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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핸드볼 임오경 감독의 '우생순', 꽃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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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핸드볼 임오경 감독의 '우생순', 꽃길은 없다
  • 안호근 기자
  • 승인 2017.04.10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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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계의 유리천장 현주소(下) ··· 시대는 여성 리더십을 원한다

[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박미희(54) 인천 흥국생명 감독은 여성 지도자로서 팀을 프로 스포츠 사상 첫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범위를 넓히면 선구자가 보인다. 핸드볼 서울시청의 임오경(46) 감독이다.

임 감독은 핸드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실제 주인공. 지난해에는 구기 종목에서 여성 감독으로서 최초로 팀을 우승으로 견인했다.

종전에도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공 사례는 드물었다. 스포츠Q는 선구자적 입장에서 겪었던 고충들, 그리고 여성 리더십에 대한 임 감독의 생각을 들어봤다.

▲ 임오경 서울시청 감독은 지난해 구기 종목에서 여성 감독 최초로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스포츠계 여성 지도자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진=스포츠Q DB]

◆ 편견과의 사투, 한국에서 여성 감독이 맞닥뜨리는 어려움

영화 우생순은 열악한 환경을 딛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감동의 은메달 신화를 이룬 여자 핸드볼 대표팀을 조명한 영화다. 하지만 임 감독이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서 겪은 핸드볼의 세계는 더욱 막막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을 따냈고 세계선수권 최우수선수(MVP), 국제핸드볼연맹 MVP까지 차지한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지만 이런 것들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임오경 감독은 일본 히로시마 이즈미에서 플레잉 감독으로 뛰었다. 임 감독은 “일본에서는 결혼, 출산을 한 이후 다시 복귀할 때도 색안경을 끼는 사람이 없었다”며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없었던 것은 힘들었지만 불필요하게 어울려야 하는 문화도 없었다. 출산 때문에 은퇴를 선언했을 때는 ‘오히려 애 낳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며 가족과 친구 등 의지할 곳이 있어 편할 거라 생각했던 임오경 감독은 예상 외 난관에 봉착한다. 임 감독은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누구도 나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나를 알아달라고 하기 어려웠다”며 “시작도 안했는데 ‘애나 키우지 왜 저기 나와 있나’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편파판정도 알게 모르게 당했다. 돌아서서 울기도 할 정도로 어려움도 따랐다”고 전했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남성들뿐인 문화에 동화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임 감독은 “처음에는 남자 감독들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며 “자기 걸 버리고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힘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 성공의 지름길, 먼저 배려하고 다가가는 ‘슈퍼우먼’이 되라

외로움과 고난의 연속에서 여자라는 걸 후회하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2008년 서울시청의 지휘봉을 잡은 임오경 감독은 우승 문턱에서 두 차례나 미끄러졌지만 결국 지난해 챔피언결정전에서 베테랑 우선희가 버티는 삼척시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후 임오경 감독은 “핸드볼에 남자 감독들밖에 없어서 돌연변이 하나가 태어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꿋꿋하게 버텨 (우승을 하게 돼) 여자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다”며 눈물을 훔쳤다.

편견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스스로 노력하는 길 뿐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무작정 바랄 수만은 없었다. 남성들의 세계로 불리는 곳에서 먼저 다가가는 방법을 택했다.

임 감독은 “나를 위해 모두가 맞춰주기를 바라기보다 한 사람이 다가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며 “일부러 술도 많이 마시면서 함께 어울리는 등 노력했더니 서서히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더라. 이제는 문화가 조금 바뀌어서 다른 감독님들과 커피숍도 가고 가볍게 맥주도 한잔 할 수 있는 문화가 됐다”고 전했다.

이어 “100% 자기에게 맞는 문화는 없다. 상대 문화를 존중해주고 스스로도 많은 부분에 있어 양보해야 한다. 남자들과 같은 선상에 서고 싶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며 “사람들은 내가 바빠서 집안일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반대다. 여자들이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리면 안 된다. 일정이 있으면 그 전에 아이 밥을 챙겨놓고 청소도 하고 그렇게 생활한다”고 강조했다.

인정받는 여성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욱 노력하고 가정에서도 제 역할을 다하는 ‘슈퍼우먼’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임 감독은 “여자로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고 스포츠 세계에서 명장이 되고 싶다면 먼저 노력하고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뭔가를 보여주고 나서야 요구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 임오경 감독은 여성 지도자의 강점으로 선수들을 살뜰히 챙기며 개인적으로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엄마 리더십'을 꼽았다. [사진=스포츠Q DB]

◆ 여성 지도자만의 강점은? 카리스마에 ‘엄마 리더십’을 한 스푼 얹다

박미희 감독은 ‘엄마 리더십’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존 남성 감독들이 아버지와 같이 엄하고 표현에도 서투른 부분이 있었다면 그와 반대로 따뜻하고 세심하게 선수들을 대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임오경 감독도 여성 감독의 강점을 이 같은 부분에서 찾았다. 그는 “(지도자의 길은) 여자가 진출하기에 벽이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며 “저나 박미희 감독이 좋은 성적을 내고 ‘여성 장수감독’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건 시대의 흐름이고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이다. 스파르타 식으로 선수를 지도했던 과거에서는 하라고 해도 내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감독으로서 가져야 하는 덕목, 카리스마는 필수다. 임 감독은 “경기 중 심판들에게 어필할 때,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는 큰 소리도 내야 한다. 부드러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렇다고 남성적인 부분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지도자라면 누구나 ‘강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여성 감독만이 가질 수 있는 선수들을 감싸 안는 부분이 추가된다. 임 감독은 “대부분의 남성 감독들이 못 갖춘 게 있다면 그것은 엄마 같은 따뜻함일 것”이라며 “지도자의 카리스마 위에 엄마와 같은 감성적 성향이 접목될 때 시너지가 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윽박질러 되는 시대는 갔다. 요즘 선수들은 여러 환경적 요건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안한 경우도 적지 않다. 어릴 적 상처 등으로 강한 질책에 트라우마가 있는 선수도 있다. 그런 부분을 섬세하게 챙길 수 있는 게 여성 감독의 장점”이라며 “여자 선수 숙소에도 편하게 들어가고 함께 영화도 보러 다니면서 개인적으로도 벽을 허물 수 있는 건 남성 감독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아직 여성이 헤쳐가야 할 장애물이 많다고 말하는 임오경 감독은 이를 위해 제도 개선이 수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스포츠Q DB]

◆ 여전히 가시밭길인 여성 스포츠인의 길, 개선 방향은?

임오경 감독은 “박미희 감독과 내가 나름 성공 가능성을 내비쳤다고 해서 그걸 부각시키기 위해 ‘꽃길’처럼 보이게끔 말하면 안 된다. 그야말로 ‘오버’다. 이렇게 되기 위해 반드시 매우 많은 희생이 수반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감독의 활약으로 인해 여성 지도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도 많이 생겨났지만 아직은 ‘꽃길’보다는 ‘가시밭길’에 가깝다. 비단 지도자만의 일은 아니다.

임 감독은 “모든 시스템이 운동하는 여자들에게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선수들의 경우 자녀를 출산하면 보통 은퇴를 하게 된다. 이런 선수들을 보면 안타깝다”며 “아이를 낳고도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했지만 그 선수를 편애하는 걸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스포츠 계에도 육아휴직 등이 제대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임오경 감독은 서울시청을 이끌면서 국가대표 전 현직 선수 모임 대한민국 국가대표선수회 사무총장과 대한체육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표선수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스포츠 발전을 위해 행정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향한 공개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임 감독은 “사람들은 내가 라인을 탄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부귀영화도 바라지 않는다. 단지 내가 힘들었던 걸 후배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며 “정치권에서도 스포츠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일에 공감을 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지난 시즌 우승 감독인 임오경은 늘 초심자의 마음으로 겸손을 강조한다. 여성 지도자의 선구자로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다.

임 감독은 “작년에 우승하고 달라진 게 없는데도 자만해졌다고 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기존과 똑같이 하던 행동들도 의식적으로 자제했다”며 “오히려 주변에 더욱 손을 내밀었다. 높은 계단의 정상에 올라섰다고 나를 건방지다고 바라보는 건 싫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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