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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카트' 문정희 "사회의 긍정적 변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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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카트' 문정희 "사회의 긍정적 변화 희망"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10.25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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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이상민기자] 공명이 나는 낮고 안정된 발성은 신뢰감을 준다. 어떤 배우들과 섰을 때라도 중심을 잃지 않은 채 황금빛 호흡을 주고받는다. 단박에 입맛을 사로잡진 않으나 몸에 좋은, 슬로 푸드같은 여배우 문정희(38). 올 가을 그의 진가가 더욱 빛난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마마’에서 헌신적인 아내이자 엄마 서지은을 연기했다. 한국 상업영화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다룬 ‘카트’(11월13일 개봉)에선 대형마트 계약직 계산원이자 아들의 어린이집 시간에 맞춰 칼퇴근을 해야 하는 싱글맘 혜미로 관객과 만난다.

 

카트 전작인 스릴러 ‘숨바꼭질’(2013)은 캐릭터를 강하게 보여줄 영화였지만 ‘카트’는 비정규직 계산원 선희(염정아)에 비해 사적인 얘기가 없어서 캐릭터보다 영화의 메시지를 보고 들어갈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카트’는 공감 코드에 매료됐다. 내 포지션의 비중이나 특성보다는 우리 사회 비정규직 그리고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라는 의미에 접근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욕심 그럼에도 배우의 욕심이 튀어나왔다. 아들 민수 외엔 혜미의 사적인 삶을 보여주는 장치가 별반 없어서 심재명 명필름 대표와 부지영 감독님한테 “저도 (스토리를) 넣어야 되는 거 아니냐? 캐릭터가 풍성하지 않다”고 어필한 적이 있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다 나오면 작품의 속도와 흐름이 질척거려지겠다 싶었다. 목숨 걸고 나와서 계산, 청소 등을 하는 마트 직원들인데 노조를 형성하고 만드는 과정보다 사생활에 치중하면 문제이지 않나. 혜미는 부당 해고에 맞선 복직투쟁의 중심에 있고, 사측과 대립구도의 선봉에 선 인물인 만큼 포인트를 살리자, 했다.

혜미 똑 부러지고 똑똑한 친구다. 전 직장에선 정규직으로 일하다고 부당하게 해고된 바 있기에 노동현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사측과의 투쟁 방법, 노조형성 과정을 아는 인물이다. 난 혜미가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가는 사람으로 자리하길 바랐다. 촬영 초반에 감독님은 좀 더 지적이고, 짧은 머리에 보이시한 느낌이 나길 원했다. 그런데 마트에서 일하는 아줌마라면 그런 느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생활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가운데 감독님이 원하는 색깔을 조금 묻혀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어 타협점을 찾았다.

 

변절 후반부 혜미의 변절을 질타할 순 없지 않나. 현실을 살아가는 혜미의 고민과 슬픔을 충분히 보여주고 싶었다. 업무 복귀를 선택했을 때 많은 아픔을 내재한 혜미로 보이길 원했고, 감정을 강요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영화에 표현됐다고 본다. 멍한 얼굴로 다시 계산대에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이해되지 않을까. 물대포를 맞으며 선희와 함께 카트를 미는 장면에서 혜미는 “언니!”라고 외친다. 변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함축했기에 가장 의미가 큰 대사다.

비정규직 단지 마트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의 불편한 현실이란 걸 알고는 있었다. 프리랜스로 포장돼 있지만 출연료만으론 생활을 할 수 없는 무대배우들이나 신인 배우들 모두 비정규직이다. 답이 없다고 여기다가 시나리오를 읽으며 내 얘기처럼 공감했다. 장보러 마트에 가서 고되게 일하는 캐셔 분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게 되더라. 노조에서 내건 플래카드를 보면 분명 한 목소리로 사측과 얘기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감정노동자 혜미와 같은 마트 직원이나 배우나 감정노동자인 점은 마찬가지다. 고객(대중)을 향해 나의 감정을 숨긴 채 미소를 지어야 한다. 배우의 경우 미디어나 SNS와 너무 밀착돼 있어서 어느 순간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으니 늘 말조심을 해야 한다. 아직은 힘들지만 내 직업의 특성을 이해하며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사회 현상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 책임감 없거나 의식 없다고 질타 받고, 목소리를 내면 논쟁을 일으키니. 소셜테이너로 이미지 메이킹하고 싶진 않으나 SNS를 통해 내 생각을 밝히기도 하고, 운동을 하면서 나를 다스린다. 행운인 게 직업이 배우다보니 울거나 화내는 연기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묵은 감정을 발산하기도 한다.

 

여자의 의리 ‘마마’와 ‘카트’에서 연이어 여자들의 우정과 연대를 체험했다. 아직 인생 경험이 많진 않지만,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의리', 여자 사이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 이상으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자들끼린 빨리 안 친해진다. 경계하면서 심리전을 벌이면서 서서히 믿음과 정을 쌓아간다. 그래서 상대의 마음을 잘 읽게 되고, 뒷심이 강하다. 끈끈한 우정은 시간이 숙성시켜 준 선물인 것 같다. 남녀든 여여든 무수히 많은 사건과 시간이 있어야 관계가 진해지지 싶다.

송윤아와 염정아 작품을 하면서 두 선배와 의리가 생겼다. 내가 어릴 때 그들은 동경의 대상인 스타였다. 당연히 선배들한테 잘 한 건데 선배들이 좋게 봐주셔서 감동적이다. ‘카트’ 촬영 이후에 ‘마마’에 들어가게 됐는데 정아 언니가 “몸 관리 잘 해라. 먹고 해라”라고 살뜰하게 챙겨줘서 큰 힘이 됐다. 윤아 언니는 오랜만의 복귀라 컨디션을 살폈을 뿐인데 늘 나를 배려해줬다. 두 사람 다 좋은 인격체들이다. 여배우들이 너무 털털하다. “나 여자야!”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정말 독특한 사람들을 내가 운좋게 만난 거다.

케미스트리 배우라면 누구나 연기 욕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끼리 만나다보니 초반에 심리전이 발생하곤 한다. 그럴 때 난 무장해제를 해버린다. “나한텐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다 할게!” 식이다. 상대가 날 좋아해야 일하기 편하고, 나도 마음껏 연기 욕심을 부릴 수 있지 않나. 역설적으로 나를 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상대방과 불편하면 난 연기를 못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은 상대로부터 온다.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상대 배우다. 연기는 내가 잘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과 어떻게 잘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연기 방법론 이제껏 해왔던 모든 캐릭터가 나였고, 내가 아니었다. 캐릭터에 대한 동의가 돼야 연기가 나온다. 캐릭터의 형태는 완벽한데 그 배우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감동은 덜하다. 관객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를 보고 싶어 한다. “저 배우가 하니까 책에서 본 느낌이 나네”라고 하지 않나. 사람만이 가진 스피릿이 묻어날 때 소름이 돋는다. 배우라는 존재를 통해서 나오는 맛을 막으면 안 된다고 본다. 나도 연기할 때 테크닉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캐릭터와 내가 접속이 되면 그것보다 무서운 게 없다. 아무리 캐릭터를 잘 연기해봤자 문정희라는 인간이 묻어나더라.

모성 나이가 있으니까 엄마 역을 맡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가 없으니까 모성은 잘 모른다. 캐릭터 때문에 생기는 모성인데 잘 표현됐다면 너무 감사하다. 만약 내 자식이 생긴다면 무척 냉정해질 듯하다. 내가 (연기) 해봤는데 똑바로 해!(웃음) 감정에 휘둘리는 엄마가 되진 않을 것 같다. 2세 계획은 옛날부터 해오고 있다. 너무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는 중이다. 고령출산 추세다보니 가족들은 별반 걱정하진 않는다. 집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은 채 밖에 나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고맙다.

뮤지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1998년 뮤지컬 ‘의형제’로 데뷔했는데 2004년 이후 출연한 적이 없다. 그동안 몇 번 제안이 있었는데 ‘마마’ 들어가느라 못하고 이러저런 사정으로 접었다. 뮤지컬이나 연극은 3~4개월의 리허설에 참여해야 제대로 공연이 되니까 스케줄을 맞추기가 힘들다. 또 그 사이에 너무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엄두가 나질 않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가 생기면 하고 싶다. 음악영화나 댄스영화도 좋을 것 같다.(문정희는 고전무용, 재즈댄스 실력이 출중하며 세계 살사댄스대회에 입상한 바 있다.)

 

예술의 본질 고흐의 그림을 보더라도 사회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내면의 끙끙거림이 없는 예술은 자아도취일 뿐이다. 진정한 예술가로 남는 사람들은 사회의 아픔을 내 얘기처럼 아파한다. 그게 예술이라고 본다. 내가 대단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4대강 개발로 급수원이 오염됐다는 뉴스는 내 얘기이지 않나.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관심을 갖고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권은 맨날 싸우기나 하고” 식으로 혐오하고 외면할 게 아니라 그로 인해 내 삶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 지를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취재후기] 인터뷰 내내 문정희는 인상적인 얘기를 많이 했다. 연기의 뜨락에 갇혀 있는 배우가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과 생생한 대화를 나눈 느낌이다. ‘카트’를 통해 함께 위안을 얻고 우리 사회가 긍정적으로 바뀌는 힘이 생겼으면 한다는 그는 '카트'와 1주일 간격으로 휴먼 로맨틱 코미디 영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를 개봉시킨다. 의리파 엄마이자 아내 지수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향기를 스크린 가득 채울 전망이다. 문정희의 단아한 얼굴에 깊은 가을이 들어서 있었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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