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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수장 세라 머리, 랜디 희수 그리핀-박종아도 물들인 '원팀 정신' [SQ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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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수장 세라 머리, 랜디 희수 그리핀-박종아도 물들인 '원팀 정신' [SQ포커스]
  • 안호근 기자
  • 승인 2018.02.1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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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스포츠Q(큐) 글·사진 안호근 기자] “단일팀이 되고 나서는 남과 북을 가르지 않고 하나의 팀으로 생각했다.”

14일 강릉 관동 하키 센터에서 일본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여자 B조 리그 3차전을 마친 세라 머리(30)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이 같이 말했다. ‘남과 북’이 아닌 ‘단일팀’에 포커스를 맞췄다. 늘 강조해 온 일관된 생각이다.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일이 있었다. 너무도 많은 정치적 이슈가 연관됐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오직 팀을 하나로 묶는 게 최고의 목표였다.

 

▲ 세라 머리 감독이 14일 일본전을 마치고 기자회견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세라 머리 감독은 2014년 10월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을 맡았다. 한국의 지도자로선 파격적일 정도로 젊은 나이였다. 귀화선수 랜디 그리핀 희수(31)는 그와 동갑이고 한수진(32)은 오히려 한 살이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더욱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가 세계선수권 디비전 1그룹 B(3부 리그)까지 올라선 건 그의 지도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평창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는 기대가 컸다. 어쩌면 꿈 같이 여겨지는 1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그러나 올림픽 개막을 코앞에 두고 뜻밖의 제안에 당황해야 했다. 바로 정부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까지 나서 성사시킨 남북 단일팀이다.

불만이 적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강하게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불만족스럽고 답답한 심경을 마냥 숨길 수만은 없었다.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이후 그의 머릿속에 박힌 단어는 ‘원 팀’이었다. 어떻게든 팀을 하나로 묶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국은 세계랭킹 22위, 북한은 25위. 실력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일지 의문이었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사용하는 언어와 생활해 온 환경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터놓지 않고서는 링크에서 하나된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하키 용어가 다르다는 점도 문제였다.

 

▲ 기자회견에 참석한 세라 머리 감독(왼쪽부터), 랜디 희수 그리핀, 박종아.

 

랜디 희수 그리핀은 “처음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남한 선수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던 반면 북한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렇기에 머리 감독은 더욱 노력했다. 잦은 시스템 미팅과 플레이북 등을 제공했다. 선수들도 적극적으로 머리 감독의 생각을 따랐다. 남한 선수들은 북한 선수들 옆에 붙어 언어를 알려줬고 전반적인 부분을 도와줬다. 머리 감독은 “이틀 정도 가르쳐주고 나니 북한 선수들이 오히려 더 잘 알더라”라고 말하며 웃었다. 랜디 희수 그리핀도 “북한 선수들도 굉장한 노력해줬다. 벤치에서 북한 선수들이 라인 체인지, 페이스 오프 등의 단어를 쓰는 것을 많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일상적인 부분에서 융화도 중요했다. 남 측 선수들은 북한 선수들이 합류하자마자 생일 파티를 해주고 통성명과 나이를 확인하며 언니, 동생 사이를 정했다. 더욱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었다.

희수 그리핀은 “북한 선수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우리와 같은 젊은 여성들인 동시에 하키 선수일뿐”이라며 “매일 하는 것도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하다. 식당에서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누가 남자친구가 있냐는 둥 하는 얘기들”이라고 말했다. 북한 선수들과 이질감이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말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머리 감독은 미소를 지었다.

다만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같은 팀으로서 훈련한지 열흘도 되지 않아 처음이자 마지막 평가전을 치러야 했다. 결국 스위스와 스웨덴전 아쉬운 결과로 이어졌다. 두 경기에서 득점 없이 8골씩을 내주며 무너졌다.

 

 

그러나 이날 치른 한일전은 달랐다. 이전 두 경기와 달리 선수들이 공수에서 몸을 던지며 플레이 했다. 진정으로 ‘원 팀’을 이룬 듯 한 경기력이었다.

이날 단일팀과 한국에 올림픽 역사상 첫 골을 선사한 랜디 희수 그리핀은 “결과는 실망스럽지만 전체적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일본전이 지금까지 중 가장 잘한 경기였다”고 말했고 주장 박종아는 “경기에선 졌지만 우리 선수들 모두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머리 감독은 “둘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올림픽 들어서 최고의 경기력이었다”며 “첫 5분 안에 2골을 내줘 포기하기 쉬웠을 텐데 계속 열심히 해줘 자랑스럽다. 이 경기만큼은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 마지막 전술적 변화를 줬음에도 잘 안됐지만 굉장히 잘 싸웠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일전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팀으로 맞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역사적 이슈보다 한일전에서 이기면 아시아 내 최고의 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전념했다”며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팀으로 열심히 싸울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날 역사적인 골을 넣은 랜디 희수 그리핀도 팀을 더 먼저 생각했다. 미국 출신으로서, 한국인의 피를 지녔다는 점에서, 북한과 하나 돼 이뤄낸 성과라는 점에서 영웅이 된 것 같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리 팀을 대표해 득점했다고 생각한다. 영웅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득점도 슛을 한 뒤 바운드가 돼서 운 좋게 들어갔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를 듣고 있던 머리 감독은 자신의 철학을 잘 따라주는 희수 그리핀이 대견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경기에서 단일팀은 1피리어드 초반 2골을 허무하게 내주고 끌려갔지만 이후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역사적인 골까지 넣었다. 막판 일본에게 골을 내줬고 아쉽게 1-4로 패했지만 이전 경기들과 비교하면 충분히 박수를 보내줄 만한 승부였다.

4년 전 여자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기 전까지 머리 감독은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단일팀 결성은 머리 감독에게 골치 아픈 일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결과에서 최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애썼고 그 ‘원 팀 정신’에 선수들도 동화돼 감동적인 한일전을 치를 수 있었다.

조별 리그에선 3패로 탈락했다. 그러나 결코 기죽을 일은 아니다. 이날 한국과 상대전적을 8전 8승으로 늘린 세계 9위 일본도 한국을 꺾기 전까진 올림픽 10연패에 빠져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그 가능성을 이날 한일전에서 봤고 이를 계기로 어쩌면 남은 순위 결정전 2경기에서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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