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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인생 스토리⑩ 뉴욕, 차가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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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인생 스토리⑩ 뉴욕, 차가운 도시...
  • 배선영 모델 겸 스타일원미 대표
  • 승인 2014.12.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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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69cm의 모델치곤 아담한 키. 평범했던 울산 소녀의 꿈 많은 상경. 잡지모델 데뷔, 온라인 쇼핑몰 성공, 뉴욕 런웨이 도전과 6년간의 미국 활동, 귀국 후 스타일링 디렉터로 활동하기까지 수많은 도전과 실패 경험….

모델 출신인 배선영 스타일원미(www.style1.me) 대표의 범상치 않은 약력입니다. 배 대표는 작은 키 때문에 국내 무대에 서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뉴욕과 LA 런웨이에 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도 맛봤지만 세계의 높은 벽도 실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Q는 '도전의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패션 모델을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배선영 대표의 '뉴욕 런웨이 도전기'를 연재합니다. 국내 또는 뉴욕의 런웨이에 서기 위해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배선영 모델 겸 스타일원미 대표] LA에서의 모델 활동으로 포트폴리오는 준비되어 있었고, ‘LA 에 살면서 뉴욕 활동을 병행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뉴욕에 있는 모델 에이전시마다 이메일로 프로필을 보냈다.

▲ '튀어야 산다'고 했던가. 세계 경제와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에서의 모델 생활은 LA 때와는 크게 달랐다. 키 작은 동양의 모델이 헤쳐나가기에는 뉴욕 거리는 너무 차가웠다. 사진은 뉴욕패션위크 컬렉션 백스테이지에서 단발머리와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연출했을 때의 모습.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며칠이 지나도록 단 한 군데에서도 소식이 없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전세계에서 모델지망생들의 프로필이 하루에도 수없이 날아들 텐데 키도 크지 않은 나에게 연락이 올 리가 만무했다.

'일단 부딪쳐 보자!' 더 늦기 전에 뉴욕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델을 처음 꿈꿨을 때 울산에서 서울로 가고 싶었고, 또 다른 꿈을 꾸며 서울에 살 때는 미국으로 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고 싶은 곳의 지도를 보며 꿈을 키웠는데, 뉴욕에 가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구글 지도를 보며 뉴욕을 탐구했다. 뉴욕에서 온 친한 언니에게 조언을 받으며 뉴욕 생활을 준비 했다.

그 당시 ‘제이지(Jay-Z)’ 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Empire State of Mind)’ 라는 노래를 들으며 뉴욕의 꿈을 키웠고, 뉴욕 행 비행기표를 끊게 되었다.

꿈에 부풀어 비행기 티켓을 끊기는 했지만 3년 반이라는 LA 생활을 정리하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매일 한숨 쉬며 눈물을 훔쳤다.

‘꿈이 뭐길래, 이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는 또 떠나기로 한 것인가….’

나는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고, 3년 넘게 살던 LA의 생활을 정리하고 2009년 12월 15일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LA를 떠나기 전 집값이 조금 저렴하다는 뉴욕 퀸스 지역의 플러싱(Flushing)에 2주치 렌트비를 주고 계약을 해두었다. 한국인 아주머니께서 사시는 아파트였다.

설레임 반 두려움 반, LA 공항으로 배웅해준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 뒤 뉴욕으로 떠났다. 그리고 곧 JFK 공항에 착륙했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도 아파트 아주머니께서 집앞까지 마중 나와주셨다. 아주머니는 따뜻한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 밥상으로 나를 맞아 주셨다. 어디든 한국인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 '군중 속의 고독',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같은 심경을 절감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도착한 뉴욕은 사방이 가로막힌 유리벽 같았다. 나는 며칠 간 심한 우울증을 경험해야 했다. 사진은 브로드웨이와 5번가, 23번가가 교차하는 자리에 있는 플랫아이언빌딩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뉴욕에 적응하고자 혼자 여행할 때의 모습이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그러나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 짐 정리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순식간에 우울증이 밀려왔다. 너무 무서웠다. 항상 밝게 살아가던 나였는데, 갑자기 흔들리는 내 모습에 나 자신도 너무 당황스러웠다.

‘아무도 없는 뉴욕에 내가 왜 왔을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곳까지 왔을까?’

‘지금 이대로 포기하고 다시 돌아갈까?’ ‘다시 돌아가면 모두들 나를 비웃겠지….’

‘내가 가야 할 곳은 이 지구상에 없는 것 같아….’

그런 생각들로 한참을 울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외로움과 무서운 공포가 밀려왔다.

뉴욕을 가긴 갔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소속 에이전시도 없고 모델비자도 없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듯 했다. 눈앞이 캄캄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울다가 일단 뉴욕이라는 도시에 적응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뉴욕 종이 지도를 침대 위에 펼쳤다.

LA에서는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녀서 편했지만, 뉴욕에서는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고 자가용을 보유하고 있으면 생활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조언에 자동차는 LA 출발 전에 미리 판 상태였다.

지도에 나와 있는 지하철 노선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한국 포털 사이트에서 뉴욕 여행에 대한 글을 찾아 보고 뉴욕을 여행하기로 했다. 매일 휴대폰과 지도를 들고 맨하튼 여행을 하게 되었다.

구글 지도를 보며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소호에도 가보고, 그 유명한 타임 스퀘어, 첼시, 섹스앤더시티의 주인공 캐리가 살았던 웨스트 빌리지, 자유의 여신상 등 며칠 동안 여행을 했다.

연말이라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고 눈도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함께 지내는 뉴욕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뉴욕의 연말 분위기가 행복해 보일수록 나는 그만큼 더 외로워졌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터널로 다시 들어온 것 같았다.

▲ 한국에 있을 때부터 예술가의 거리로 유명한 소호에 꼭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의지할 곳 없고 미래가 불확실한 '키 작은 동양인 모델'에게 소호 거리는 쓸쓸함의 대명사처럼 다가왔다. 2009년 12월, 소호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젖어있었지만 가족과 친구 아무도 곁에 없는 나에게는 가장 외롭고 힘든 연말이었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그 당시 가지고 있던 체류 비자가 거의 끝날 무렵이어서 모델 활동이 가능한 'O 비자' 신청을 준비했다.

'O 비자'는 '특수 재능인 비자'로 예술, 과학, 스포츠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과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선별하여 발급되는 비자다.

O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그래미상이나 아카데미상처럼 국제적으로 알려진 상을 수상하거나 공연 예술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제시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싸이, 유재석, 그 밖의 유명 패션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호사와 상의한 후 나는 O 비자 신청을 준비했다. 만만치 않은 변호사 비용 4500불(약 500만 원)과 그 밖의 서류 비용 등이 들어갔고,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한국에서 잡지모델 활동했을 때의 자료들과 세금내역, 패션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각종 추천서들이 필요했다.

2001년 모델라인 에이전시 수료증, 한국 모델협회 인증서, 한국 잡지 모델로 활동했던 경력증명서 등을 준비 했으며, 추천서는 한국과 LA에서 함께 일했던 에디터, 포토그래퍼, 메이크업 아티스트들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잡지모델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항상 밝은 성격에 대인관계가 좋은 모델이었다. LA에서 처음 런웨이 모델을 시작할 때도 무급 패션쇼를 비롯한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SNS로 인맥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인연이 되었던 사람들이 추천서를 써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모델 후배들을 만날 때면 자주 말하곤 한다. “지금 유명하지 않고 잘나가지 않는 모델이나 관계자들을 무시하지 말아라. 언제나 인사를 잘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라. 언제 그 사람이 너의 인맥이 될지 모른다” 라고 말이다.

▲ 평소 나는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낯선 타국에서는 인연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관리하는지가 특히 중요하다.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 디자이너 스테이시는 2009년 LA 패션위크 컬렉션에서 만난 인연으로 뉴욕에서 룩북 모델로 나를 캐스팅해줬다. 그녀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금도 안부를 주고 받고 있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그렇게 O 비자 신청을 했고, 나는 뉴욕에서 모델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준비했다. 피트니스센터도 등록해서 매일 운동했고, 뉴욕의 모델 에이전시의 '오픈 콜'(일주일에 한 번 있는 모델 오디션)에 참석해 매주 오디션도 보았다.

2010년, 내 나이 29세였다.

길게 늘어 선 여자 모델들을 보면, 나보다 키는 10~15cm 정도 컸으며 얼굴은 내 얼굴의 절반 사이즈였다. 그리고 나이도 10~15세나 적은 모델들이었다.

바비 인형 같은 모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15cm 정도의 킬 힐을 신고 있어도 머리 크기 한 개 차이 나는 그저 작은 동양인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잡지모델을 하고 LA에서도 작은 키로 런웨이에 섰었지만 뉴욕에 가서 느낀 벽은 너무 높아 긍정적인 나에게도 헤쳐나가기 벅찼다.

오픈 콜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LA와는 완전히 다른 차가운 도시 뉴욕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외롭고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기쁜 만남도 있었다. 에이전시 오픈 콜이 있었던 날이었다. LA에서 베벌리 힐스 쇼에 함께 섰던 중국인 모델을 우연히 만났다. 같은 꿈을 가지고 LA에서 뉴욕까지 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는 게 정말 신기하고 반가웠다.

뉴욕에서도 일을 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녔다. LA 패션위크 때 뉴욕 브랜드인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 디자이너가 생각이 나서 이메일을 보냈다. 뉴욕에 모델을 하러 왔으니, 혹시 맞는 콘셉트가 있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얼마 후 디자이너로부터 연락이 왔다. 2010 F/W 카탈로그 촬영이 있는데 아시안 모델로 나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다.

디자이너는 나를 보자 너무나 반가워 했다. 마침내 카탈로그 촬영 스캐줄을 잡게 되었다.

촬영이 끝난 뒤 그 카탈로그는 보이 미츠 걸 온라인 사이트 및 미국 전역에 있는 백화점, 편집숍으로 보내졌다. 뉴욕에서 힘겹게 잡은 일이었지만 또 하나의 경력이 되었다.

▲ 나는 우여곡절 끝에 '보이 미츠 걸' 룩북 모델로 뉴욕에서 첫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함께 촬영했던 룩북 모델들과 찍은 사진이다. 이를 계기로 한껏 희망에 부풀었지만 기쁨도 잠시, 곧바로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이제 조금씩 일이 풀리려나?' 희망에 가득찬 채 에이전시를 찾았다. 그런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생겼다. 미국 이민국으로부터 O 비자를 거절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 비자가 없으면 나는 일을 할 수 없고, 미국에서 체류할 수도 없었다.

거절당한 이유는 에이전트가 없어서라고 했다.

에이전트를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오디션을 보았지만, 뉴욕에서 에이전시 소속 모델로 일한다는 것은 밤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민국에서는 에이전시가 일을 준다는 계약서가 있어야 비자를 내준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LA에서 에이전시마다 아무리 이메일을 보내고, 뉴욕으로 와서 오픈 콜 때 오디션을 보러 다녔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는데….

어떻게 에이전트를 구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정말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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