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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의 V파노라마] 한국배구 '수비형 레프트', 그 씁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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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영의 V파노라마] 한국배구 '수비형 레프트', 그 씁쓸함에 대하여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7.03.17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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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국제경쟁력 높이기 위해서는 '완성형 레프트' 육성해야" 한 목소리

[스포츠Q(큐) 이세영 기자] “공격을 해야 할 포지션인데 수비만 시키니 반쪽자리 선수가 양산되고 있다.” (김건태 아시아배구연맹(AVC) 심판위원)

“배구 사전에는 수비형 레프트라는 말이 없다.” (진준택 전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운영위원장)

류윤식(대전 삼성화재)과 송희채(안산 OK저축은행), 채선아(화성 IBK기업은행)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코트 왼쪽에서 공격보다 수비에 집중하는 레프트라는 것. 언젠가부터 배구 중계방송이나 각종 언론을 통해 이들을 ‘수비형 레프트’라고 칭했다.

▲ 왼쪽부터 류윤식, 송희채, 채선아. 이들 모두 레프트 공격수이지만 리베로 못지 않은 리시브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 KOVO 제공]

하지만 수비형 레프트라는 말은 한국에만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레프트는 국제대회에서 ‘아웃사이드 스파이커(Outside spiker)’, ‘윙 스파이커(Wing spiker)’ 혹은 ‘아웃사이드 히터(Outside hitter)’라고 불리거나 표기한다. 직역하면 ‘날개 공격수’인데, 공격과 수비 능력을 모두 갖춰야 함을 의미한다. 한 예로 올 시즌 V리그 득점 6위, 리시브 1위에 오른 왼쪽 공격수 이재영(인천 흥국생명)은 레프트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 "수비형 레프트가 생기면서 '반쪽자리 선수'가 늘어났다"

그렇다면 왜 수비형 레프트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생긴 리베로(수비 전문 포지션) 제도, 그리고 배구의 기본인 로테이션(서브를 받는 팀이 득점에 성공해 서브권을 얻었을 때, 득점한 팀만 시계방향으로 한 칸 씩 이동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리베로는 팀 동료와 다른 색 유니폼을 입고 서브와 공격, 블로킹을 할 수 없다. 오로지 수비와 서브 리시브만 한다. 로테이션에서 리베로의 역할은 중요하다. 리베로는 수비력이 약한 센터가 후위에 있을 때 수비 강화를 위해 투입되고 서브 리시브 상황에서 주로 오른쪽 공격수 또는 세터를 커버한다. 배구를 많이 본 팬이라면 센터가 서브 범실을 했을 때 부심의 사인 없이 리베로와 배턴터치를 하는 장면을 종종 포착했을 것이다.

▲ 왼쪽 그림에서 리베로가 세터와 교체돼 코트로 들어가면 리베로는 오른쪽 그림처럼 세터를 커버한다. 세터는 2단 토스를 해야 하는 포지션으로, 서브 리시브에 가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 KOVO 제공]

센터와 교체된 리베로는 서브 리시브 상황에서 세터(또는 라이트 공격수)를 보호한다. 이때 후위 레프트에게 목적타 서브가 집중되는데, 당연히 레프트의 리시브 능력이 좋아야 한다. 득점 성공으로 로테이션이 이뤄져도 리베로와 세터(또는 라이트 공격수), 레프트가 후위에 위치하게 되는데 리베로와 레프트의 수비 호흡은 매우 중요하다.

어차피 로테이션은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두 명의 레프트 모두 공격과 수비력이 뛰어나야 한다. 상대적으로 리시브가 약한 공격형 레프트가 후위에 있을 때 리베로가 넓은 범위를 수비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리시브가 불안해질 것이고 세터는 속공을 쓸 수 없게 된다. 이는 상대 블로커의 선택지를 줄이는 일이기에 공격 팀에 불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국내에서는 공격형 레프트가 후위로 가면 서브 리시브 전담 선수와 교체하는 고육책을 쓰곤 한다. 리시브 성공률을 높이기 위함인데 이것은 후위 공격 옵션 하나를 버리는 꼴이어서 불리한 조건을 스스로 만드는 셈이다. 여기서 국제 경쟁력은 떨어진다.

▲ 여기서 레프트1이 리시브가 약한 '공격형 레프트'라면 감독은 수비형 레프트로 교체해 안정감을 꾀할 때가 많다. [그림= KOVO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레프트를 ‘공격형’과 ‘수비형’으로 나눠 전자는 공격에, 후자는 수비에 중점을 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역할 분담을 통해 공격과 수비 모두 극대화하려는 복안이기는 하나, 전문가들은 이로 인해 소위 ‘반쪽자리 선수’가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준택 전 위원장은 “레프트는 기본적으로 공수를 겸비해야 하는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이 승부에 눈이 멀어 신장이 큰 레프트 공격수에게 리시브 훈련을 시키지 않는다”며 “그러다보니 레프트 포지션의 국제 경쟁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건태 위원은 “리베로 제도가 생기면서 레프트 포지션에 역할 분담이 생겼다”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현상이 계속될 것이다. 선수들이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데 큰일이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 레프트 포지션의 공수 분담을 없애려면?

한국 배구의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레프트 포지션의 공수 분담. 이것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를 꾀해야 할까.

신영철 수원 한국전력 감독은 레프트 2명과 리베로까지 3명 모두에게 서브 리시브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에서는 이 방법을 흔히 쓰고 있다”며 말문을 연 신 감독은 “능력만 되면 레프트 2명 모두에게 서브 리시브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레프트 2명 중 꼭 한 명이 리시브 실력이 떨어지는데, 감독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 선수의 능력을 키워줘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 현대캐피탈 박주형(왼쪽)과 송준호. 스피드 배구에 녹아든 두 선수 모두 올 시즌 공격력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사진= KOVO 제공]

최태웅 천안 현대캐피탈 감독이 추구하는 ‘스피드 배구’로 노선을 트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코트 위에서 유기적인 움직임을 통해 선수 전원이 공수에 참여하고 있는데, 올 시즌 레프트 박주형과 송준호가 이 시스템에 잘 녹아들면서 성장하는 면모를 보여줬다. 본래 공격보다는 리시브를 도맡았던 두 선수는 이번 시즌 공격이 일취월장했다.

공격과 수비 모두 뛰어나 ‘완성형 레프트’로 불리는 김연경은 한 인터뷰에서 “학교 시스템을 보면 키가 크고 어느 정도 잘하는 선수는 공격만 한다고 생각해서 수비와 리시브 연습을 시키지 않는다. 이런 선수들이 프로에 와서 배우려고 하면 이미 늦다”고 일침을 날렸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공격과 수비를 나누지 않고 레프트 자원을 키워야 한국 배구가 발전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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