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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카트' 염정아, 날카로운 이미지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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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카트' 염정아, 날카로운 이미지의 반전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11.05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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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이상민기자] “이 영화의 소재인 노동문제가 민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오로지 이야기가 너무 재밌고 감동적이라서 꼭 연기하고 싶었죠. 캐릭터에만 몰입하며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해서 내가 느낀 감동을 관객에게 전달할지에 치중했어요.”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뜨거운 싸움을 다룬 ‘카트’(11월13일 개봉)에서 계약직 계산원 선희(염정아)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더 마트’ 입사 후 5년 동안 벌점 한번 없이 성실하게 일해와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둔 상태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로부터 일방적인 계약해지 통보를 받는다. 소극적이던 그녀는 등 떠밀려 혜미(문정희), 순례(김영애)와 함께 노조원을 대표해 사측과 맞서며 처음으로 부당한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선희는 동료들과 친분 없이 자기 일만 하면서 하루하루 살기 바빴던 사람이에요. 사춘기 고교생 아들 태영과도 껄끄러운 상황이고. 그런 선희가 사측의 해고 통보를 계기로 동료들과 화합하며 여자들의 우정, 그룹의 에너지를 느끼게 돼요. 아들과도 화해하죠. ‘카트’는 엄마와 아들, 둘 다 성장하는 얘기이기도 해요. 내가 두 아이의 엄마이기에 더욱 와 닿았어요. 그게 뭔지 아니까.”

평상시 마트를 자주 이용하는 주부 염정아(42)는 하루살이 목숨인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고객을 응대하는 감정노동자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몰랐다. TV 뉴스에 거론되면 “저런 일이 있구나”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에 참여하며 부지영 감독으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실제 사례들은 영화보다 훨씬 강도가 셌다.

“당장 내 생업에만 종사해도 식구들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 힘든 상황인데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걸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요. 이젠 그분들이 남 같지 않게 보여요. 일부러 친절하게 대하진 않지만 시선이 많이 가고, 힘든 일은 없으실까 살피게 되더라고요.”

◆ 수줍고 평범한 마트계산원 선희, 노동현장의 선봉에 서다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염정아는 위축된 아줌마의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악한다. 쉴새없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연장근무 요구에 토 다는 법 없이 묵묵히 따른다. 틈틈이 휴대전화로 집에 있는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제때 아들 태영(도경수)의 급식비를 입금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토로한다. 매사에 쭈뼛쭈뼛,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는 선희의 모습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자의 형상으로 마음속을 파고든다.

“초반에 선희가 더 평범하고, 기죽어 있고, 음지에 있어야 나중에 그의 변화나 성장이 더 크게 느껴질 거라고 여겼어요. 키가 커서 구부정하게 있고, 부스스한 파마머리에 화장기 없는 거친 얼굴, 기미 낀 모습을 연출했어요. 실제 마트 캐셔 분들은 예쁘게 하고 계시는데 약간 극대화했죠. 너무 깔끔하면 저의 기존 이미지랑 겹칠 거 같아서요. 다행히 그 무렵에 살이 3kg 정도 쪄서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었어요. 관객의 눈에 억지스럽게 보였다면 내가 연기를 잘못한 거고, 자연스럽게 보였다면 계산을 잘 한 거겠죠.”

 

노조의 집행부를 맡게 되면서 조금씩 선희는 변화한다. 그런 변화의 지점을 염정아는 호흡조절을 하며 그려낸다. 꼼수를 부리는 사측을 향해 “저 생활비 벌러 나와요, 반찬값 아니고”라며 당당하게 말한다. 노조원들의 파업이 지리멸렬해지는 순간, 홀로 매장에서 확성기를 든 채 수많은 고객들을 향해 해고무효 투쟁의 정당함을 알리는 ‘투사’로 변모한다.

“부단히 만남을 요구하는데 이마저 거부하는 사회를 향해 한마디라도 해야겠다싶어 확성기를 들게 되죠.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가면서 ‘인간대접 해달라’고 말하는데 마지막 촬영 부분이었어요. 평소 앞에 나서서 목소리를 내보지 못한 사람은 선희처럼 ‘여러분~’ 할 수밖에 없을 듯해요. 막 슬펐어요. 누가 수줍고 아무 것도 모르던 아줌마가 저렇게 나서도록 만들었지 싶어서요.”

◆ 선희 감정선 유지하며 절제하는 게 관건

후들후들 떨리던 목소리로 ‘여러분~’을 외치던 선희는 한겨울, 노조원들과 함께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카트를 밀며 자신들의 일터이자 꿈을 이뤄가던 공간인 매장을 향해 한발 한발 전진한다. 격렬하게 싸우는 와중에도 염정아는 결연한 표정을 얼굴 가득 담아낸다.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게 힘들었어요. 선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올까봐 매 커트, 연기를 어떻게 해야할 지가 고민이었죠. 내가 몰입하지 않아서 순간 염정아가 나오면 절대 안 되니까요. 한 컷이라도 놓치면 감정선을 따라갈 수 없는 인물이었어요. 일부러 연기하면 안 되고 자연스러워야 해서 항상 선희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려고 했어요. 선희는 자기 감정을 모두 그러내서 울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유지하고 누르는 게 쉽지는 않았죠.”

 

억울해하는 아들을 대신해 편의점 사장한테 “누가 그래요? 일수 채우지 못하면 월급 안줘도 된다고?”라며 일갈하는 장면은 아들의 이야기이자 선희의 이야기이기도 해 중요했다. 너무 힘을 줘서 찍었기에 나중에 편집실서 본 뒤 아쉬움에 재촬영까지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두 불행한 건 아니겠지만 관객들께서 이런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분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아무런 해결책도 없는 상황이라는 걸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응원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 제작자 감독 배우 모두 여성...아이돌스타 도경수와 호흡 등 '특별한 경험'

‘카트’는 배우 염정아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소재도 그렇거니와 여성 군단이 제작(명필름의 심재명 대표, 부지영 감독)한 영화이며 최고 인기 아이돌 스타와 모자 연기를 한 첫 번째 작품이다. 그러다보니 재미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자들끼리 모이면 더 조심하는 게 있긴 해요. 내키는 대로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 입을까봐 배려하는 거죠. 저도 예전에 남자 감독들한텐 할 얘기 다했는데 이번엔 조심했어요.(웃음) 여배우들이 모여 있다 보니 기들이 장난 아니었어요. 전 김영애 선생님 등을 모시며 있었는데 젊은 애들이 모인 분장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춤추고 노래하고 덤블링하고 그 기간 동안은 정말 조합원들 같았죠. 문정희는 연기를 잘 해서 궁금했던 배우예요. 함께 공연해보니 저와 코드도 잘 맞아요. 밝은데다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정도예요. 같이 있으면 즐거워서 촬영 후에도 자주 보게 돼요.”

 

극중 선희가 반항하는 태영의 뺨을 한 대 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 도경수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전혀 몰랐다. 엑소의 리드보컬이자 막강 팬들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았다면 어려워했을 텐데 몰랐기에 일반 신인 대하듯 “경수야~”라고 부르며 지냈다. 염정아는 뺨 때리는 장면에서 “안 아프게 한 번에 끝냈고 곧바로 사과했다”며 극구 강조한 뒤 “여러 차례 때린 편의점 사장이 있으니까 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고 슬쩍 책임전가를 했다.

“아들과 소통하는 신에서 가장 울컥했어요. 각자 성장을 겪은 뒤 식탁에 마주앉아 있는 상황에서 아들이 엄마한테 손 내밀며 자신이 힘들게 번 알바비를 건네줘요. ‘아빠한텐 말하지 않았다’는 위트 있는 말을 하는 아들을 안아주는 커트를 여러 번 찍었는데 할 때마다 북받쳤던 기억이 나요. 지금 봐도 그 장면은 감상이 진하네요.”

◆ 미스코리아 선으로 출발…'날카롭고 불안한' 독보적 이미지 구축

1991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선배인 오현경과 고현정, 후배인 이승연 모두 ‘미스코리아’라는 멍에 아닌 멍에를 떨쳐내고 연기자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염정아는 흔치 않은 이미지를 지녔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같은 날카롭고 불안한 이미지는 그만의 독보적인 색깔이다. 2003년 김지운 감독의 공포영화 ‘장화 홍련’과 이듬해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에서 이런 이미지를 최대치로 증폭한 팜프마탈 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4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깐깐하고 도도한 도시적인 시크함을 풍기는 이 여배우는 안방극장에서도 여전히 포스를 발산한다. 드라마 ‘로열 패밀리’의 순종적인 며느리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부활하는 캐릭터, ‘내 사랑 나비부인’ ‘네 이웃의 아내’의 코믹과 진지함을 순식간에 오가는 감정변화를 탁월하게 소화하며 명배우의 입지를 굳혔다. 최근에는 케이블채널 스토리온의 ‘트루 라이브쇼’의 진행자로 색다른 변화를 꾀하고 있다. 영화는 2012년 ‘간첩’ 이후 오랜만의 출연이다.

 

“‘장화 홍련’을 작업할 때 무척 재밌었어요. 제 얼굴의 느낌이 예민한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색깔 있는 캐릭터에 끌리고요. 평상시엔 그런 역할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니까 재밌죠. 평범한 거는 좀 별로...전 제가 하고 싶은 캐릭터와 이야기에 집중해서 작품을 선택해요. 대신 영화든 드라마든 할 수 없는 상황이면 금방 포기해버리죠. 하나라도 맞질 않으면 ‘내거 아니다’ 판단하는 거죠. 예전엔 쉬지 않고 일해서 잘 몰랐는데 어떤 역할을 기다리는 게 좋아요. 좋은 대본 받았을 때 큰 선물 받은 듯하거든요.”

그런 마음의 변화는 서른을 넘어갈 때쯤 이뤄졌다. 욕심을 내면 분명히 실망이 따라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일이 생기면 기분 좋은 것이고, 아니어도 할 수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임을 깨닫게 됐다. ‘잡고 있는 게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한다면 놔버리자’라는 무소유의 생각으로 오늘날까지 버티고 있다.

◆ "좋은 엄마되고 싶기에 사회현실에 관심 많이 가질 것"

“어쩔 땐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갔지 싶어 서운하고 쓸쓸한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똑같은 거겠죠. 지금은 잘 사는 거에 치중해요. 육아와 촬영에 온힘을 들이죠. 토크쇼 출연은 ‘이렇게 단조롭게 살면 애들한테 뭘 가르치지’ 싶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서 출연하게 됐는데 다행히 너무 재미있네요. 전현무씨 등 출연진과도 정이 많이 들었어요.”

염정아는 영화 ‘카트’ 출연 이후 자신이 크게 바뀌진 않겠지만 현실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데 좋은 엄마가 되고 싶기에 앞으로 더욱 노력을 많이 해야 할 듯하다고 강조했다.

 

[취재후기] 과거 자신이 출연했던 작품들 속 캐릭터를 언급하는 순간 “그 나이여서 잘했던 거 같다”며 “지금은 목소리, 얼굴, 느낌이 다 달라져서 중년 여배우 메릴 스트립의 ‘맘마미아!’의 연기를 보면서 새로운 꿈을 꾼다고 말했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과거엔 전혀 하지 않던 운동과 더불어 즐겁고 행복하니까 얼굴이 미워지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염정아에 대한 관계자들의 중평은 이미지와 달리 ‘털털하고 시원시원하다’이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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