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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장충단공원(상) 쉼터에서 이준 열사, 사명대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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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장충단공원(상) 쉼터에서 이준 열사, 사명대사를 만나다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4.11.03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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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 유필립 기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수도를 개경(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긴 해는 1400년, 그후로 614년이 지났다.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 역사의 심장부로 자리해온 서울은, 그러나 긴 역사만큼이나 시련과 아픔도 많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왜와 청에 굴욕을 당했고 일제가 강점한 35년동안에는 조선총독부의 소재지였다.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한 이후 1946년 정식으로 서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후 68년이 지났다. 하지만 일제가 범했던 범죄의 흔적과 우리 민족의 아픔은 서울 곳곳에 이름과 유적으로 남아 있다.

장충단공원, 구한말 민족의 한과 열사들의 피끓는 애국심이 머무는 곳

▲ 장충단공원 광장 중앙 부근에서 입구쪽으로 찍은 사진. 장충단비와 정자(장충정)가 보인다.

우리는 오늘도 쓰라린 역사의 상흔들을 무심코 지나치곤 한다. 공원이나 길가 귀퉁이에 외롭게 서 있는 기념비의 의미를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역사 유적지겠거니 여기며 별다른 감흥없이 스쳐가곤 한다. 공원의 이름에 담겨 있는 역사를 캐물으려 하지 않는다.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장충단공원도 그런 곳이다. 국립극장을 가거나 동국대를 방문하려면 아담한 공원이 나타난다. 도로명 주소는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57-10이고 지번주소는 장충동 2가 197번지이다.

▲ 장충단공원 주변 지도. 왼쪽에 장충체육관, 오른쪽에 동국대가 위치해 있다.

 

▲ 지하철 3호선 6번 출구 바로 옆에 있는 장충파출소 벽에 있는 지도. 남산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동북쪽 끝부분에 장충단공원이 있다.

 

▲ 현재의 장충단공원도. 사명대사 동상, 장충단비, 이준열사 동상, 이한응선생 기념비, 수표교 등이 보인다.

장충단 공원은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6번출구로 나서면 바로 만날 수 있다. 현재는 남산공원 장충지구의 일부로 관리되고 있다. 본래는 국립극장, 신라호텔, 서울타워호텔, 자유센타를 아우르는 큰 규모였으나 지금은 조그마한 쉼터같은 공원이다.

▲ 지하철 3호선 6번 출구로 나와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장충단공원이다. 직진하다 왼편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면 동국대 캠퍼스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 장충단 공원 입구 왼편에 있는 안내 표지판이다.

 

▲ '장충단'이라는 이름에는 역사의 아픔이 서려있지만 지금 '장충단공원'은 시민들의 쉼터다.

장충단공원은 대한제국시절이던 고종이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설치한데서 비롯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과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해 마련한 곳이었단다.

하지만 을미사변을 일으킨 세력이 대두하면서 1908년 제사는 중단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32년 중화민국과 일본제국간의 무력충돌 사건(상하이 사변) 이후에는 일본군의 동상이 세워졌고 안중근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도 인근에 세워졌다.

▲ 장충단광장 입구에서 공원 중앙부근을 향해 찍은 사진이다. 중앙에 장충단비가 위치해 있다. 왼편에 멀리 보이는 건물은 신라호텔이다.

광복 후 일본군 동상과 박문사가 철거되고 1959년 청개천 복개공사와 함께 철거된 수표교가 이 곳으로 이전됐다. 1969년에는 영빈관에 있던 장충단비도 수표교 옆으로 옮겨졌다.

현재의 장충단공원에는 장충단비를 비롯해, 수표교, 정자, 사명대사 동상, 이준열사 동상, 이한웅 선생비, 파리장서비, 경로당, 카페겸 한식당 ‘다담에뜰’, 장충파출소 등이 위치해 있다. 장충단공원과 그 주변을 2회에 걸쳐 살펴 본다. (기념비 등의 소개 내용은 현장의 설명문을 기본으로 하였다.)

장충단,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순국한 영령들을 위해 고종이 세운 제단

▲ '장충단(獎忠壇)터'를 알리는 표지석.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이었다.

 

▲ 장충단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다. 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獎忠壇)’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황제가 쓴 것이라고 한다.

장충단비는 을미사변 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장충단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국내부대신 이경징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죽었다.

고종황제는 1900년(광무 4)에 이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세웠는데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다. 1920년대 후반에는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이곳을 ‘장충단공원’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獎忠壇)’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황제가 썼다고 한다.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기리는 것이다.

 
▲ 공원에는 그다지 길지는 않지만 잘 정리된 산책로가 있다. 입구에서 끝까지 크게 세 갈래 길이다.

 

▲ 공원에는 시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벤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 사명대사, 예지력과 불력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위기의 중생을 구제하다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동국대방향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면 사명대사 동상과 마주하게 된다.

사명대사는 조선 중기의 승려로 대사의 속성은 임 씨, 이름은 유정, 호는 승운, 당호는 사명당이다. 서기 1544년 영남 밀양에서 탄생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승군을 조직하고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대사는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정유재란 때는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웠다.

왜적이 물러간 이후인 160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수 천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예지력과 전능한 도력을 지녔던 대사는 처참한 전화 속에서 허덕이는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는데 앞장섰다.

▲ 동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잠시 직진하다 보면 왼편에 남산산책길로 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부분에는 지팡이를 든 사명대사 동상이 우뚝 서 있다.

 

▲ 사명대사 동상 앞쪽으로 내려가는 계단. 장충단비가 서 있는 장충단공원 광장으로 향해 있다.

 

▲ 장충단공원 광장에서 사명대사 동상 쪽으로 찍은 계단의 모습이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창한 유림들이 연서한 서한

▲ 장충단공원 끝부분 우측에는 일제와 맞섰던 순국선열을 기리는 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첫번째 만나는 비석은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은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서한을 파리장서(長書)라고 부른다.

파리장서는 일제의 힌국 주권 찬탈 과장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창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파리장서 운동에는 광범한 유림층이 참여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영남, 호서, 호남의 유림이 서명에 참가하였다.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해외로 파견되엇던 이는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다. 그는 파리장서 운동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서명자 규합과 파리장서 문인 작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 장서는 상해임시정부 파견 대표자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다.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을 체포 투옥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를 제1차 유림단사건이라고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이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일성 이준 열사, 자결로 세계만방에 대한독립의 정신을 알리다

 

이준 열사는 1859년 1월21일(음력 1858년 12월28일)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에서 태어났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898년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1904년 대한보안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획득을 저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하고 친일적인 대신들을 규탄하는 등 애국계몽 운동에 힘썼다.

▲ 이준 열사 동상이 의연하게 서 있다. 열사는 일제의 부당한 침탈을 세계 열강에 호소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했다.

이준 열사는 1907년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로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령을 받고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하여 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공개하여 세계 언론에 여론을 환기시켰다.

각국의 언론들이 협조적인 데 비해 열강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분개한 열사는 통탄하다가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할복 자결함으로써 세계만방에 대한독립의 정신을 강력하게 심어주었다.

▲ 이준 열사 동상 뒤편에 설치된 부조물과 조각. 선조들의 독립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순국 열사 이한응 선생, 세계에 억울함을 호소한 구한말 외교관의 표상 

조선 말기의 외교관이다. 관립영어학교 출신으로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 통정대부, 서리공사가 되었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또한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영일동맹으로 한국정부의 지위가 떨어지자 이를 개탄하며 음독자살하였다. 이후 장충단에 배향되었다.

 
▲ 이한응 선생 기념비. 장충단공원 맨 끝 부분 우측에 위치해 있다.

◆ 시민들의 쉼터로 건강함을 제공하는 장충단공원 

▲ 장충단공원 우측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장충경로당.

 

▲ 장충경로당 옆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시대를 초월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지난 9월에 촬영했기 때문에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다.

 

 
▲ 경로당 옆에 설치된 지압도로와 지압점을 새긴 발 모양 대리석.

 

▲ 경로당 앞에 있는 운동시설.

 

▲ 장충단공원 한 켠에 마련된 게이트볼 장에서 노인분들이 경기에 열중하고 있다.

 

▲ 게이트볼장 옆에 있는 남산 산책로 입구 계단.

 

▲ 소형 초가집 형태로 공원 관리에 쓰는 삽과 빗자루 등을 걸어놓은 모습은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원관리원의 센스가 돋보였다.

 <다음 주에 계속>

[유필립의 Walking History] 장충단공원(하) 류관순 동상과 청계천 수표교가 이사한 이유 도 함께 보세요^^

 

philip@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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