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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그날' 유자광, 세조부터 중종까지 5대왕 '간신의 길'을 걸었던 이유...'남이의 옥' '무오사화' 등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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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그날' 유자광, 세조부터 중종까지 5대왕 '간신의 길'을 걸었던 이유...'남이의 옥' '무오사화' 등 주도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8.04.01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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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유자광’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간신’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만우절인 1일 오후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2부작 ’간신‘ 1편으로 ’고발의 달인 유자광‘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들을 재조명해 본다.

‘간신(奸臣)’은 ‘간사한 신하’를 일컫는 말이다. 유자광은 조선시대 대표 간신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유자광이 걸었던 간신의 길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보는 시간이 될 전망이다.

 

'역사적 그날' 유자광 [사진= KBS 제공]

 

유자광은 남이 장군을 고발한 역사적인 고자질꾼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날 ‘역사적 그날’에서는 그 과정을 살펴본다.

유자광(?~1512)은 전라북도 남원시 고죽동 황죽마을에서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서얼 출신이다.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정치계의 전면에 나선 뒤 예종 때에는 고변을 통해 ‘남이의 옥’을, 연산군 때에는 무오사화를 주도했다. 그는 평생 '서얼 출신으로서 온갖 설움을 겪으며 한을 품고 살았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유자광은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5대에 걸쳐 관직에 올랐다. '역사적 그날'에서는 유자광의 고자질로 변을 당한 93명의 명단도 소개했다. 

예종이 즉위한 지 두 달이 된 어느 날, 유자광은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고한다. 유자광의 고변(告變)으로 남이는 국문을 당하고, 고문 끝에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유자광의 고발대로 남이는 정말 역적이었던 것일까?

‘남이의 옥’ 이후 유자광은 예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날 패널들은 남이의 추국 현장을 재현해 보고 ‘고발의 달인’ 유자광의 면모를 되짚어 본다.

유자광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온 계기는 무엇일까? 세조 13년, 함길도에서 일어난 반란은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이 때 불안해 하는 세조에게 반란을 진압하겠다는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어찌 이제까지는 한 장사도 이시애의 머리를 참하여서 서울에 바치는 이가 없습니까? 스스로 싸움을 하여 쾌하게 이시애의 머리를 참하여 바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편지의 주인공은 바로 유자광이었다. 그는 이 편지 한 통으로 세조의 신뢰를 얻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유자광은 궁궐을 지키던 병사에서 지금의 국방부 인사 담당 국장인 병조정랑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세조는 서얼 출신인 유자광을 발탁하기 위해 별시를 쳐 합격시키기도 하였다. 

 

'역사적 그날' 유자광 [사진= KBS 제공]

 

하지만 유자광의 삶은 명성만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다섯 명의 왕을 모시면서 세 번이나 공신의 반열에 올랐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신하들 사이에서 항상 따돌림을 받았다.

품계는 높았지만 항상 그에게는 멸시가 뒤따랐다. 심지어 그의 시가 적힌 현판이 불에 타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현판을 불에 태운 이는 자신보다 품계가 훨씬 낮았던 김종직이었다. 유자광이 자신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이 사건과 관련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도 이날 ‘역사적인 그날’에서 알아본다.

하지만 간신의 길은 비극이었다. 유자광의 고발은 연산군 대에도 멈추지 않는다. 연산군에게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의 사초를 고발했다. 연산군 4년(1498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을 내세워 무오사화를 주도하였다.

이 조선 첫 사화를 계기로 김종직의 제자들이 화를 당했다. 김종직의 문집을 불태우고 김종직의 시 현판도 불태우고 부관참시까지 시행한다.  

역대 임금이 볼 수 없었던 사초를 공개해 연산군의 마음을 얻었다. 하지만 이같은 고발은 이후 빗발치는 탄핵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이극균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유자광의 생명력은 질겼다. 1506년 복직된 유자광은 그해에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반군이 궁궐에 진입할 수 있게 도왔다. 이때의 공으로 중종이 즉위한 뒤에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유자광의 종말도 불행했다. 하지만 이같은 고발은 이후 빗발치는 탄핵으로 이어지고 평해로 유배됐다. 유자광은 1512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날 ‘역사적 그날’에서는 ‘저격수’의 삶을 살아야 했던 '서얼' 출신 유자광의 삶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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