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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노벨상 수상자 류샤오보 사망, 그는 왜 끝내 해외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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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노벨상 수상자 류샤오보 사망, 그는 왜 끝내 해외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나?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7.07.1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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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중국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가 13일(한국시간) 간암 말기로 투병 중 사망했다고 AP통신, 뉴욕타임스, CNN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향년 61세였다.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사법국은 이날 인터넷 홈페이지에 발표한 성명에서 "병원에서 간암 치료를 받아온 류샤오보가 복합장기부전 증세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잘나가던 학자인 류사오보는 텐안먼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중국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류샤오보는 공산당 일당독재 철폐를 요구하는 '08 헌장' 서명을 주도했다가 국가전복 선동 혐의로 2009년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2010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는 지난 5월 간암 4기 진단을 받고 가석방 상태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그의 지지자들과 미국과 독일 등 서방은 류샤오보가 해외에서 치료를 받도록 허용하라고 중국 정부에 촉구했으나 중국 정부는 "최선의 치료를 받고 있다"며 이같은 요구를 거부했다.

류샤오보는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비판하고 자유와 민주의 존중을 요구 2008년 12월 발표한 선언문 '08 헌장'의 기안을 주도했다. 그는 해외에서 치료를 희망하고 있던 만큼 허가하지 않았던 중국 정부는 국제 사회의 비판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55년 중국 지린성 창춘시의 한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베이징 사범대에서 석사졸업 이후 강의를 시작했고, 4년 뒤 해당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1989년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하와이대학 등에서 방문학자 생활을 하면서 학자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류샤오보는 1989년 텐안먼 시위를 통해 '반체제 인사'로 거듭났다. 시위 초기 그는 홍콩 밍바오 등 언론에 관련 기고문을 보냈고, 5월부터는 텐안먼 광장에서 벌어진 단식농성에 동참했다.

6월 4일 시위가 유혈진압된 이틀 뒤 그는 반혁명 배후로 체포돼 조사를 받았고 9월 공직에서 해임됐다. 1991년 1월 베이징중급인민법원에서 반혁명죄로 재판을 받았지만 농성 막판에 학생들이 텐안먼 광장을 떠나도록 설득했다는 이유로 형사적 처벌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류샤오보는 그 이후에도 베이징에서 독립평론가로서 정부를 비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고, 인권 운동에 참여했다. 1995년 2월 12명의 인권 운동가와 함께 '텐안먼 시위' 관련 호소문을 발표했다가 약 1년간의 가택연금 처벌을 받았다. 1996년 10월 10일에는 ‘쌍십선언’을 발표하면서 결국 3년간의 노동교화형을 받았고, 1999년 10월 출소했다.

2008년 12월 유엔 인권헌장 발표 60돌을 맞아 내놓은 ‘08 헌장’은 류샤오보가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전환점이 됐다. 그는 300여 명의 중국 지식인들과 함께, 체코 반체제 인사들의 '77헌장'을 모델 삼아 중국의 언론자유, 인권 및 선거 자유 등을 촉구하는 헌장을 발표했다. 1만3000명이 해당 헌장을 지지하는 서명에 동참했다.

류샤오보는 헌장 발표 이틀 뒤 체포돼 또 다시 1년간의 가택연금 조치를 받았다. 이어 2009년 6월 23일 국가권력 전복 선동 혐의로 정식 체포됐고 그해 12월 25일 그에게는 징역 11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2010년 2월 베이징고급법원은 그의 상소를 기각했고 그해 5월부터 랴오닝성 진저우 감옥에서 복역했다.

류샤오보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사회 요구가 강해지면서 2010면 1월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 달라이라마, 데즈먼드 투투 주교 등이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 결과 같은해 10월 8일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당시 노벨상 수상위원회는 “그는 중국 인권 개선을 위한 광범위한 투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중국에서 기본적인 인권을 위해 길고 비폭력적인 투쟁을 벌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중국 외교부는 내정에 대한 난폭한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해 12월 10일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는 류샤오보는 물론 아내 류샤도 참가하지 못했다. 시상식을 앞두고 당국이 류샤는 물론 친구들까지 뚜렷한 법적 근거 없이 가택에 연금함으로써 대리 수상의 길을 차단했다.  

올해 6월26일 류샤오보의 변호사인 모샤오핑은 "류씨가 지난달 23일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며칠 후 풀려났다”며 “선양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 저서 '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를 통해 본 그의 주장

'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지식갤러리, 2011)는 중국 노벨상 수상자인 류사오보가 ‘08 헌장’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중국 공안국에 체포되기 전까지 20년에 걸쳐 인터넷과 잡지에 기고한 내용을 담고 있다. ‘08 헌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8년까지 중국 공산당의 1당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1장 ‘중국의 정치를 말하다’에서는 마오쩌둥부터 후진타오까지 공산당 독재정권의 모순과 심각성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2장 ‘중국 사회와 문화를 말하다’에서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중국의 문화계에 독설을 날린다.
 
3장 ‘중국과 세계를 말하다’는 대국굴기의 배경과 홍콩, 마카오 반환 후 인권문제, 티베트의 인권문제 등을 다룬다.
 
4장 ‘중국의 민주화 운동을 말하다’에서는 류샤오보와 동료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 관련 내용과 법원에서의 자기변호, 최후 진술 등 민주화를 향한 자신과 사회 각층의 노력을 기록했다.
 
5장 ‘류샤오보를 말하다’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담긴 자작시, 세 번의 수감생활 동안 눈물로 옥바라지를 한 아내 류샤에게 바치는 시 다수가 소개된다.

▲ 텐안먼 사태(천안문 사건)

텐안먼 사태는 1989년 6월4일, 후야오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텐안먼 광장에서 발생한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6·4 텐안먼 사건, 6·4 사건, 텐안먼 사태, 베이징 대학살 사건 등으로도 불린다.

당초 공식 발표에 따르면 텐안먼 사건으로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했으나 5000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후 중국 공안부는 1990년 7월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텐안먼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만4550명이었으며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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