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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인생 스토리⑤ LA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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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인생 스토리⑤ LA로 떠나다!
  • 배선영 모델 겸 스타일원미 대표
  • 승인 2014.11.0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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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69cm의 모델치곤 아담한 키. 평범했던 울산 소녀의 꿈 많은 상경. 잡지모델 데뷔, 온라인 쇼핑몰 성공, 뉴욕 런웨이 도전과 6년간의 미국 활동, 귀국 후 스타일링 디렉터로 활동하기까지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  모델 출신인 배선영 스타일원미(www.style1.me) 대표의 범상치 않은 약력입니다.

배 대표는 작은 키 때문에 국내 무대에 서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뉴욕과 LA 런웨이에 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도 맛봤지만 세계의 높은 벽도 실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Q는 '도전의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패션 모델을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배선영 대표의 '뉴욕 런웨이 도전기'를 연재합니다. 국내 또는 뉴욕의 런웨이에 서기 위해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배선영 모델 겸 스타일원미 대표] 2006년 25세가 되던 해, 1년 반 전 '낱장 옷 장사'로 시작한 사업은 직원 6명과 아르바이트 3명을 고용하며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나갔고, 월 매출 1억 원은 거뜬히 넘는 의류 사업체로 자리잡아 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하루 하루 매출은 늘어 갔고, 나한테 사업적인 자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때이다. 그러나 '성공은 가장 멍청한 스승이고 실패는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라고 했던가…

어린 나이에 또래 친구들 보다 조금 더 빨리 올라가다 보니, 돈의 양면성을 몰랐던 것 같다.

▲ LA 시절, 셀프 카메라로 촬영한 피팅 사진이다. 렌즈를 바라보며 한 손에 든 리모콘으로 찍었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쇼핑몰을 시작하기 전에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정도 사업의 매출이 좋아지니 어린 나이에 ‘B 사’ 외제차를 타고, 여성 슈퍼스타가 다니는 청담동의 값비싼 스킨 케어숍에서 마사지를 받고, 고가의 브랜드 옷에, 명품가방을 들고 다녔다. 유명 호텔 상속녀인 패리스 힐튼이라도 된 것처럼….

모델 일이 있으면 외제차를 끌고 촬영장에 가고, 또 CF 촬영을 하는데 감독이 나보다 다른 여자모델을 더 대우 해주면, ‘이 까짓 거 안 해도 먹고 살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집에 온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철이 없었던 철부지였다. 그런 시절을 살고 있었다.

그때 쇼핑몰 사업을 통해서 배운 것도 많지만 잃어버린 꿈도 있었다. 함께 모델을 하던 친구들은 배고픈 시절을 겪고 유명 배우 또는 방송인이 되었지만, 나는 아쉬움이 없었기에 그 힘든 길을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쇼핑몰이 잘 될수록 고민도 많아졌다.

모델인 내 사진을 도용해서 오픈 마켓에 같은 옷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해커들은 쇼핑몰 광고를 해주겠다며 접근해서 ‘러브베베’ 접속자들의 컴퓨터에 악성코드를 심어 쇼핑몰의 이미지를 하락시키기도 했다.

제품 한 가지당 사진을 찍어서 업로드만 하면 100장은 기본적으로 판매되었으니, 사업 초기에 나를 무시하던 동대문 상인들은 서로 샘플이라며 제품을 사무실로 보내 주기 바빴고, 혹은 ‘러브베베’ 상표를 붙여서 줄 테니 자체 디자인으로 판매하라고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초심을 잃어 가며 옷장사의 기본인 동대문 사입에 소홀해 지고 있었다.

다른 쇼핑몰들과 비교되는 동대문 디자인이 싫어서 내가 운영하는 쇼핑몰에서만 판매를 하고자, 히프에 프릴이 달린 디자인을 해서 트레이닝복 제작을 한 적이 있다.

디자인과를 졸업한 친구와 함께 원단을 구입하고 공장을 찾아가 제작을 의뢰했다. 너무 예쁘게 제작이 되었고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며칠 안에 반품되는 물량이 증가했다. 나는 500만 원어치의 제품이 고스란히 쓰레기가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고객들이 옷을 입었는데 엉덩이 부분이 다 뜯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제작 후 물건 확인도 하지 않고 공장에 결제를 해주었는데, 소매 장사만 하던 아이가 도매 상인 흉내를 내다 된통 당한 것이다. 의류 생산 시스템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의욕만 앞서 덤빈 결과였다.

한참 후에 그 제품이 뜯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생산 공장에서 다이마루 원단에 맞는 바느질을 해야 하는 옷에, 직기 원단에 쓰이는 바느질로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고였는데, 너무 오래 지나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때 또 난 500만 원의 큰 돈을 들여 인생경험을 하게 된 것 같다.

▲ LA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 붐 바이 조이 한(Voom by Joy Han) 런웨이 모습이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누구나 팔 수 있는 동대문 제품을 판매하다 보니 새벽부터 고생해서 물건 사입과 코디 후 업로드해 판매하는 모든 노고가 헛수고로 돌아가는 날도 많았다.

자체 제작을 시도해 보았지만 경험 없는 나는 실패를 하게 되었고, ‘외국에서 수입하면 나만 그 아이템을 팔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자주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모델라인’ 동기 중 친했던 친구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외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 친구와 안부를 주고 받다가 내가 미국에 가고 싶다고 하니 선뜻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미국에 가도 되는 것일까?’ ‘영어도 못하고 어리지도 않은 나이에… 고생만 하는 것 아닐까?’ ‘여기서 쇼핑몰을 계속 운영하면 나는 돈을 계속 잘 벌수 있는데…’

며칠 동안 수 만가지 생각이 나를 가로 막았다. 주위에서는 ‘잘되고 있는 쇼핑몰을 왜 닫냐’ 며 만류했다. 외국에 한번 가보라고 용기를 심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해보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작정 덤비고 싶었다.

평소 나는 참 긍정적이다. 그때도 LA에 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단 며칠 만에 결심을 굳힌 후 미국 LA 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일주일 만에 사무실을 정리하고 한 달 동안 국내 여행을 다녔다. 친구들과 남해 여행도 갔으며,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어릴 적 살았던 동네와 초등학교 등 추억의 길을 따라서 향수에 젖기도 했다.

그러나 직원들에 대한 뭉클함은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아직 부족한 어린 나이의 사장이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 데 따른 미안한 마음이 가슴 한 켠을 짓눌렀다. 그런데 오히려 직원들이 위로해 줬다. 지금도 그때 흘린 눈물을 잊지 못한다.

아직도 가끔 그때의 직원들과 안부를 묻곤 하는데, 한 명은 내가 뉴욕에 모델 일을 하러 갔을 때 32번가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났으며, 또 한 명은 귀여운 쌍둥이 엄마가 되어 있고, 또 한 명은 예쁜 딸을 키우고 있다.

우리는 다 어렸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다 어른이 되어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모르겠다.

한 달 간 국내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 쇼핑몰 사이트도 문을 닫았다. ‘미국에 건너가 바로 사입해서 유니크한 제품을 독점 판매해야지!’라는 생각에 너무 신이 났었다.

▲ LA 중앙일보에 게재됐던 기사다. 당시 미국의 이베이를 비롯한 온라인 쇼핑몰의 의류는 모델 착용컷이 없었고 마네킹 피팅컷이나 제품만 찍어 올렸는데, 사람이 직접 입고 업로드한 내 쇼핑몰이 특이해 금방 소문이 퍼졌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2006년 8월22일, 나는 LA 행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그때는 한창 패리스 힐튼이 자주 입는 J 트레이닝 웨어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LA 공항에 도착한 나는, 핑크색의 트레이닝 웨어를 입고 하얀색 선글라스에, 뽀글뽀글 파마머리, L사 명품 백을 들고 화려하게 입국장을 나설 채비를 했다.

관광비자 체류기간이 6개월이었기 때문에, 6개월은 미국에서 지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갈 참이었다. 이민가방 두 개와 트렁크 하나를 끌고 공항을 빠져 나가는데, 세관에서 나를 붙잡았다.

멀리서 봐도 나는 튀는 복장에 젖소무늬 이민가방 한 개, 무지개 무늬 이민가방 한 개를 끌고 나가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눈에 띄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튀었는지 모르겠다.

첫 미국행에 들뜬 나머지 공항패션에 지나치게 신경쓴 탓이었다. 이민국에서는 내가 장사를 하러 온 사람 같다며 2차 검색을 했고, 내 가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가기 전 새로 산 옷들과 신발들은 그들이 보기에 오해할 만했으며, 쇼핑몰을 다시 운영하고자 가져 간 택건(종이 택을 옷에 꽂는 총)이 문제가 되어 이민 가방 두 개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3~4시간 동안 친구는 공항 밖에서 나를 기다렸고, 나는 가방을 모두 빼앗긴 채 미국 땅을 처음 밟아야 했다.  그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첫날은 LA 시내로 가서 짐을 풀고, 둘쨋날부터는 짐을 다 빼앗겨 입을 옷이 없으니 쇼핑만 하러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은 브랜드로 H브랜드, A브랜드, S브랜드 등이 있었는데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한국에 없는 아이템들을 구입해 착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행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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