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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광조, 중종의 남자가 된 이유와 기묘사화 주동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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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광조, 중종의 남자가 된 이유와 기묘사화 주동자는?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8.04.2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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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하룻밤 만에 조광조의 몰락을 초래한 의문의 사건 ‘기묘사화’, 그 사건의 배후는 누구일까?

22일 오후 방송되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가였던 ’중종의 남자‘ 조광조의 생애와 그의 죽음을 앗아간 기묘사화의 전말을 돌아본다.

 

 

 

이날 방송에서는 조광조가 조선 정치세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중종의 신임을 얻었던 과정, 그리고 개혁가로서 겪어야 했던 험난한 일정과,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정치 개혁을 되짚어보고, 조광조를 정치계 혁신 리더에서 죽음의 세계로 빠트린 기묘사화의 배경을 재조명한다.

유교적 이상정치를 꿈꾼 조광조(1482~1519)의 개혁 정신은 어디서부터 싹텄을까? 조광조의 스승은 김굉필이었다. 

김굉필(1454~1504)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중이던 유학자로, 지금으로 말하면 시국사범이었다. 평안도 희천에 유배 중이었다. 강단 있는 김굉필에게 학문을 전수받은 조광조는 성균관 유생이 된 후에도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며 자신의 소신을 펼쳤다.

조광조는 어떻게 중종의 마음을 얻었을까? 이 중종실록의 기록은 그 이유를 짐작케 한다.

“대간은 구제하여 풀어 주어서 언로를 넓혀야 하는데, 도리어 언로를 훼손하여 먼저 그 직분을 잃었으니...”

중종 10년 11월, 조광조는 조선시대 언론기관인 사간원의 신입 관료가 된 지 이틀만에 중종 앞에서 사간원과 사헌부 관리들을 모두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종은 당시 반정에 공을 세운 신하들의 권세에 위축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들은 조광조의 직언은 중종의 마음을 흔들었다. 패기 있고 소신 있는 그의 행보가 중종의 시선을 끈 것이다.

 

 

 

조선시대 천재지변은 개혁이나 정계개편의 적기였다. 중종 13년, 전국적으로 큰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을 잘못된 정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생각한 조정에는 개혁 바람이 불어닥친다. 조광조도 올바른 정치를 위한 개혁안을 주장하고 나선다.

그 기본은 유학 이념의 정착이었다. 조선에 도교식 제사를 하는 소격서 폐지, 새로운 인재발국 등용문인 현량과 실시 등이 핵심 내용이었다.

혁신적인 정책에 대해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광조는 개혁을 몰아부쳤고 이에 위기를 느끼는 세력들이 생긴다.

 

 

 

중종 14년 11월 11일, 조광조의 희망대로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개정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나흘 뒤 조광조는 한 밤 중에 체포된다. 한 달 후 그는 유배지에서 개혁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기묘사화였다. 궁궐에서 ‘走肖爲王(주초위왕)’이 새겨진 나뭇잎이 발견됐다. 네 글씨의 뜻은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왕의 남자 조광조’는 왜 죽임을 당했을까? 이날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기묘사화의 배후를 확인한다.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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