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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정조대왕 능행차 최초 재현, 창덕궁~융릉 59.2㎞, 4391명·말690필, 소통·나눔·공감 시대초월 '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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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정조대왕 능행차 최초 재현, 창덕궁~융릉 59.2㎞, 4391명·말690필, 소통·나눔·공감 시대초월 '원행'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7.09.2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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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서울시는 23일부터 24일까지 수원시, 화성시와 함께 창덕궁에서 화성 융릉까지 정조대왕 능행차 59.2㎞ 전 구간을 최초로 재현하고 있다. '소통, 나눔, 공감'이 주제인 이번 능행차 재현 행사에는 총 인원 4391명, 말 690여필 등이 참여한다.

‘2017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구간은 서울 창덕궁에서부터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성 융릉까지다.

서울구간은 23일(토)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이고, 수원구간은 24일(일) 오전 8시50분부터 오후 6시40분까지, 화성구간은 24일(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펼쳐진다.

서울구간은 창덕궁~배다리~노들섬~시흥행궁에 이르는 총 21.2km에서 펼쳐지고, 수원구간은 금천구청~수원종합운동장~연무대까지의 26.4km와 화성행궁~대황교동의 5.9km에서 진행된다. 화성구간은 대황교동부터 융릉까지 7.5km이다.

서울구간에는 참여인원 1100여 명, 말 140여필이 참여하고, 수원구간에는 참여인원 2810여명, 말 480여필, 그리고 화성구간에는 참여인원 481여명, 말 70필이 참가한다.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다

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문화운동을 통틀어 '르네상스'라고 한다.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과 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면 어딜까? 영조와 정조 시대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할아버지 영조와 손자 정조. 두 임금 중에서도 정조시대는 조선시대 역사 중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문화부흥기였다.

정조(1752~1800)는 조선의 제22대왕이다. 재위기간은 1776년부터 1800년까지였다.

정조는, 정치적으로는 조선 수기 개혁과 대통합을 실현한 군주였지만 문화적으로는 규장각을 통해서 학문정치를 구현하며 인재 육성을 추진했다.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실학'이 가장 화려하게 꽃피웠던 때도 정조대였다. 정조가 신임했던 정약용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중인문화의 원동력이 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는 아픔을 잉태하고 탄생한 임금이었다. 할아버지 영조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명에 갔고, 임금이 된 후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로 고심했다. 외조부 홍봉한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해 사면해야 하는 갈등도 겪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뒤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아버지를 장헌세자(고종 때 장조로 추존)로 추존하였다.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한 뒤 현릉원(顯隆園)이라 했고, 또다시 융릉(隆陵)으로 승격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은 물론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도를 손수 실천했다. 이를 위해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화산에 융릉을 조성하면서 팔달산 기슭에는 신도시 화성을 건설했다. 이어 화성 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었다.

● '능행차'는 정조의 개혁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정조대왕은 24년의 재위기간 동안 친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성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옮긴 후 11년간 총 13번의 원행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정조대왕 즉위 20년 해인 1795년(을묘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 간 그의 어머니 현경왕후(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행했던 대규모 행차가 바로 '을묘년 화성행차'다. 현경왕후와 동갑이었기에 아버지 장조의 회갑이기도 했다.

이 기록을 자세하게 글과 그림으로 엮어 책으로 남긴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다.

1795년 윤 2월9일 오전, 1㎞에 달하는 현란한 깃발과 연주가 어우러진 국왕의 행렬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출발해 보신각 앞길을 지나 숭례문을 통과한 뒤 노량진 배다리에 다다른다.

배다리를 건너는 동안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국왕의 행렬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정조는 이러한 능행길에서 백성들과 소통했다.

8일간의 능행차는 정조대왕의 애민에 바탕한 '소통정신'과, 솔선수법을 통해 효행을 권장해가는 모습,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공감'의 정치였다.

'정조실록'의 1792년 1월24일 기사에는 '왕이 행차하는 도중 갈현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초상에 앉아 마을 노점의 노인들을 불러 고통스러운 일을 물어보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1793년 1월12일 기사에도 '왕이 인덕원 들녘을 지나다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조대왕은 재위기간 무려 66회에 걸쳐 행행(行幸)을 하였다. 행행 중에 무려 3355건이나 되는 백성들의 상언과 격쟁을 처리했다. 이처럼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왕은 없었다.

● 정조는 왜 화성까지 가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었나

긴 행렬이 도착한 화성에서는 혜경궁 홍씨의 성대한 회갑연이 열렸다.

능행차에는 6000여 명의 사람과 788필의 말이 동원됐다.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24개 처의 요지에 배치된 수천 명의 복병까지 계산하면 1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셈이다.

이처럼 정조가 대규모의 행렬을 이끌고 도성이 아닌 화성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연 까닭은 무엇이엇을까?

비극적인 아픔과 혼란스러운 당쟁 속에서 즉위한 정조가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군복을 입고 말을 타는 위엄한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 의지를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1800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개혁정치가'로 역사에 남았다.

■ 2017 정조대왕 능행차 주요 지점별 행사 내용

- 창덕궁 : 정조·혜경궁 홍씨 출궁의식 재현, 관광민인 퍼포먼스, 능행차 홍보 보부상

- 서울역 : 자객전-무사백동수 무예공연, 능행차 반차도 재현 퍼포먼스, 전통 난장 공연(줄타기, 태평소농악)

- 서울로7017 : 닥종이로 제작된 정조대왕 능행차 모형 전시, 풍물놀이

- 배다리 : 배다리 좌우 군사들 도열(배다리시도식), 시민 배다리 체험

- 노들섬 : 전통대북공연 ,정재공연, 격쟁, 수라올림, 문화공연(구민국악공연단, 용산구구립소년소녀합창단, 소리현가야금명창단, 전통 비보이 공연 및 코믹 퍼포먼스), 주제전시관(정조대왕소개,복식,화성행차) 운영, 시민 먹거리 장터(용산구, 동작구), 시민 체험(말타기, 궁중의상, 꽃신만들기, 능행차반차도 색칠, 전통활 검 아트타투)

- 노들나루공원 : 용양봉저정 역사산책, 정조대왕 노래극<조선의 꿈,정조대왕>, 문화공연(한국무용,풍물패,대북난타,합창단 공연,전통무예 시범공연,자치회관 프로그램), 정조대왕 및 능행차 패널 전시,시민 체험(전통무예, 무과시험, 전통의상 포토존, 전통가마, 짚풀공예, 한지공예, 서예체험, 병풍 만들기, 다도, 전통악기, 친환경 생활용품, 아트 타투, 캐리커쳐)

- 시흥행궁 : 정조맞이 호위무사, 시흥현 교서 선포, 전통 대북공연, 정재공연, 격쟁, 전통 문화공연(태권무 공연, 대형 붓글씨 퍼포먼스, 시민공연단, 난타, 전통무예시연, 조선마술사공연, 과거시험 재현), 시민 체험(정조대왕 어록쓰기, 전통 문양 열쇠고리, 한지등 만들기, 궁중 의상 포토존, 전통 활,검 아트타투, 문패 만들기, 무관 과거시험, 능행차 반차도 색칠), 시민 먹거리 장터, 현장 중계 역사 해설

- 특별부대행사(경희궁): 조선시대 과거시험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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