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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인생 스토리⑦ 실패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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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인생 스토리⑦ 실패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 배선영 모델 겸 스타일원미 대표
  • 승인 2014.11.1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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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69cm의 모델치곤 아담한 키. 평범했던 울산 소녀의 꿈 많은 상경. 잡지모델 데뷔, 온라인 쇼핑몰 성공, 뉴욕 런웨이 도전과 6년간의 미국 활동, 귀국 후 스타일링 디렉터로 활동하기까지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  모델 출신인 배선영 스타일원미(www.style1.me) 대표의 범상치 않은 약력입니다.

배 대표는 작은 키 때문에 국내 무대에 서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뉴욕과 LA 런웨이에 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도 맛봤지만 세계의 높은 벽도 실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Q는 '도전의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패션 모델을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배선영 대표의 '뉴욕 런웨이 도전기'를 연재합니다. 국내 또는 뉴욕의 런웨이에 서기 위해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배선영 모델 겸 스타일원미 대표] 지난 번 말미에 전했듯이 자바시장의 거래처로부터 샘플을 제공받게 돼 신상품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높은 비용을 부담하지 않게 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또 한가지 행운은,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던 F브랜드, U브랜드 같은 유명 제품들이 모두 자바시장의 디자인이었다.

▲ LA에서 쇼핑몰 운영이 안정을 되찾으면서 미국 곳곳을 여행할 여유도 생겼다. 때로는 서부극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LA에서 처음 쇼핑몰을 운영할 때 그 브랜드 제품들을 판매했는데 가격이 높아 반응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바시장에서는 도매 가격으로 사입이 가능해지면서 가격 경쟁력이 생겼다.

그래서 한국에서 운영하는 구매대행 쇼핑몰의 판매 가격보다 소비자에게 절반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으며, 가격과 퀄리티에 만족하는 고객들이 많아서 자주 대박을 쳤다.

한번은 U브랜드의 크로셰 원피스를 판매했다. 고객들의 예약을 받고 거래처에 주문을 넣은 뒤 2주 후 입고가 되었는데 허리천 벨트의 색상이 달랐다. 오렌지 색상의 천벨트로 피팅 사진을 찍었는데, 청록색의 천벨트로 제작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한 끝에 오렌지색 천벨트를 들고 LA 패션 지구의 원단 가게 수십 군데를 돌아다니며 같은 컬러의 원단을 구하러 다녔다. 그리고 재봉틀을 구입해서 수십 장의 오렌지색 천벨트를 재단하고 며칠을 밤새 만들었다.

한국에서 처음 쇼핑몰을 운영할 때 사진과 똑같지 않은 비슷한 제품을 고객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영향으로 그 고객들의 재구매가 이어지지 않았던 실패 경험이 있다.

'온라인 쇼핑몰 상품은 사진과 똑같아야 한다.'

열심히 밤낮으로 일한 결과, LA에 가서 몇 개월 되지 않아 자리를 잡아 갔고, 오전 시간을 이용해 랭기지 스쿨(어학원)에 등록해서 다녔다.

기초가 부족했던 나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고, 비즈니스도 잘되면서 이곳저곳 여행도 다닐 수 있었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키우던 개를 데리고 비치에 가서 서핑과 선탠을 하며 미국 생활을 즐겼고, 한국과 다른 자유로움을 맛보고 패션을 공부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 저멀리 흰눈에 뒤덮인 산을 배경으로, 키우던 애완견 '참치'와 걷던 여행길은 지금 봐도 낭만적인 기분이 든다. 그때는 아무런 걱정도 없었던 것 같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그 생활이 자유로워 보였는지, 내가 모델로 활동했던 ‘ㅇ 잡지사’ 에서는 '해외 통신원' 이라는 직함을 주며 미국 생활을 잡지사에 싣자고 제안했다.

한동안 ‘해외 통신원’ 으로 미국의 풍경들과 패션을 소개하며 쇼핑몰의 홍보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쇼핑몰이 잘되어 가고 자바시장 근처에 넓은 사무실도 냈으며, 직원들도 고용했다. 도매 사이트도 만들어 미국의류 수입을 원하는 한국 소매업자들에게 유통했으며, 나날이 사업은 발전해 나갔다.

그러던 중 사업 확장과 비자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미국 법인을 설립했다. 한국과 미국에 이중으로 세금을 내면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국과 미국은 이중과세방지 협정이 맺어져 있어 앞으로 살아갈 미국에 법인 설립을 하여 사업체의 모든 중심을 미국 스타일로 구상하고 바꿔 나갔다.

쇼핑몰 사이트는 영어로 개편했고, 원화에서 달러 결제 시스템으로 바꾸면서 환율에 따라 가격이 변동되게 하였다. 미국 법인 설립 후 세금을 미국에 내므로, 미국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변화하였다.

▲ LA 시절, 한 잡지에 해외통신원으로서 소개한 페이지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그러나 이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미국은 카드 결제시 할부도 되지 않았고, 영어 문구에 익숙치 않은 한국 고객들은 구매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고객들의 클레임이 계속되었다.

‘고객은 왕이다’ 라는 말을 무시한 채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나’ 중심으로 일을 진행시킨 결과였다.

2008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율이 1600원대까지 치솟아 모든 제품의 가격이 환율에 맞춰서 상승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의 소비자들은 외면해 줄줄이 사이트를 떠났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쇼핑하기에 불편한 데 뭐 하러 이곳에서 구입을 하겠는가…

나는 2004년부터 이루어 놓았던 모든 것이 2008년쯤 물거품이 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순조로운 삶에 취해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한 탓이었다. 어린 나이에 쇼핑몰 사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요인은 예쁘고 유니크한 아이템보다는 신뢰가 바탕이 된 진실된 자세로 고객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세계의 중심인 미국의 경제는 점점 악화 되어 갔고 환율은 안정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일어설 날을 기다리고 노력했지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달, 두 달… 또 몇 달 동안 일을 하지 못하고 지출만 계속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모아놓은 돈은 점점 바닥이 보였고, 생활비가 비싼 미국에서 실업자의 신세가 되어 이러다 집도 절도 없는 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바닥을 치게 되었다. 가지고 있는 무역 비자로는 미국의 회사에서 일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패션지구에 있는 패션업체 중 가장 거래가 많았던 곳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 고 대표님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 양떼가 풀을 먹는 평화로운 풍경이 한폭의 그림 같다. 여유로울 때 일수록 꼼꼼히 준비해야 하는데…. LA에서 잘나가던 쇼핑몰 운영에 머지않아 먹구름이 몰려왔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나는 지금 사업이 망하였고 당장 일을 해야만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회를 주세요.”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뀌게 된 나는 미팅에서 솔직히 말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모델, 쇼핑몰 운영, 사진', 이 세 가지였다. 여태껏 그 일만 하면서 살아 왔고, 내가 잘하는 재능을 살려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거의 특채로 입사가 되었다. 대표님은 그 동안 거래 실적을 바탕으로 나를 신뢰해 주셨고 내게 할 수 있는 일을 주신 것 같았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VMD로서 쇼룸 코디, 스타일링과 온라인몰 관리’ 였다. (*VMD (VISUAL MERCHANDISER)는 브랜드 콘셉트에 맞춰 제품을 전시, 매장전체를 꾸미는 직종을 일컬음.)

내가 다 할 수 있고, 자신 있는 일이었다.

잡지모델이었던 나는 회사를 다닌 적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자영업을 하느라 혼자 머리 싸매고 힘들게 꾸려 나갔던 일을 이제 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하니 잠시나마 머리를 쉬게 하는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회사에 출근하고 제품을 촬영해서 온라인 몰에 업데이트 하며 관리하고….

VMD로서 매주 월요일과 새로운 상품이 입고되는 날 마네킹 코디를 바꾸고 전체적인 쇼룸 내부 스타일링을 했는데, 매주 새롭게 출시되는 디자인과 또 나의 스타일링으로 인해 판매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정말 뿌듯했다.

반복되는 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연봉이 높아서 그런지 나름 편한 삶이 다행스럽게 느껴진 해였다.

▲ 마른 풀에도 생명은 솟는 법. 나는 위기상황이나 단조로움을 만나면 도전 정신이 샘솟는다. LA에서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는 동안 차츰 모델의 꿈이 되살아 났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당시 그 회사의 온라인 몰은 제대로 관리 되지 않아 매출이 5000불(50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가 입사하고 관리한 후부터 월 3만불(3000만원)을 넘어 섰고, 자연히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디자이너와 함께 의류 디자인에도 참여하면서 생활은 바빴지만 이 회사의 구성원으로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 회사를 다니면서 심리적으로 안정될 때쯤, 내가 운영했던 쇼핑몰을 살려보고자 샘플을 빌려 새벽 5시에 준비해서 사진을 찍고 회사에 출근했다.

그러나, 환율로 인해 노력한 만큼 매출은 잘 올라가지 않았고, 점점 생활은 무료해졌다. 매일 되풀이되는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 ‘나는 왜 살지?’ ‘무엇 때문에 살지?’ ‘이렇게 쳇바퀴를 굴린 후 그 다음은 뭐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편안한 생활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고, 엄청난 삶의 회의와 더불어 나를 자책하게 됐다.  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미국에 왜 왔는지….  수 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의 꿈은 런웨이 모델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도 못했다는 미련이 불현듯 나를 엄습했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는데, 나도 그 기회를 잡고 싶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런웨이 모델에 도전하자!’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2009년, 28세 때였다.

▲ 박스카와 애완견 '참치', 그리고 강렬한 햇살. 나는 되풀이되는 무료한 삶을 던져 버리기로 결심하고 꿈을 향해 몸만들기에 들어갔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모델이라는 삶과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몸매도 많이 망가져 있었다. 매일 야식을 먹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내 허리는 늘어졌고 피부는 까칠해졌다.

나는 무엇부터 해야할지 계획을 세웠다. 먼저 피트니스 센터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과연 미국 땅에서 모델 일을 할 수 있을지 인터넷 서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잡지 모델도 했었고 여러 가지 경력들이 있으니, 모델 일을 하기 쉽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단 덤비기로 했다. 그리고 롤 모델을 정했다.

세계적인 모델 167㎝의 ‘케이트 모스’를 롤모델로 잡고 허리 24인치를 목표로 운동을 시작했다.

샐러드 위주의 식단으로 칼로리를 항상 체크하고 하루 세 시간의 운동을 했다. 몸무게도 체크 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이즈 다이어리를 쓰면서 운동했다.

매일 가슴, 허리, 힙, 허벅지, 종아리, 팔뚝 둘레를 재면서 사이즈가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27인치 정도의 내 허리에서 24인치가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았지만, 식습관의 균형을 잡고 24인치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악착같이 운동했다.

몸매가 완성 되어 갈 때쯤 나는 모델 일이 다시 하고 싶어 졌다.  <계속>

 

패션 인생 스토리⑥ 아메리칸 드림, 셀프 카메라로 포착하다 도 함께 보세요^^ 

패션 인생 스토리⑧ 꿈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런웨이 모델 데뷔!) 도 함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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