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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의 독재자' 설경구, 위대한 배우의 뜨거운 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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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의 독재자' 설경구, 위대한 배우의 뜨거운 화인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10.27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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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이상민기자] ‘박하사탕’의 영호, ‘오아시스’의 종두, ‘역도산’의 역도산, ‘공공의 적’의 강철중이 찍어낸 뜨거운 화인에 데었던 경험을 다시 하게 됐다. ‘나의 독재자’(10월30일 개봉)는 첫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 리허설을 위한 김일성의 대역으로 발탁된 뒤 일생을 김일성으로 살아간 아버지 성근과 그런 아버지로 인해 인생이 꼬여버린 아들 태식(박해일)의 이야기를 담았다.

 

설경구(46)는 무명의 연극배우에서 점차 독재자로 변해가는 성근 역을 맡아 압도적인 연기로 깊은 울림을 전한다. 북한말을 자연스레 구사하고, 노년의 성근을 위해선 몸집을 불렸다. 5시간의 특수분장을 통해 어느덧 김일성과 흡사해진 노인의 얼굴을 끌어냈다. 이해준 감독은 “22년이라는 세월을 담아낼 수 있는 연기의 진폭과 에너지에서 설경구라는 배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무서울 정도로 변하는 동물적인 배우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설경구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조우했다. 그는 다시금 멀끔한 40대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

-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싶었던 시기에 ‘나의 독재자’를 만났다고 들었다.

▲ 요즘 관객 취향이나 제작 트렌드는 호흡이 짧은데 호흡이 긴 영화를 하고 싶었다. 상업영화의 가치나 관객수도 주요하지만 한동안 꽤 못했던 것 같다. ‘나의 독재자’는 호흡이 긴 데다 배우끼리 (연기로)부딪힐 수밖에 없는 영화다. 배우끼리 부딪힐 때 가장 희열을 느끼게 된다. CG나 편집 등으로 인해 영화 후반작업이 길어지면 배우 입장에선 어떤 영화, 어떤 스케일의 화면이 나올지를 모른다. 대규모 예산의 영화를 했을 때 아쉬웠던 건, 제작진이 후반작업 업체랑 더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더라. 배우는 소스를 던져주는 역할로 전락해 버리고. 하지만 ‘나의 독재자’는 찍은 대로 나오는 작품이지 후반작업에 의지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 완성본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은 어땠나. 예상 대로였나.

▲ 언론시사 때 처음 봤다. 전날 잠을 잘 자다가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이 감독으로부터 “몸은 천근만근인데 잠이 안 오네요”란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그때부터 당황스러워졌다. 개봉일이 갑자기 잡혀서 화면 콘트라스트 완벽하게 맞춰지질 않은 상태여서 언론시사를 급하게 한 상항이었다. 내내 긴장하면서 영화를 봤고, 대기실에 있는데 서로 말들을 안했다. 기분이 묘했다. “너무 힘을 줘서 봤나?”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랬다.

-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갔던 아버지 세대의 초상이 잘 그려졌다. 한 아버지의 아들로써 영화에 임한 느낌은 어땠나.

▲ 김성근으로 대표되는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다. 성근은 자식에게 친근하고 따뜻하려던 아버지였는데 그토록 기대하던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되면서 아들마저 팽개쳐버리게 된다. 나의 아버지와 직업 등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비슷한 접점이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인생을 살지 않았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기를 잃어버린 채 항상 쪼들리면서 살았다. 스스로를 독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자식들은 “당신 맘대로 한다”고 평가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부모가 대부분을 결정했던 시절이지 않았나. 본심은 자식을 위해서 그랬던 거였는데. 나 역시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다. 아버지 역시 날 한심해 했고, 대화가 거의 없었다. 되돌아보면 아버지의 인생은 자식에게 다 뜯기면서 산 인생이다. 어느 순간 다 쪼그라들어 있고, 진정한 독재자는 엄마가 돼있고.(웃음)

 

- 극중 성근은 연극배우다. 배역에 너무 몰입해 무대와 현실을 혼동하며 살아간다. 캐릭터를 온몸으로 체화하는 소위 ‘메소드 연기’의 화신 소리를 들을 법도 한데.

▲ 성근은 좋은 배우가 아니다. 배우는 감성적으로 타고나야 하는데 성근은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너무 갔다. 첫 주연작이 마지막 작품이 돼버리니. 성근을 연기할 때 그 역시 정상회담 리허설 연기를 극단에서 하듯 트레이닝하지 고문실에 끌려가 연습하고, 강제로 학습과 세뇌교육을 받고 그럴 줄 몰랐을 거라고 설정했다. 남북관계의 희생자인 성근은 갈 데가 없는 사람이라 스스로 그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일상에서도 자신만의 연기를 한 거였다. 빠져나오는 순간 희망의 끈, 생명의 끈을 놓쳐버리는 거니까. 아들을 그 지경으로 팽개칠 정도였기에 나중에 부자가 등장하는 장면을 봐도 성장한 아들 눈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한다. 아픈 응어리가 있는 거다. 극중 태식이 “아버지 연극하는 거지?”라고 말한다.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연극 안에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촬영했다.

- 당신 역시 ‘박하사탕’(2000년) 당시 배역에 쉽게 빠져나오지 못해 힘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 ‘박하사탕’의 경우 잔상이 계속 남아 있었다. 광주사태에 대한 상처에서 못 벗어났다. 생각을 항상 집중하느라 심신이 푹 꺼지고 영화조차 보질 못했다. 모든 게 슬프고 우울증에 걸렸다. 후유증이 꽤 오래 갔다. 촬영할 때도 항상 똑같은 의상을 입고 다니며 넋나간 듯 있어서 촬영현장에 방문한 사람들이 “쟤 왜 저래? 무슨 일 있어?” 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 영화를 보면 북한말 구사가 유려하다. 물론 ‘역도산’ 때는 대사의 95%를 일본어로 소화했으므로 그때보다는 수월했겠지 싶기도 하지만.

▲ 평양 출신의 탈북자 분에게 배웠다. 휴대폰에 대사를 녹음하고, 가급적 현장에는 안 오셨으면 했다. 계속 체크하면 연기에 집중을 못하니까. 또 김일성 역도 아닌데 부담스러웠다. 감정이 중요하지 북한말의 정확성이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역도산’ 때는 꿈까지 일본어로 꾸고, 경기를 일으키기도 했을 정도였다.

- 박해일과는 첫 공연이다. 두 사람 모두 연극배우 출신이라 연기호흡은 차지지 않았을까 싶다. 배우 설경구가 본 박해일은?

▲ 둘이 뭘 약속한 것도 없고, 열심히 하자고 한 것도 없다. 해일씨가 38세인데 아들로 느끼기에 부담스러운 얼굴은 아니더라. 하하. 어디로든 튈 거 같은, 착한 똘기의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순수함과 진득한 어른스러움도 갖춘 얼굴이지 않나. 오히려 내가 걱정스러웠다. 그가 날 보고 아버지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항상 대본과 콘티를 성경책처럼 가지고 다니며 산책을 즐기는, 영감 같은 면이 있다.

- 이해준 감독은 ‘천하장사 마돈나’ ‘김씨 표류기’를 통해 특별한 발상과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이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 독특한 소재로 작품을 잘 만드는 감독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때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주 찐하게 나온다. 태식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정(류혜영)이 머무는 지방을 찾아가서 만나는 엔딩 장면을 시나리오 단계부터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탓에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했던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순간, 나누던 대사 “말도 한다. 들어 봐” “뭐라 그래?” “이제 다 괜찮대”에 반해서 이 작품을 하겠다고 했다. 너무 좋아서 고문실에서 나온 성근이 통닭을 사들고 와서 우는 태식을 안아주며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라고 사용했다. 목소리가 작아 들리든 안 들리든 하고 싶었다. 결국 성근이 어린 태식에게 했던 말이 훗날 태식이 자식에게 들려주는 말이 됐다.

 

- 얘기를 듣다보니 이번엔 ‘개입’을 많이 한 것 같다. 단순히 배우로서 연기만 열심히 한 게 아니라 아이디어, 연출 제안 등 자신의 분신처럼 영화에 임한 느낌이다.

▲ 권력의 대변인인 중앙정보부 오계장(윤제문)의 경우도 늙지 않게 하자고 제안했다. 왠지 권력은 늙지 않을 거 같았다. 감독은 영화에서 배우의 길과 부자의 길 두 가지를 가고 싶었는데 난 아버지와 아들에 포인트를 맞췄다. 마지막 정상회담 리허설도 아들에게 자신의 공연을 보여주려고 했던 거였다. 과거 아들 앞에서 개망신 당했던 아버지가 대통령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기싸움에 지지 않으며 김일성을 연기한 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에서 비롯된 거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영화라 이번엔 굉장히 많이 개입한 듯하다.

[취재후기] 설경구를 처음 만난 건 1998년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호텔 직원 연(진희경)과 하룻밤을 보내는 만화가로 6분쯤 나왔던 무렵이었다. 풋풋한 훈남 신인배우는 16년의 세월이 흘러 중년의 연기파로 자기 자리를 확고히 잡았다. 몇 해 전 인터뷰했을 때보다 한결 밝아지고, 말수가 많아진 변화가 반갑게 느껴졌다. “피를 토하며 연기했두만”이라는 인사말에 “뭘 피를 토해!”라며 손사레를 치는 뚝뚝함은 여전하지만.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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