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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7) 20년만의 AG 우승 여자농구, '인기 회복이 진정한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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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7) 20년만의 AG 우승 여자농구, '인기 회복이 진정한 금메달'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10.31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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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AG 우승 주역 천은숙...코치·심판 '1인2역'으로 발전책 현장 고민

케이블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지난해 연말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극 중 간간이 보여준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 장면은 스포츠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물론 1994년에는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만 인기를 모았던 것은 아니다. 그해에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미국 월드컵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가 넘쳐났고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리즈 ‘응답하라 스포츠 1994’가 그들을 만나러 간다. <편집자주> 

[300자 Tip] 한 분야에서 30년 넘게 종사하고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을 두고 흔히 '전문가'라고 한다. 30년 넘게 경험과 경력을 쌓으며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 분야의 발전을 위해 외길인생을 걷는 것 역시 뜻깊은 일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현역 선수를 거쳐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면 학창 시절을 포함해 30년 넘게 특정 종목에 몸담았을테니 당연히 전문가로 인정해줘야 한다. 현역 스타선수를 거쳐 코치와 심판 등 전방위로 활동하는 여성 농구인이 있다. 저돌적인 돌파와 탁월한 득점력,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천장군'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여자농구 금메달을 따내는 등 한국 여자농구의 1990년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천은숙(45)의 얘기다.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들이 모두 출전하는 KB국민은행 2014~2015 여자프로농구가 1일 개막된다. 새로운 여자프로농구 시즌 개막에 맞춰 여자농구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천은숙을 만나봤다.

▲ 1990년대 실업농구의 마지막 세대인 천은숙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당시 금메달의 주역이다.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이가 된 그는 아직까지도 농구 일선현장에서 뛰며 한국 여자농구의 발전에 대해 고민한다.

[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이상민 기자] 한국 여자농구는 핸드볼이나 배구 등 여타 여자 구기종목과 마찬가지로 국제 무대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은메달을 따냈던 기억은 아직 올드 농구팬이라면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로부터 6년 뒤에 열린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여자농구 금메달을 거머쥐게 된다. 1978년 대회 이후 12년만에 차지한 역대 두번째 우승이었다. 또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 여자농구는 내리막길이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결승전도 올라가지 못한채 동메달에 그쳤고, 2006년 카타르 도하 대회에서는 일본에 져 메달 획득에도 실패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4위라는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최하위에 그치기도 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당시 한국 여자농구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천은숙은 지금 여자농구의 상황을 보면 가슴 한편이 답답해온다. 초·중·고교 순회 코치로도 활약하고 아마추어 심판으로 계속 농구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예전만 못한 농구의 인기와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잃어버린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는 그다.

인천 아시안게임을 통해 20년만에 금메달을 따낸지 어느덧 한달 가까이 지났다. 천은숙은 아시안게임 금메달만 생각하면 기쁘다. 하지만 웃을 수가 없다.

침체된 여자농구가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려면 너무나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획기적인 변화 없이는 여자농구의 발전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 코오롱에서 뛰던 천은숙은 176cm의 장신 가드였다. 슛 능력까지 갖춘데다 장신의 키로 현역시절 가드부터 센터까지 모두 도맡았던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 1990년대 인기 최고였던 여자농구 침체 겪는 이유는

"정말 1980년대, 1990년대 여자농구의 인기가 좋았어요.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었죠. 태평양화학, 한국화장품, 현대, 선경, 코오롱, 국민은행, 동방생명(현재 삼성) 등이 치열한 접전을 펼친 농구대잔치 때면 구름관중이 몰려왔어요. 오히려 그때가 최전성기였죠."

천은숙은 큰 인기를 모았던 여자실업농구의 마지막 세대다. 여자농구 명문인 부산 동주여상을 나와 코오롱에 들어간 그는 176cm의 장신 가드였다. 가드로서 장신이었기 때문에 포워드와 센터까지 보는 등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활동했다.

"3살 터울 언니(작고)를 보면서 농구를 시작했었죠. 언니가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제가 먼저 하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때 시작했는데 4학년때까지 패스, 드리블만 연습했죠. 농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훈련이 끝난 뒤에도 언니들 하는 것 그대로 보면서 레이업슛을 혼자서 연습했던 기억도 나네요. 이후 가드로 시작했는데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 키가 커지니까 2번(슈팅가드)도 보고 3번(스몰 포워드)과 4번(파워 포워드)도 봤어요. 센터가 없었을 때는 센터로 나서기도 했었다니까요."

이후 박양계나 김화순 등 쟁쟁한 선배들을 배출한 동주여상에 진학한 그는 코오롱에서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코오롱은 체력을 바탕으로 많이 뛰는 팀이었어요. 파이팅이 있었고 수비가 강했죠. 제가 코오롱에서 뛰었을 때는 태평양화학과 한국화장품의 전력이 약해지고 있을 때 국민은행과 동방생명이 치고 올라왔고 현대도 종종 4강에 들었어요. 여기에 코오롱와 선경이 도전하는 형국이었죠."

한창 뜨거웠던 여자농구의 인기는 공교롭게도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최정점으로 꺾이기 시작한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IMF 경제위기가 터지면서 실업팀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남자농구가 프로화가 진행되면서 여자농구 역시 프로 출범을 진행 중이었지만 잇단 실업팀의 해체는 큰 타격이었다. 해체된 팀 가운데 코오롱도 있었다.

"아마 오너가 해체를 결정했던 것 같아요. 코오롱이 투자를 많이 하는 팀은 아니었지만 선수들이 알찼기 때문에 다크호스였거든요. IMF 사태가 터졌을 때도 코오롱은 그렇게 상황이 어렵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업팀 해체 과정 속에서 그 흐름을 따라갔던 것 같아요. 오너가 마음만 잘 먹었으면 충분히 프로팀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죠."

실업농구와 마찬가지로 현재 여자프로농구의 선수 수급처는 아직 고등학교다. 고교 선수들이 곧바로 프로에 데뷔한다. 하지만 이 선수들의 실력은 프로 선수와 비교해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실업농구 팬이 굉장히 많았어요.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연령층도 다양했죠. 그때와 지금의 인기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죠. IMF 사태로 실업팀이 해체되면서 어린 선수들이 갈 곳이 없어지고 그 여파로 초중고등학교 팀들이 없어지거나 농구를 하지 않는 등 후유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결과 예전처럼 수준높은 실력을 가진 선수가 배출되지 않고 있죠. 예전에는 학교마다 선수들이 20명 이상 있었기 때문에 선수층이 두터웠죠. 고등학교 상위권 팀이 실업팀과 대등하게 싸우고 어떤 때는 이기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학교마다 7, 8명 정도? 많아도 10명을 넘지 않아요. 그러니 훈련이 제대로 될리가 있나요. 고등학교 팀과 프로팀이 지금 붙어보면 40~50점 이상 차가 날겁니다. 경기가 안됩니다."

◆ 같으면서도 다른 아시안게임 금메달

한국 여자농구는 20년 만에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중국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한때 일본에도 밀리는 등 한동안 침체를 겪었던 상황에서 따낸 20년 만의 금메달인지라 기쁨이 두 배였다. 천은숙으로부터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당시 얘기를 들어봤다.

당시 대표팀은 중국과 풀리그에서 103-73, 30점차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만큼 전력이 강력했다. 물론 중국을 두번째 만나도 이긴다는 보장을 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져주기 논란'이 있었다. 중국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 일부러 져서 결승전에서 일본과 만나려 했다는 것이다.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일본에 져주기 논란이 있었다. 결승전에서 까다로운 중국보다 좀 더 만만한 일본과 맞붙기 위해 져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은숙은 경기가 풀리지 않아서 5점차 이내 패배로 막기 위해서였지, 결단코 져주기는 없었다고 말한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만 져주기 같은 것은 절대 없었어요. 일본과 관계를 생각해서도 어떻게 해서든 이기려고 했죠. 그런데 이상하게 경기가 꼬이고 풀리지 않는겁니다. 경기 막판으로 가니까 거의 뒤집기 어려운 상황까지 갔고 5점차 이내로만 막자고 해서 겨우 4점차 패배로 경기를 끝낼 수 있었어요."

다시 결승전에서 일본과 만난 한국 대표팀은 또 경기가 꼬였다.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일본에 밀렸다. 한때 14점까지 뒤지기도 했다.

전반을 37-44로 뒤졌던 한국은 후반 들어 심기일전, 전주원의 3점슛이 잇따라 터지면서 후반 6분만에 54-53으로 역전을 이끌어냈고 이후 시소게임을 이어갔다. 후반 막판에는 천은숙과 정은순 등이 골을 넣으며 극적으로 이길 수 있었다.

"아시안게임을 위해 태릉선수촌에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슈퍼 서키트 훈련을 했어요. 웨이트 트레이닝 기계를 한번 돌면 40분 정도가 걸리는데 그것을 2~3세트씩 했어요. 점심 먹고 오후 훈련하면 발이 움직이지 않았을 정도였어요. 그런 슈퍼 서키트 훈련을 1주일에 3번씩 헀는데 막상 대회에 나가니까 심폐와 근력에는 큰 도움이 됐죠.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서 따낸 우승이라 너무 소름끼쳤어요."

인천 아시안게임 대표팀 역시 체력 하나만큼은 뛰어났다. 위성우 감독의 지옥 훈련 아래 강한 체력을 앞세워 금메달을 따냈다. 그런 점에서 20년 전과 지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같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는 젊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20대 선수가 주축이었기 때문에 스피드도 빨랐죠. 하지만 이번 금메달은 노련미로 우승했다고 봐요. 이미선이나 변연하 등 30대 중반의 선수들이 경험을 갖고 경기를 풀어주고 여기에 이경은 등 젊은 선수들이 함께 하면서 금메달을 따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천은숙은 20년 전과 지금의 대표팀이 가상대결로 맞붙는다면 누가 이긴다고 생각했을까. 확답은 피했지만 가장 이상적인 팀은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라고 의견을 밝혔다.

"20년 전과 지금의 대표팀을 비교하기에 다소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가장 이상적인 팀은 역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당시 대표팀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모든 선수가 득점력이 있었죠. 가드 3명이 뛰지만 리바운드도 함께 잡아내는 등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뛰었거든요. 아마 감독으로서도 작전을 짜기가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가 더 쉬웠을 겁니다. 반대로 상대팀은 우리를 막기가 그만큼 힘겨웠겠죠. 그때는 선수 수급이 좋았기 때문에 선수층도 두꺼웠고 경기 풀어나가기가 훨씬 쉬웠어요."

▲ 천은숙은 선수 후반기 들어 마음고생을 겪었다. 아킬레스건 부상과 함께 코오롱이라는 한 팀에서 뛰다가 방출되는 설움, WNBA 진출 무산 등이 그것이다. 특히 코오롱에서 겪었던 아픔은 마음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 두 차례 이적파동과 부상, 순탄치 않았던 선수 후반기

그는 실업농구에서 활약하면서 단 한차례도 코오롱을 떠난 적이 없다. 한국 여자농구의 대표적인 슈터였기에 좀 더 강한 팀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코오롱에서 계속 머물면서 지도자로 나갈 계획까지 있었다.

하지만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 시련이 찾아왔다. 부상이 있었다. 나쁜 일은 계속 밀려왔다. 부상에서 좀 나아진 뒤에는 사실상 방출 통보를 받은 것이다.

"아직도 날짜를 생생하게 기억해요. 1996년 12월 28일 현대전이었는데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 31일에 수술을 받았어요. 너무 심각하게 끊어졌기 때문에 재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선수들과 의논도 없이 제가 코오롱에서 방출됐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정말 충격이었죠. 저는 코오롱에서 코치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천은숙은 당시만 생각하면 아직까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적동의서를 받아 대만으로 진출하긴 했지만 마음의 생채기는 크게 남아있었다. 배신을 당했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없어진 팀이니까. 많이 아쉽죠. 아쉽다기보다 화가 많이 났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팀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되어버리고 명예가 떨어졌으니 말이죠."

그가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다른 농구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그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막 태동했던 미국여자프로농구(WNBA)에 갈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 천은숙은 한국 여자농구 침체의 원인으로 IMF를 들었다. 실업팀이 해체되고 이를 해결하지 못한채 프로화가 되는 과정 속에서 초중고등학교 선수들이 농구를 그만두고 선수층이 얇아지면서 아직까지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올림픽 끝나고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WNBA에 나갈 수 있었을 거예요. 미국 지도자들이 종종 한국에 와서 지도를 하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WNBA쪽과 연이 닿았던거죠. 어느 구단과 접촉이 됐었는지는 저도 잘 몰랐지만 상당 부분 진척이 되긴 헀어요. 그러나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바람에 모든 일이 틀어지고 말았어요."

천은숙은 코오롱에서 한 차례 파동을 겪은 뒤 여자프로농구에서도 다시 한번 파동을 겪었다. 대만에서 돌아와 잠시 광주 신세계(현재 부천 하나외환)에 몸담았다. 그러나 신세계에서 선수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신세계에서 나오고 나서 다른 팀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이적동의서를 써주지 않아 마음 고생을 겪었다.

"사실 팀에서 이적동의서를 써주지 않아 선수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는 여자농구뿐이 아닙니다. 알게 모르게 선수들은 스포츠 현장에서 약자에 불과합니다. 힘의 논리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항상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 지도자와 심판으로, 나아가서 행정가까지 도전

선수 후반에 여러가지 일을 겪었던 것이 그를 농구계에 더 남아 있게 한 계기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돌며 코치로 일하면서 심판 자격증을 따 아마추어 심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나아가서 행정가로도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특히 천은숙은 여자농구가 더욱 발전하기 위한 문제에 관심이 많다. 여자농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초·중·고교 농구가 다시 활성화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고교에서 프로로 곧바로 진출하는 구조가 아니라 대학팀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등학교 선수들이 프로로 많이 진출하지만 실력이 미치지 못해 주전으로 금방 도약하기가 힘듭니다. 차라리 대학에서 열심히 훈련하고 기본기를 가다듬어서 프로로 진출하는 방법이 더 효과적입니다. 물론 프로에서 금방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라면 곧바로 가는 것도 좋겠지만 고졸 신인선수가 주전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대학을 거치는 것이 좋다고 봐요. 청년 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어떤 학부모가 고교 졸업 학력만 갖고 있는 자녀를 원하겠어요. 예전 실업농구야 5년 정도 활약하면 은퇴 뒤 직원으로 채용되곤 했지만 여자프로농구가 된 뒤에는 그런 길도 막혀있죠. 이화여대, 숙명여대나 연세대, 고려대 등이 여자농구팀도 함께 만들어서 대학 진학 후 공부도 하고 이후 프로로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초중고등학교 선수도 늘어나고 한국 여자농구의 침체도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 한국 여자농구가 발전하려면 초중고등학교 선수들이 늘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학팀이 생겨야 한다고 말한다. 고졸 신인 선수가 프로에서 주전으로 뛰기 어려운만큼 대학에서 기량을 쌓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현재 천은숙은 아마추어 심판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종종 WKBL 심판으로 오라는 권유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를 친다. 직업 심판의 길이 아니라 코치를 병행하면서 나아가 농구 전반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농구 쪽에서 일하니까 농구에 관한 일은 다해보려고 해요. 처음에는 심판을 하는 것이 망설여졌는데 행정적인 업무 등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었어요. 심판으로서 어떤 고충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죠. 직업 때문에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일하는 것이 좋아요. 심판을 하면서 룰에 대한 공부도 하고 학생들 가르치는데 큰 도움이 되요."

'농구와 결혼했다'는 표현이 맞는걸까. 이처럼 농구 일선현장에서 열심히 뛰다보니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눈이 높거나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는 아니라고 한다. 언제든지 생각만 있으면 짝을 찾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농구 얘기만 나오면 아직 10대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면 천은숙은 천상 '농구인'이다.

[취재후기]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후 여자농구가 이렇게 침체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당시 있었을까. 그때만 해도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니 그런 생각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가 IMF 사태가 터졌고 실업팀이 대거 해체되면서 여자농구 역시 끝없이 추락했다. 이에 대해 천은숙은 "지금 여자프로농구의 수준은 1990년대 실업농구의 40% 수준"이라고 말한다. 40%라는 수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당시의 절반 정도도 안된다는 얘기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그저 한번 스쳐지나간 영광일 뿐이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계기로 한국 여자농구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지금 한국 여자농구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영광에 기뻐하기만 한다면 발전이 있을 수 없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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