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8:29 (토)
[SQ인터뷰]"아직 전성기 오지 않았다" 팬심 찌르는 '작은 거인' 허준의 무한 열정
상태바
[SQ인터뷰]"아직 전성기 오지 않았다" 팬심 찌르는 '작은 거인' 허준의 무한 열정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4.12.19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AG 투혼의 은메달, "다시 태어나도 펜싱-내 꿈은 올림픽 출전"

[300자 Tip!]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세계를 들어올린 역도 선수 전병관에게는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58cm의 키로 155㎏의 바벨을 들어올리는 그는 정말로 거인처럼 보였다. 22년 후 인천에서는 펜싱판 ‘작은 거인’ 허준(26·광주시청)이 등장했다. 검으로 상대를 찌르는 종목에서 키가 작고 팔이 짧은 선수가 정상급 기량을 갖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자가 155cm의 남현희라면 남자는 허준이다. 팬들의 심장을 찌른 인천 아시아드의 감동을 뒤로 하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연말, ‘단신검객’을 만났다.

[태릉=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최대성 기자] 인천 아시안게임의 여운이 사라져간다. 하지만 ‘펜싱 코리아’가 남긴 짜릿함만큼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 '단신검객' 허준은 미남이다. 아시안게임에서 보여준 투혼의 은메달을 통해 팬들도 많이 늘었다.

한국은 금메달 8개, 은메달 6개, 동메달 3개를 수확해 역대 아시안게임 최고 성적을 거뒀다. 이제 펜싱은 스포츠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양궁, 쇼트트랙, 레슬링, 유도, 사격, 역도 등과 함께 국민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종목으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비록 금메달은 따지 못했지만(은메달 1개, 동메달 1개) 가장 인상깊은 경기를 보여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168cm의 ‘단신 펜서’ 허준(26·광주시청)이다.

세계랭킹 15위 허준은 지난 9월 22일 경기도 고양체육관에서 열린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 펜싱 남자 플뢰레 개인전 결승에서 랭킹 1위 마지안페이(중국)에 13-15으로 패했다. 생애 첫 메이저대회 개인전 우승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허준은 자신보다 17cm나 큰 마지안페이를 맞아 대등히 맞서 싸웠다. 불리한 신체조건은 현란한 푸트워크와 날쌘 스피드로 커버했다. 10-11 열세 상황에서는 오른 다리에 햄스트링이 올라왔지만 쓰러졌지만 응급처치만 받은 채 재차 피스트에 올라 투혼을 불살랐다.

키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허준은 “어릴 때 부모님께서 위인전 한 권을 읽지 않으면 잠을 못 자게 하셨다”고 농담을 던지며 “근육에 문제가 있나라는 생각에 고기만 계속해서 먹어본 적도 있다”고 신체적 한계에 대한 고민이 있었음을 털어놨다.

태릉선수촌 휴식공간인 챔피언하우스와 펜싱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개선관을 오가며 유쾌한 대화를 나눴다. 

▲ 허준은 "대학생 때는 주말도 없이 훈련하는 것이 큰 불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본분이기에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쿨가이(?)의 아시안게임 뒷이야기, “분하더라” 

“인터뷰는 그렇게 했죠. 후회없이 싸웠거든요. 돌아보니 분하기는 하대요. 코앞에서 놓쳤으니. 하하.”

허준은 아시안게임 펜싱 개인전 중 가장 멋진 경기를 보여줬다는 극찬을 받았다. 다른 종목의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펑펑 울던 것과는 다르게 “은메달을 따 굉장히 기쁘다. 상대가 잘해서 졌다”며 “단체전에서 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도록 노력하겠다”고 쿨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도 돌아보니 아쉽더란다. 허준은 “13-13에서 그렇게 지니까 열받기는 하더라. 잠이 안왔다”고 껄껄 웃으며 “4강전에서 일본 선수를 만나서 결승에는 오를 수 있을까 걱정했다. 만족한다. 창피하지 않게 당당히 싸웠다”고 ‘쿨가이’ 모드로 돌아왔다.

허준은 준결승에서 랭킹 13위 오타 유키(일본)와 혈전을 벌였다. 14-14로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오타의 초록색불이 들어오며 결승 진출이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다행히 백색불이 먼저 들어온 것으로 인정돼 경기가 속개됐고 먼저 상대를 찔렀다.

▲ 태릉선수촌 개선관 2층 펜싱장. 허준을 비롯한 펜싱 국가대표 선수들은 1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다. 허준은 내년 올림픽 출전 티켓을 확보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아시안게임 준결승은 내 펜싱 인생에서 가장 떨린 경기였다. 14-14 동점 상황은 정말 떨렸다”며 “내 앞길을 많이도 막은 선수다. 게다가 일본 선수 아니었나. 한일전이었기에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 '천방지축' 허준을 키워준 사람들 

허준의 아버지는 미술, 어머니는 음악을 전공했다. 정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허준은 반대로 노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전교 회장까지 지냈던 그는 ‘사고뭉치’였다. 부모님은 중학교 2학년 천방지축 아들을 서연중으로 전학시켜 펜싱과 연을 맺게끔 했다.

키는 작았지만 승승장구했다. 서울체고 재학 시절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힐 정도로 일찌감치 기량을 인정받았다. 대구대로 스카우트됐고 이내 태극마크도 달았다. 탄탄대로일 것 같던 그때 집안이 어려워졌다. 운동에 집중할 수 없었다.

허준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웨이터, 술집 아르바이트, 공장 일, 막노동 등을 해봤다. 안해본 일이 없다”며 “운동을 했는데 바깥 일이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냐고 생각했다. 만만치 않더라. 펜싱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회상했다.

▲ 허준의 꿈은 올림픽 메달권 진입이 아닌 올림픽 출전이다. 그는 "올림픽 메달은 따고 싶다고 되는게 아니다"라면서 "큰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경기를 그르친다"고 말했다.

선배들의 복귀 요청에 못 이기는 척 다시 검을 쥐었다. 마침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이 대구로 전지훈련을 와서 최병철(33·화성시청)과 만나게 됐다. 태릉에 입촌해서도 룸메이트를 하며 더욱 돈독해졌다. 최병철은 펜싱인으로서, 인생 선배로서 허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멘토다.

허준은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최병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2012 런던 올림픽 준결승 비디오를 100번도 넘게 돌려봤다”며 “형의 강점이 무엇이고 어떤 기술에 약한 지를 전부 파악했다. 병철이형은 나를 절대 이길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포츠스타 중에는 ‘수영황제’ 마이클 펠프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허준은 “습관이 되려면 66일 동안 반복해야 한다더라”며 “세계 최고의 선수가 스스로 최면을 걸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보고 내 운동에 적용했더니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 겸손한 허준, “개인전보다는 단체전 중요, 올림픽 출전이 꿈” 

“개인전은 30등을 하든, 100등을 하든 신경 안써요. 단체전이 중요합니다.”

개인전 은메달을 딴 허준은 단체전에서 동메달에 머무른 것이 못내 아쉽다. 여자 사브르와 남자 에페, 여자 플뢰레, 남자 사브르가 금빛 낭보를 전한 가운데 여자 에페가 은메달, 남자 플뢰레가 동메달에 그치며 아시안게임 전종목 단체전 석권의 꿈을 접었다.

그의 2015년 목표는 한국의 랭킹 상승이다. 허준은 “단체전 랭킹 4위 안에 들면 되면 올림픽 개인전에 3명이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며 “런던에서는 병철이 형이 혼자 나가 개인전 동메달을 땄다. 3명이 나간다면 개인전 메달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허준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만 한다. 그는 "외국 선수들로부터 작은데도 정말 잘 한다는 소리를 여러차례 듣는다"고 밝혔다.

개인전 금메달과 단체전 금 하나를 택한다면 그래도 개인전 아니냐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허준은 “내가 찔러 득점에 성공했을 때 뒤에서 환호해주고 달려와주는 사람들이 있는 느낌이 좋다”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체전 금메달을 택했다.

허준은 “운동 선수로 태어나 올림픽에 나가보는 것은 하늘이 정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입상을 하겠다기보다는 리우에 가는 것이 목표다. 국내에도 쟁쟁한 선수들이 많다. 선발전을 통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밝혔다.

제95회 전국체전 금메달, 아시안게임 은메달, 지난해와 올해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연달아 제패한 선수 치고는 참으로 소박한 꿈이다.

◆ ‘펜싱 전도사’의 외침, “강행군은 당연한 것” 

펜싱 대표팀은 태릉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연습쟁이’들이다.

오전 5시50분에 기상해 7시까지 운동을 한다. 아침 식사 후 9시30분부터 12시까지 오전 훈련, 오후 2시30분부터 6시까지 오후 훈련을 한다. 오후 7시30분터 9시까지는 야간 훈련이다. 하루 6시간40분의 강행군이다. ‘펜싱 강국’이 그냥 된 것이 아니다.

휴가도, 주말도 반납하고 훈련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 됐다. 본분이기에 당연히 해야할 일이란다. 허준은 여자 에페 선수들의 섬세한 손기술을 보고 영감을 얻는다. 단신이라는 핸디캡을 만회하기 위해 한 발 더 움직인다.

허준의 허벅지 힘줄은 늘상 문제다. 발바닥에는 족저근막염이 있다. 손목, 팔꿈치도 아프다.

▲ 허준의 궁극적인 꿈은 체육행정가로 변신해 한국 펜싱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는 훈련을 마친 후 개인적으로 영어 공부를 하며 은퇴 후를 대비하고 있다.

그래도 단호히 “펜싱이 좋다. 다시 태어나도 펜싱선수를 할 것”이라고 눈을 반짝였다.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벌써부터 은퇴 후를 준비하고 있다. 허준의 궁극적인 꿈은 체육행정가로 변신해 한국 펜싱을 널리 알리는 것. 몸이 녹초가 될법 한데도 훈련을 마친 후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펜싱 전도사’답게 종목의 매력을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딱 봐도 멋지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많은 분들이 펜싱에 심리적인 거리를 느끼셔서 그렇지 생활체육으로도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여자분들 다이어트로 최고입니다. 유산소, 근력 운동에 이만한 운동이 없습니다.”

[취재 후기] 기자의 체구는 크지 않다. 다양한 종목의 운동선수를 만나다보면 여자 선수도 올려다보는 경우가 다반사. 특히 배구 선수들의 인터뷰를 진행할 때는 목에 마비가 올 정도였다. 170cm가 되지 않는 허준을 보며 진한 ‘동지애’를 느꼈다. 허준은 지난달 로러스에서 광주시청으로 적을 옮겼다. 그는 전 소속팀에 대한 감사함을 전하면서 새 팀의 장점에 대해 말했다. “여럿이 있어서 좋다”였다. 로러스의 펜싱 선수는 허준 혼자였던 것이다.

sportsfactory@sportsq.co.kr

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관련기사

주요기사
포토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