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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설민석 강의, 초토화 작전·계엄령선포·빌레못학살의 배후는? (KBS 제주4·3 70주년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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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설민석 강의, 초토화 작전·계엄령선포·빌레못학살의 배후는? (KBS 제주4·3 70주년 특집)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8.04.0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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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한국사 강사인 설민석이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특강을 하면서 목이 메었다.

설민석은 3일 오전 11시부터 50분 동안 KBS 1TV를 통해 방송된 ‘4·3 70주년 설민석의 역사특강’에서 ‘당신이 몰랐던 제주이야기’라는 주제로 강의하는 도중 당시 참혹했던 증언들을 소개하며 연방 눈시울을 적셨다.

때로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설민석의 강의를 듣던 관객들도 70년 전의 비극적인 역사를 마주하며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이날 설민석의 역사특강은 오전 10시부터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故 노무현 대통령 이후 12년만에 참가한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이어 방송돼 그 의미를 더했다.

이날 설민석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7년여에 걸쳐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로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이날 설민석은 1945년 8.15 광복 후부터 미군정 기간, 그리고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소외당했던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소 냉전이 시작되는 시공간적 배경에서 제주도가 왜 사회주의자의 섬 ‘빨간 섬’으로 낙인 찍혔는지, 4·3사건의 배경의 발발 배경과 참혹한 초토화 토벌과정, 오랜 기간 금칙어로 여겨져 말도 꺼내지 못해야 했던 생존자와 가족들의 고통 등에 대해 특유의 호소력 있는 발성과 제스처, 그래픽 등을 섞어 설명했다.

설민석은 근·현대는 물론 제주도의 오랜 역사도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했다. 광해군과 추사 김정희 등의 유배지였고, 일제강점기 막판에는 일본군이 미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군사 요새화했고, 광복 이후에는 일인들이 가장 뒤늦게 나간 데다 일제에 부역했던 경찰들과 서북청년회, 서울에서 지원나온 응원경찰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같은 사례들은 우리 역사에서 제주도가 얼마나 오랫동안 소외됐던 지역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했다. 이 때문에 제주에는 역사의 상흔과 아픔이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제주 4·3사건에 미군정은 책임이 전혀 없을까? 미군정 기간이던 1946년 말 군정경찰 간부 82%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는 것만 생각해도 한국 국민들의 보호보다는 미군정의 편의가 더 우선시 됐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주 4·3 초토화 작전에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미군정은 제주 4·3 당시 군과 경찰에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다. 

1946년 8월 1일 전라도에서 분리돼 제주도(道)로 승격됐지만 무늬와 달리 제주도민들에게는 더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높아진 실업률, 전염병 창궐, 흉작, 경제적인 어려움, 경찰기구 확대 등 온통 제주도민들에게는 헤어나기 힘든 현실만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제주 경찰은 101명이었으나 1947년 2월에는 330명으로 증원됐다.

제주 4·3사건의 맨처음 계기는 기마경찰 말발굽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고 발생이었다. 이에 항의하는 주민에게 경찰은 사건 규명과 사죄 대신에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15살 어린이와, 젖먹이와 21살 엄마도 포함됐었다고 한다. 진상규명과 경찰 책임 규명, 책임자 처벌에 대한 요구는 주민의 당연한 권리였지만 이를 공권력은 억압과 총으로 진압하려 했다. 이같은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특히, 28년 전 조국독립을 외쳤던 숭고한 3·1절 기념행사에서 벌어진 경찰의 무모한 진압은 제주 4·3의 도화선이 됐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사건을 원만하게 수습할 기회는 있었다. 문제는 그 기회가 강경한 세력에 의해 배격되었다는 점이다. 제주신보 기자들의 중재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경찰의 책임규명과 사과는 업었고 1947년 3월 10일 제주도민들은 총파업에 돌입한다.

 

 

 

3·10 총파업은 제주도 내 관공서, 통신기관, 기업인, 자영업자, 학교, 경찰 등 166개의 단체, 4만1211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었다. 이정도면 부정할 수 없는 민심이었을 터지만 위정자들은 이를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강경한 대응 방식을 택했다. 일련의 상황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를 생각나게 한다.

당시 중문지서 경찰관들은 같은 주민에게 총을 겨눌 수 없었다. “우리 중문지서 직원 일동은 오늘까지 치안확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봉직하여 왔으나 금번 발포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희생적 정신은 수포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악독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으므로 직장을 떠난다”고 선언한 당시 그들이 담화는 위정자들에게는 헛된 메아리에 불과했다.

당시 경찰을 대표하던 조병옥은 당시 제주도청 연설에서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공공연히 발언을 내뱉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건국인지를 망각한 발언으로밖에 볼 수 없다.

당시 제주에는 서북청년회도 중앙의 응원경찰과 함께 들어왔다. 해방 이후 평남, 함북, 함남, 황해청년회 등 이북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우익 집단이었다.

이처럼 흡사 진압군처럼 제주도에 들어온 경찰과 서청 등에 의해 1947년 한 해 동안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검거와 고문을 당했다고 하니 그 공포를 짐작할 만하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1일 새벽 2시에 일어났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의 슬로건을 걸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4월 3일 당시 경찰과 우익인사 12명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번지자 군 투입이 논의됐을 것은 뻔한 일이다. 앞서 조선경비대 제9연대는 1946년 11월 16일 도제 승격 이후 모슬포에서 창설됐고, 4·3 직전 병력은 80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 김익렬 경비대 제9연대장은 “제주도 내에 있는 경찰과 주민들 사이 마찰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므로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며 협상을 택했다.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은 서귀포시 구억리에서 4·28 평화협상을 가졌다. 당시 무장대 요구사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반대, 응원경찰 철수, 무장대 신변보장 등이었다. 평화협상 합의내용은 네 가지로 72시간 내에 전투 완전 중지, 점차적인 무장대 무장 해제, 주모자 신변 보장, 무장대 귀순 절차 마련이었다.

하지만 평화협상은 5월 1일 우익 청년 단원들에 의한 ‘제주읍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며 무위로 돌아갔다. 과연 방화사건의 배후는 누구일까? 당시 방화사건 상공에서 미군정찰기가 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후일에 알려지며 미군정의 사전 의도설 등이 일었다. 어쨌든

제주읍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 대토벌작전의 계기가 됐다.

1948년 5월 5일 미군정은 제주도사태 관련 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회의는 미군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제주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이 모인 군·경 수뇌부 회의였다.

국가가 혼란스러울 때 힘을 얻는 쪽은 강경파가 되기 쉽다. 미군정은 협상파인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박진경 연대장을 부임시켰다.

설민석 강사가 이날 강의에서 전한 박진경 연대장의 증언은 가히 충격적이다.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급기야 박 연대장은 1948년 6월 18일 피살당하고 만다.

이후 무장대에 대한 초토화 작전과 계엄령이 진행된다. 하지만 제주 토벌작전은 차질이 생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와 순천 등을 점령한 ‘여수·순천 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 무장대에 대한 정부의 토벌정책은 무자비했다. ‘좌익세력들을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앤다’는 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1948년 10월 17일 초토화 작전이 선포됐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 무허가 통행금지에 들어간 자는 이유 불문하고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라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제주도 중산간 소개령이 떨어졌다. 중산간 주민들이 무장대의 가담할 우려를 차단하기 위한 집담 이주 명령으로, 무장대 보급 차단을 위해 마을을 불태웠다. 

이 초토화 작전 동안 4·3희생자의 70~80%가 학살당했다고 한다. 강요백 화백의 그림처럼 한마디로 ‘광풍’이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설민석 강사는 1948년 12월 10일 발생한 비학동산 총살사건의 피해자 증언을 소개하면서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유도 모른 채 잡혀간 13살 어린 안인행은 자신을 안은 어머니가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경찰들이 당시 피해자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대검으로 확인사살까지 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경찰들이 “총에 덜 맞은 놈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일일이 대검으로 찔렀으나 어머니 밑에 깔려 있어서 무사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온몽으로 총알을 막으며 어린 안인행을 보호했던 것이다.

안인행은 2001년 8월 21일 애월읍 장전리에서 채록할 당시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하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증언들도 잇따랐다. “60대 노부부인 안만규·김인하는 손녀(3살)와 손자(1살)를 데리고 급히 냇가로 굴을 찾아 피신했다. 그런데 아기 울음소리가 새나가고 말았고 진압군은 굴 속으로 수류탄을 던져 모두 폭사시켰다. 1948년 11월 15일에 벌어진 표선면 가시리 학살사건이다.

1949년 1월 16일에 발생한 ‘빌레못굴 학살’ 사건을 설명하던 설민석 강사와 이를 듣던 방청객은 모두 당시의 공포에 전율을 떨어야 했다. 주민 28명이 굴 안에서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 들켰고, 그 중 토벌대는 3살 어린이의 두 다리를 잡고 바위에 패디기쳐 학살시키는 등 남녀노수 15명이 희생된 사건이었다. 설 강사는 자신도 3살 아빠라며 차마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에 복받쳤다.

 

 

 

이날 설민석 강사는 마지막 부분에 2004년 9월에 사망한 故 진아영 할머니를 소개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진 할머니는 제주 4·3 사건 당시 총을 맞아 턱을 잃어 평생을 고통속에 살았다고 한다.

설민석 강사는 “평생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늘 위장병에 시달렸던 할머니에게 그 고통보다 아마도 그날의 참상을 평생 말하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아픔이 더 컸지 않았을까”라고 짐작했다.

제주 4·3사건 진상보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민 30만 명 중 10분의 1인 3만여 명이 당시 학살을 당했다.

7년이 넘게 자행된 비극의 역사인 제주 4·3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뒤에도 반공과 친미를 외친 군부정권에 의해 ‘금칙어’가 당해야 했다.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에서 처음 세상에 나왔지만 현기영은 그 일로 사법당국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야 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까지 ‘금기의 역사’로 이어졌고 생존한 가족들은 연좌제의 굴레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김대중 정부시절이던 2000년 1월 12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며 비로소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고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그리고 2003년 10월 15일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채택됐다.

 

 

 

2003년 10월 31일 故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고 말했다.

설민석 강사는 “4·19 혁명, 광주 5·18, 6월 민주화 항쟁 등 현대사의 아픔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역사가 제주 4·3 사건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4·3 사건 강의를 준비하면서 가장 아파했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놨다.

우리 국민에 의해 같은 우리 국민 3만명이 무자비하게 살해 당한 사건. 그러나 오랜 동안 누구도 입밖으로 꺼낼 수 없었고 공론화할 수도 없었고 이름조차 없었다. 제주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는 그런 비극의 역사를 대변한다. 희생자는 있었지만 비석에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아픔의 역사이자 폭압의 역사였다. 설민석 강사는 마지막으로 “이 슬픔과 비극 속에서 또 하나의 희망을 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제는 추모할 수 있고 아픔을 나눌 수 있다”며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역사적 진실을 되새겼다.

[사진= KBS 1TV  ‘4·3 70주년 설민석의 역사특강-당신이 몰랐던 제주이야기’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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