 까닭은 또 있다고 했다. 문성길은 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손을 가로저었다.

하지만 트레이너로 일한, 최측근인 조영섭 관장은 파이트머니가 문제가 됐다고 귀띔한다. 9차 방어전과 10차 방어전 때 파이트머니가 해결이 안됐다고 했다. 2번의 경기에서 대략 1억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을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받지 못하고 있다.

▲ 문성길(왼쪽에서 두번째)은 1980년대 한국 복싱을 이끌었던 기린아였다. 사진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복싱 금메달리스트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문성길.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 관심은 끊었지만 그래도 한국 복싱 일어섰으면 좋겠다는 천상 복싱인

현재 문성길은 두 곳에서 철판볶음밥 식당을 운영하며 평범한 삷을 살아가고 있다. 후배들이 운영하는 문성길복싱체육관에 가끔 드나드는 정도로 복싱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지만 관심은 거의 끊었다고 했다. 복싱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후보에 오르고 초청장까지 받았지만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이 몸담았던 복싱이기에 걱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복싱이 자신이 뛰었을 때와 비교해 너무 약해진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있다.

"제가 복싱에서 은퇴한 뒤에 이어나갈 후배 선수가 거의 없었다고 봐야죠. 제가 은퇴했을 때 유명우, 변정일 등이 거의 동시에 물러났는데 후진들을 양성하지 못했어요. 선수들은 돌고 돌아야 하는데."

지금도 복싱을 하겠다며 체육관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며 살을 빼기 위해 복싱체육관을 찾는 사람은 있다고 한다.

문성길은 이 현실이 가슴 아프다. 살기 좋아지면서 '헝그리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는 복싱을 하지 않으려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문성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따지면 미국이나 일본은 어떻게 설명하나요. 복싱이 못사는 나라만 잘한다는 인식은 잘못된거예요. 한국 복싱이 침체된 것은 인프라가 없기 때문이에요. 미국이나 일본만 봐도 프로모터 시장이 활성화돼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프로모터도 구하지 못해 챔피언 벨트도 자진반납하는 상황이죠. 프로 시장이 무너져 있으니 하려는 선수도 없고 함께 아마복싱도 침체돼 있다고 봐요."

▲ 문성길은 복싱이 '헝그리 스포츠'라는 것에 대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본이나 미국처럼 프로복싱이 인기있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복싱이 되살아나려면 프로모터 시장이 활성화돼 복싱을 하려는 선수들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영섭 관장도 선배 문성길에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프로복싱 선수들에게 돈은 곧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자본이 갖고 있는 힘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성길이 형이 슈퍼플라이급 챔피언으로 있을 때 8차 방어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뛰어다녔어요. 그런데 파이트머니가 해결되지 않은 9차 방어전부터는 바람빠진 풍선마냥 축 처지더라고요. 결국 10차 방어전은 판정으로 졌죠. 호세 루이스 부에노를 상대로 한 10차 방어전은 사실 확실하게 이기는 경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질 경기도 아니었어요. 나중에 성길이 형이 그러는데 '비즈니스 때문에 진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이후에 재기전을 치르려고 했지만 그 때도 파이트머니가 해결되지 않아서 3체급 석권이 무산됐고 끝내 은퇴를 한 거죠."

그래도 문성길은 한국복싱이 일어서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희망을 놓치 않고 있다. 2014년 한국프로복싱연맹(KBF)의 초대 회장으로 나선 이인경 회장이 노력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복싱은 분명 살아날 겁니다. 이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선수 1명밖에 나가지 못했을 정도로 한국복싱이 추락했지만 그래도 격투기 종목에서는 우리 선수들이 잘하잖아요. 이인경 회장도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으니 기대해봐야죠. 제가 더이상 복싱에 대해 관여하진 않지만 다시 살아난다면 한때 링에서 뛰었던 사람으로서 응원을 해주고 싶어요."

▲ 문성길은 링을 떠나있지만 한국 복싱의 침체에 대해 아쉬워한다. 아마와 프로복싱이 모두 살아나기 위해서는 시장의 확대와 활성화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 문성길 프로필

△ 생년월일 = 1963년 7월 20일 (전남 영암)
△ 체격조건 = 166cm, 54kg
△ 출신학교 = 목포 덕인고-목포대-동국대 대학원
△ 주요 경력
-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복싱 국가대표
- 1984년 LA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
- 1985년 서울 월드컵국제대회 복싱 국가대표
-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복싱 국가대표
- 1986년 세계 아마추어선수권 복싱 국가대표
- 아마추어 통산전적 241전 219승(164KO) 22패
- 1988년~1989년 WBA 밴텀급 챔피언 (2차 방어 성공)
- 1990년~1993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9차 방어 성공)
- 프로 통산전적 22전 20승(15KO) 2패
△ 수상 경력
-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밴텀급 금메달
-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밴텀급 금메달
- 1986년 리노 세계 아마추어선수권 밴텀급 금메달
- 1986년 체육훈장 백마장

[취재후기] 문성길은 세계 복싱에서도 '전설'로 평가받는다.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가 되기도 했다. 또 문성길의 경기에 감명을 받은 미국의 한 뮤지션은 자신의 그룹을 '선길문(Sun Kil Moon)'이라고 짓기도 했을 정도다. 선길문은 올해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전설로 남은 복서가 대접을 받지 못하는 환경 역시 아쉬운 대목이다. 그들을 최고의 선수로 대접해준다면 복싱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지지 않을까. 왜 '복싱의 전설'들이 최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복싱은 재기를 위해 너무나 할 일이 많다.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박상현 기자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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