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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Guitar]③ 록의 정신적 혁명을 만든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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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Guitar]③ 록의 정신적 혁명을 만든 기타리스트
  • 김신일 음악평론가
  • 승인 2015.01.0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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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록(Rock) 음악을 한마디로 딱 잘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록은 강렬한 비트에 사회비판과 저항 정신, 진취적 도전 정신, 젊은이들의 욕구를 실어 샤우트 창법으로 분출하는 대중 음악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지난 70~80년대 주류를 이뤘던 하드록, 헤비메탈, 스래시 메탈, 데스 메탈 등의 록 장르는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졌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선두격인 비틀즈의 성공 이래 록 밴드는 보컬, 리드기타, 베이스기타, 드럼의 악기 편성이 정형화되었고 열정적인 전자기타와 드럼 연주는 록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특히 록의 발전과 함께 무대 전면에 나서 현란한 연주를 펼친 기타리스트들은 전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다. 록 기타리스트들은 점차 고도의 테크닉과 퍼포먼스로 무장하며 록 팬들을 사로잡았다. 록과 재즈의 역사를 살찌운 전설의 기타리스트 이야기를 연재한다.

[스포츠Q 김신일 음악평론가] '록' 음악과 다른 대중 음악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이다. '록' 음악을 일정한 리듬이나 형식을 갖춘 장르로 특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을 관통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들 말한다. 바로 '록 정신'이다. '록 정신' 역시 명쾌하게  정의한다는 게 불가능하지만 '록'의 뿌리에 '저항, 변화, 혁명'이라는 반골 기질이 흐른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이같은 '록 정신'은 혁명적인 사고를 갖춘 뮤지션들에 의해 창조되고 발전됐다.

▲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미국 뉴욕주 우드 스톡 인근의 베델 평원에서 열린 '우드 스톡 페스티벌'은 반전과 히피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점에서 저항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이 페스티벌은 록 음악사에 큰 줄기의 정신을 형성했다. 사진은 당시 페스티벌의 다큐멘터리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다. [사진= 스포츠Q DB]

프랭크 자파 (Frank Zappa, 1940~1993) "용감한 사회비판과 끊임없는 변혁의 탐닉"

1995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의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오르기도 한 '프랭크 자파'는 기타리스트를 넘어 노래와 프로듀서, 믹싱 엔지니어, 영화감독, 시사평론가까지 자신의 끼의 영역을 넓힌 문화혁명가이다.

프랭크 자파는 1964년 '마더스 오브 인벤션'(Mothers of Invention)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였고 밴드의 리더로 활동하던 시기의 '위어 온리 인 잇 포 더 머니'(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7년발매) 앨범에서 향후 그가 보여줄 사이키델릭의 광기어린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음악은 블루스와 싸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가 바탕이 된 사운드였지만 록과 재즈를 접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여러 장르를 자신의 음악과 엮는 시도를 하였다.

재즈록의 시초로 평가 받는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비치스 브루'(Bitchs Brew, 1969년 발매)가 발매되기 전의 앨범에서 보여진 그의 사운드는, 재즈가 발전하고 변혁한 가치를 방불케 할 정도의 위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현대의 사회체제에서 비롯된 기회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고급과 저급 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한 퍼포먼스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담하고 창조적이고 전위적인 사운드는 '비틀즈'와 '록', '재즈밴드'에 영향을 주게 되고, 그의 '비판 코드'는 현대 록의 사상과도 같은 반사회적 성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프랭크 자파'는 단순히 장난스럽게 사회를 비판하려 했던 '이슈메이커'가 아니었다.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특유의 해학적이고 가식적이지 않은 사상으로 담아내며 록 문화의 혁명을 이끈 진정한 록 아이콘이었다.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 "진중하고 조용한 비틀즈의 철학자"

'조지 해리슨'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회 헌액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밴드인 '비틀즈'의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비틀즈 멤버인 '존 레논' '폴 매카트니'의 빛에 가려진 '고독한 3인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음악뿐만이 아닌 종교, 문화, 패션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1970년 '비틀즈'의 해체 이후에도 솔로로 활동하면서 그 역량을 뽐냈다.

'비틀즈'는 세계적인 록밴드로 부상하게 되고 1970년대의 음악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조지 해리슨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부담감을 떨치지 못하고 인간 본연의 실체에 대한 생각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특히 '힌두교'와 같은 동양문화와 사상에 심취하기도 하였으며 인도 악기인 '시타르'(Sitar, 인도악기 일종으로서 현으로 줄을 튕기는 기타 형태로 이루어진 신비한 음색의 악기)를 대중들에게 전파하기도 하였다.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다수의 곡들('Something', 'Here Comes The Sun')은 아내였던 '패티 보이드'(모델) 등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졌던 '에릭 클랩튼'(Eric Clapton)과 음악 작업을 같이 하기도 하였는데, 아내 패티 보이드가 에릭 클랩튼에게 마음이 끌려 바람을 피우게 된다. 그럼에도 에릭 클랩튼과의 우정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관포지교와도 같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패티 보이드는 다시 조지 해리슨의 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그 실연으로 인해 절망감을 느꼈던 에릭 클랩튼은 그 마음을 곡으로 표현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 바로 그 유명한 '레일라'(Layla)라는 곡이다.

조지 해리슨은 그 이후 아내와 이혼하게 되면서 외향과는 상반(?)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이후 그는 한 명의 기타리스트를 넘어 조용하고 진중한 철학이 바탕이 된, '또 다른 비틀즈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단지 기타 파트를 위한 음악 측면만 보지 말고 끊임없이 영적 행위를 추구한 뮤지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 본다면, 조지 해리슨의 음악 세계관을 비로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커트 코베인(Kurt Cobain, 1967~1994) "기억하라.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순간 불타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보컬 겸 기타리스트인 커트 코베인이 이끄는 '너바나'(Nirvana)의 '네버마인드'(Nevermind) 앨범의 성공으로 록계는 상당한 변혁이 일어나게 된다.

'너바나' 이전의 록 음악은 '스래시 메탈'(Thrash Metal)이나 '엘에이 메탈'(L.A Metal) 등 직선적이고 대중적이며 보다 탄탄한 연주력에 기반을 둔 사운드가 주류였다.

그런 장기자랑 밴드가 범람했던 시대에 커트 코베인은 사운드 보다 사회 비판적인 '펑크'(Punk)정신의 가치를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에 표현했으며, 이전의 '헤비메탈'(Heavy Metal) 사운드가 '펑크' 사운드로 변화되는 혁명의 시발점을 만들게 된다.

그는 음악 외적으로 남성 우월주의인 '마초이즘'의 주류문화에 대한 비판을 퍼포먼스로 드러내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록의 '배금주의'를 비판했던 그의 밴드가 오히려 주류로 인기와 돈을 벌게 되자 자신의 그러한 모순적인 행방에 괴로워 하게 되고 헤로인에 중독이 되기까지 한다. 급기야 우울증으로 인해 공연을 취소하는 돌발행동이 많아졌고 혼자만의 고립된 은둔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영향받은 우울한 삶의 과정, '너바나'의 결성, 그리고 자살...

짧지만 거대한 드라마같은 그의 인생은 어쩌면 '록의 전형적인 사상과 타고 난 필연의 만남'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끊임없이 록의 사상을 갈구하였고 그 자족감이 미치지 못하였을 때 '무소유'를 선택했다. 우울한 시대가 만든 진정한 록커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가 멈추지 않는 한 그의 록 정신은 영원히 불타오를 것이다.

 

존 프루시안테 (John Frusciante, 1970) "악동 록밴드 레드핫칠리페퍼스의 기타리스트"

존 프로시안테(이하 존)는 '레드핫칠리페퍼스'(이하 RHCP)의 원년 기타리스트 멤버인 '슬로박'(Slovak)의 사망 이후 오디션을 통해 차기 기타리스트로 영입되었는데, 멤버가 되기 전에는 RHCP의 열정적인 팬이었다고 한다.

RHCP는 펑크 정신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으면서도 '펑키'(Funky)와 '랩'(Rap)을 간결한 사운드(때론 거칠게) 구사하는 록밴드이며, 음악의 구성에 있어서 기술과 감성의 완벽한 공존을 이끌어 낸 최고의 록밴드이다.

이들의 성공작인 1991년 앨범 '블러드 슈가 섹스 매직'(Blood Sugar Sex Magik)은 '퓨전재즈'(Fusion Jazz)를 방불케 할 정도의 펑키 사운드에 대한 해석력이 돋보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유롭고 거친 듯한 플레이는 재즈가 아닌 록의 평크 정신으로 무장한 밴드란 걸 잘 말해준다.

그런 물과 기름같은 모순적이고도 묘한 '펑키'(Funky)와 '펑크'(Punk)의 공존이 그들에게 중독시키는 장치가 되었고, '존'은 이 밴드와 가장 잘 부합하면서도 재밌고 창조적인 사운드를 창출한 기타리스로 인정받았다..

'존'은 항상 속옷을 바지보다 치켜입는 흥미로운 패션 테러리스트(?)였는데, 사실 그런 패션의 전신은 'RHCP'가 오래전부터 '우드 스톡'(Wood Stock) 공연에서 선보인 그것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RHCP는 주로 양말로 중요한 부위(?)를 가리는 나체공연을 즐겨했으며 1994년 '우드 스톡' 공연에서의 '전구 모양 의상'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그들만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존'은 '블러드 슈가 섹스 매직' 앨범을 낸 후 '록 정신'의 요소이기도 한 인디의 괴리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탈퇴를 결심하게 된다. 탈퇴 후 그는 헤로인 중독에 빠져 심신 모두가 황폐해져만 갔다.

RHCP 멤버들의 구애로 1999년에 다시 재결합게 된 '존'은 이들 특유의 '그루브'하면서도 '펑크'와 '랩' 사운드, 그리고 외설적이고 재미있는 가사와 퍼포먼스에 적합한 기타리스트로 평가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존'의 '인디 록'(Indie Rock) 정신은 진정한 의미의 록커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가 이 밴드에서 창출한 기타 사운드는 더욱 더 RHCP다운 밴드를 지향하게 한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RHCP는 2012년 4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하였다.

 

kimshinil-_-@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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