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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인생 스토리⑪ 인생은 산 넘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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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인생 스토리⑪ 인생은 산 넘어 산
  • 배선영 모델 겸 스타일원미 대표
  • 승인 2014.12.1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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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69cm의 모델치곤 아담한 키. 평범했던 울산 소녀의 꿈 많은 상경. 잡지모델 데뷔, 온라인 쇼핑몰 성공, 뉴욕 런웨이 도전과 6년간의 미국 활동, 귀국 후 스타일링 디렉터로 활동하기까지 수많은 도전과 실패 경험….

모델 출신인 배선영 스타일원미(www.style1.me) 대표의 범상치 않은 약력입니다. 배 대표는 작은 키 때문에 국내 무대에 서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뉴욕과 LA 런웨이에 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도 맛봤지만 세계의 높은 벽도 실감했다고 합니다.

스포츠Q는 '도전의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패션 모델을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배선영 대표의 '뉴욕 런웨이 도전기'를 연재합니다. 국내 또는 뉴욕의 런웨이에 서기 위해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배선영 모델 겸 스타일원미 대표] 미국 이민국으로부터 에이전트가 없다는 이유로 특수예능비자(O비자)를 거절당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LA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뉴욕에서 모델로 살아 남아야 했다. 하지만 뉴욕 무대는 전세계 모델들이 다 모인 만큼 경쟁률도 치열했다.

▲ 2010 뉴욕 패션위크 백스테이지에서의 당당한 내 모습. 나는 그 어떤 무대라도 항상 최선을 다했고 모델이라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에이전시 소속이 아닌 모델들에게는 오디션 기회가 많이 없었고, 설령 오디션의 기회가 주어 진다 해도 패션 관계자들의 첫마디는 “어느 에이전시 소속 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렇다. 에이전시 소속 모델이어야만 뉴욕에서는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에이전시와의 계약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에이전시 소속 모델만이 프로 모델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어릴 적 모델을 시작할 때부터 에이전시 도움 없이 혼자 시작한 잡지 모델과 LA에서의 런웨이 모델 활동은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키가 작으니 에이전시 오픈콜마다 떨어지고, 에이전시가 없으니 일도 못하고, 비자도 못받고…. 좌절의 날이 계속 되었고 뉴욕에 온 보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뉴욕에서 일을 해 보고자 모델 커뮤니티에서 모델 구인광고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LA에서처럼 무보수 런웨이쇼 또는 사진작업부터 시작했다. 포트폴리오라도 만들 수 있으니 시간을 버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스케줄을 바쁘게 만들어서 외로움을 잊음과 동시에, 내가 모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페이스북에 활동 사진들도 업로드했다. 돈이 안 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래도 위로가 되었다.

▲ 핑크 립스틱이 잘 어울리는 흑인 모델 친구. 모델 생활 동안 찍은 백스테이지 사진은 모두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보물로 남았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내가 잠시 거주 하던 플러싱(Flushing) 지역은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이 많아서 뉴욕에 사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델 일을 활발히 하지 못하던 내가 값비싼 맨해튼에 둥지를 트는 건 무리였다.

맨해튼에서 최대한 가깝고 아시아인이 적게 사는 아스토리아(Astoria)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곳은 유럽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고, 뉴욕에 사는 기분이 들었다. 집들과 상점들, 사람들 모두 백인 마을이었다.

스케줄이 있으나 없으나 나는 소호(Soho)로 지하철을 타고 나갔다. 소호는 수많은 브랜드와 명품을 비롯해 빈티지숍까지 있는 패션의 요지였다.

매일 소호에서 내가 좋아하는 패션의 흐름을 보고 느끼며 공부했다. 여러 의류 상점에 들어가서 옷도 착용해 보고 혼자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책을 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하곤 했다.

LA에서 살 때는 따뜻한 캘리포니아의 날씨에 맞춰 파스텔 톤의 의류와 소품들을 즐겨 착용했지만, 뉴욕의 겨울은 달랐다. 뉴욕은 '블랙의 도시'였다.

한겨울 빌딩과 빌딩 사이의 칼바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두터운 외투와 귀마개, 두꺼운 털부츠를 착용하고 다녔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블랙 의상을 선호했다.

모델들은 특히 심했다. 하루 종일 캐스팅을 다니며 오디션을 봐야 했기에 블랙 색상의 포트폴리오북을 들고 블랙 색상의 롱 패딩 코트와 레깅스를 입고 다니고 있었다.

나는 블랙 소품을 비롯해 블랙 의상이 하나도 없었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로부터 “너의 옷차림은 캘리포니아 컨트리 스타일”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서 내 스타일을 점검하게 되었다.

▲ 뉴욕에서의 날씬했던 모습. 비자 인터뷰 건으로 잠시 귀국했을 때 순식간에 살이 찔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정말 캘리포니아와 스타일이 달랐다. 뉴욕의 사람들은 시크한 스타일의 패션이었고, 캘리포니아는 내추럴하고 편안한 스타일의 패션을 선호한다.

캘리포니아에서 구입한 N브랜드 하이톱 운동화를 신고 나간 날, 친구는 블랙 색상의 워커를 신고 있었다. 나도 나름 패셔니스타라고 자부하고 있었고, 그 N브랜드 하이톱 운동화는 캘리포니아에서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한정 판매제품)으로 구입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파스텔 민트 색상의 더플 코트도 컨트리 스타일이라며 놀림을 받았다.

나는 물가가 비싼 뉴욕에서 최대한 돈을 절약해야 했기에, 세일 제품으로  블랙 의상 및 아이템들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저렴한 것만 찾아 다니는 ‘바겐 헌터(bargain hunter)’가 된 것 같다.

미국은 큰 아울렛뿐 아니라 도심 한 가운데에도 백화점 아울렛이 있어서 브랜드 제품을 50~90%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나는 모델을 하기 전부터 나의 신체적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가 아니라 안으로 말려있는 골격이어서 어깨가 좁아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두상이 커 보인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블랙 색상의 옷은 구입하지 않았으며, 터틀넥(목폴라) 티셔츠도 절대 입지 않는다.

둥근 얼굴이라 V 넥의 상의를 항상 구입했고, 밝은 컬러의 아우터로 좁은 어깨를 보완했다. 또한 여름에는 목 뒤로 묶는 홀터 넥 디자인을 피하고 신발은 하이힐을 신어 다리를 길게 보이게 연출한다.

그렇게 내 기준에 맞는 패션이라는 틀 안에서 살아온 내가 친구의 말 한마디로 블랙 색상의 아이템만 구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자, 의류, 신발, 가방, 목도리 등등…. 뉴욕에 살면서 구입했던 블랙 아이템들은 아직까지도 내가 아끼는 보물들이 많다.

▲ 3년 반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보고 싶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셀카~ 찰칵찰칵. 이때만 해도 많이 정정 하셨는데 지금은 두 분 다 아흔살 정도의 연세로 요양병원에 계셔서 슬프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블랙’이라는 컬러는 유행을 타지 않는 컬러로서 매년마다 꺼내 입을 수 있으며, 항상 나를 시크한 스타일로 만들어 주는 아이템들이다. 이 때문에 그때부터 나는 ‘블랙’이라는 컬러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무나 입을 수 있지만, 아무나 소화하지 못하는 컬러 블랙(Black)!’ 그렇게 전체적인 나의 이미지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외로움도 조금씩 잊어가고 뉴욕에 적응이 될 때쯤 페이스북을 통해 어떤 포토그래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작업했던 사진들을 보고 연락했다며 실물 미팅을 하고 싶다고 말이다.

포토그래퍼와 소호에서 미팅을 가졌는데 사진 작업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 에이전시를 찾고 있다고 내 사정을 설명했다. 얼마 후 그는 소호에 있는 ’B 모델 에이전시’와 미팅을 잡아 주었다.

그 에이전시의 캐스팅 디렉터와 미팅이 있었고 당일 날 바로 계약서를 쓰자는 제안을 받았다. 또한, O비자의 스폰서도 되어 준다고 했다.

그 에이전시는 바로, 내가 LA에서 이메일을 보낸 곳이었고, 뉴욕에 가서도 오픈콜 때 오디션을 보러 간 곳이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에는 인맥이라는 게 어디든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뒤엉켰던 실타래가 풀리는 듯했다. 매일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고 모델이 되기 위해 노력해온 시간을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에이전시와 계약하고 다시 O비자 서류를 넣게 되었다. 이민국에서 서류가 통과되었고 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 날짜를 잡게 되었다.

아스토리아 집에 있는 짐들을 사설 창고에 보관하고 3년 5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모님과 친구들을 비롯해 정말 보고 싶은 사람들도 많았다.

공항으로 마중 나오신 부모님은 더 많아진 주름들과 하얀 머리카락으로 내 눈시울을 젖게 만들었다.

2006년 LA로 갈 때 나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나의 목표를 세우고 비행기표를 끊은 후 아무렇지 않게 “엄마, 나 미국 가” 라고 말씀을 드렸었다. 그 말을 들으신 엄마는 그날 밤 잠을 못 이루셨다고 말씀하셨다.

울산에서 서울로 보낼 때도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이제는 머나먼 미국땅으로 간다고 하니 더욱 더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다고 하셨다.

그 후 내가 3년 반 만에 부모님을 뵙게 된 것이다. 내 꿈을 위해 부모 형제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시간들이 죄송스럽게만 느껴졌다.

▲ 보고 싶었던 고등학교 친구들~. 3년 반만에 만났지만 엊그제 본 것처럼 나를 맞아준 너무 편안한 친구들이다. [사진= 배선영 대표 제공]

예정된 날짜에 맞춰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O비자를 발급 받았다. 그리고 한 달을 한국에 머물렀다.

나는 그 당시 46kg의 몸무게에 허리 24인치로, 에이전시 소속 모델이 되는 순간부터 항상 그 사이즈를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3년 반만에 돌아온 내 나라 한국. 내 고향에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한 달 동안 중·고등학교 동창들, 친구들, 친척들, 잡지모델을 하며 친해진 모델들, 에디터들, 포토그래퍼, 스타일리스트 등 매일 약속의 연속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들, 옛 추억을 되새기며 한 달 동안의 뜻 깊은 한국 방문이 되었다. 그렇게 매일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술자리도 가지게 되었다.

고향에서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제 다시 뉴욕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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