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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경평축구대항전' 남북 평화무드 타고 70여년만에 부활할까 (스포츠전시회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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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경평축구대항전' 남북 평화무드 타고 70여년만에 부활할까 (스포츠전시회 탐방)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8.11.17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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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가 소환한 '축구의 추억'

[스포츠Q(큐) 글·사진 류수근 기자] 우리나라 축구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광의의 의미에서의 축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둥그런 물체를 가지고 놀았다는 의미의 '축국(蹴鞠)' '농주(弄珠)' '구희(球戱)'라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컫는 근대 축구는 구한말 영국인에 의해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에 전해진 근대 축구는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는다. 일제강점기에 축구는 현재의 서울인 경성을 들썩이게 한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남북평화무드에 '경평축구'의 추억도 시나브로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 전시회 모습

특히 경성팀과 평양팀이 승부를 겨뤘던 경평축구대항전(경평대항축구전)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전조선인 수만 명이 한 데 모여 열띤 응원을 펼치면서 큰 축제의 양상을 띠었다.

올초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고 있는 평화무드에 힘입어, 남북한은 동계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서 잇따라 동시 입장과 종목별 단일팀 구성에 성공하는 등 그 어느때보다 활발한 스포츠 교류를 하고 있다. 이런 화해 분위기 속에서 70여 년 간 열리지 않은 경평축구의 재개에 대한 희망의 싹이 다시 솟아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 전시회 모습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 9월 18일부터 11월 11일까지 박물관 로비에서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라는 주제 아래 서울과 평양이 함께 했었던 축구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재조명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구한말 축구의 시작부터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들썩이게 한 각종 축구 대회까지 한국 축구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 전시회 모습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가 개최되는 등 희망의 불씨가 피어나는 듯했으나 그후에도 경평축구는 부활하지 못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마련했던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의 전시 현장을 통해 우리나라 축구의 역사부터 일제강점기 경평축구대항전(경평대항축구전)의 역사를 살펴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같은 열기와 함성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개최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 우리나라 근대 축구의 역사

서양식 근대 축구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이 서양 열강들과 교류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번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 전시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몇 안 되는 귀중한 사진들과 함께 설명을 자세히 곁들였다.

짚으로 만든 축구공

1883년 조영수호조약을 앞두고 조선으로 들어와 제물포에 정박해 있던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 선원들이 부둣가에서 공을 찼다. 선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선인에게도 축구를 가르쳐 주었다. 여기에 흥미를 느낀 조선인들은 영국인들이 두고 간 축구화를 신고 축구공을 찼고, 이렇게 우리나라 근대축구는 시작됐다.

구한말 훈련원 전경
완공 후 경성운동장 모습

883년 갑오개혁 이후 실시된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도입된 근대 교육제도의 시행은 축구의 인기에 순풍 구실을 했다. 과거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체육이 당당히 학과목으로 채택됐고, 학생들에게도 체계적인 체육활동이 권장됐다.

당시 설립된 배재학당, 경신학교, 보성학교, 휘문의숙 등 근대학교들은 이후 축구를 비롯한 근대 스포츠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다.

외국어학교 학생들이나 졸업한 정부관료들까지도 휴일이면 훈련원에서 축구를 했다는 기록이 신문과 사진으로 전해진다. 오늘날 조기축구회의 역사가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훈련원은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 구한말 축구는 ‘들어 뽕’ 축구였다

경성운동장 사진엽서

하지만 구한말 축구는 요즘 현대 축구와는 많이 달랐다. 축구장은 라인도 그리지 못해 경기가 치러지는 공터 전체를 이용했고 골대는 돌멩이를 놓아 표시했다. 선수들은 한복차림에 상투를 틀고 짚신이나 고무신을 끈으로 동여매 신고 공을 찼다.

축구공은 새끼줄로 둥글게 만들거나 소나 돼지의 질긴 오줌보 안에 바람이나 물을 넣어 만들었다. 선수 15명 정도가 모이면 한 팀이 됐다.

당시에는 제대로 정해진 경기규칙도 없었다. 경기시간은 제한이 없어 어느 한쪽이 기진맥진해 항복하면 종료되는 식이었고, 공이 골키퍼 머리 위로 넘어가면 골인이었다. 그런 만큼 당시 축구는 빠르게 뛰어 공을 높고 멀리 차낼수록 잘하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축구공

“그때의 축구는 아식축구라는 것이었다. 인원은 몇 사람이던지 제한이 없으며 양편이 동수면되었고, 문에 대하여도 넓이와 높이의 한정이 없이 문직이의 키를 표준으로 하였으며... 경기시간도 일정하지 않고 어느 편이고 항복을 하여 백기를 드는 시간이 끝나는 시간이며 점수가 많은 편이 이기는 편이었다. 기술에 있어서는 뽈을 ‘쯔리빙’ 한다던가 ‘패스’ 하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높이 차는 것을 ‘들어 뽕’이라 하여 이것을 기술로 알았다.“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이 소개한 ‘배재80년사’(1965)의 내용이다.

◆ 들불처럼 번진 축구 열기, ‘산아이거든 풋뽈을 차라’

당시 축구는 상당히 빨리 보급되었다. 1900년대 들어서면 그 인기가 상당해졌다.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남자라면 동소문 밖 삼선평이나 장충단, 보성학교나 배재학당운동장 등에 모여 축구공을 차는 게 일상의 일부분이 될 정도였다.

구한말 축구경기 관련 사진들 

특히, 시내에 있던 학교 운동장들은 많은 축구인들이 애호하던 장소였다. 이번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에서는 당시 운동장이 좁아 공이 운동장 밖 민가로 날아가는 일이 잦아 주민들과 다투는 일도 많았다는 흥미로운 일화도 소개했다.

축구 열기는 축구용품점도 낳았다. 1910년쯤에는 경성 시내에 축구공을 파는 상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즈음부터 축구구락부(클럽)도 곳곳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국권을 상실한 나라의 축구인들은 마음껏 공을 찰 수도 없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점차 식민지화 하면서 대규모 군중이 모이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1907년에는 보안법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축구대회가 제약을 받기도 했다.

구한말 축구를 소개한 독립신문

하지만 한반도에 휘몰아친 축구 열기는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타올랐다. 오히려 체육단체가 창립되고 각종 축구대회가 열리면서 축구 열풍은 더욱 거세어졌다

1920년 11월 잡지 ‘개벽’ 제5호에 게재된 논설 ‘산아이거든 풋뽈을 차라’는 ‘조선은 어려서부터 업혀 길러지는데다 꿇어앉는 습관 때문에 다리가 짧고 양복을 입어도 폼이 안 나니 야구나 정구도 좋지만 축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축구하면 조선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시대 우리나라 축구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 조선체육회와 전조선축구대회, 그리고 연보전(보연전)

1910년대에 전국적인 축구 열풍으로 각 학교와 도시마다 축구팀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20년에는 일제가 조직한 조선체육협회에 맞서 조선체육회가 창립됐다.

일제강점기 체육단체와 체육활동 일지

‘전조선축구대회’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축구대회였다. 이 대회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전국 규모로 가장 오랫동안 치러진 대회였다.

1921년 배재고보에서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린 이후, 1927년부터 매년 가을 경성운동장에서 소학부(초등학교)·중등부(중고등학교)·전문부(대학교)·청년부로 나뉘어 개최됐다.

전조선축구대회 입장식 모습

선체육회가 주최한 전조선축구대회는 1925~1942년 관서체육회 주최로 매년 봄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축구대회와 함께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축구대회로 자리매김했다.

이 대회 입장료는 20전이었다. 1전(錢)은 오늘날 약 94원으로, 당시 설렁탕 한 그릇이 15전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만만치 않은 입장료였다.

제7회 전조선축구대회 기념사진. 1926년 제7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평양의 무오축구단과 경성의 조선축구단 선수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라고 한다.  

1월 쌀쌀한 날씨임에도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리면 당시 경기장은 대만원을 이루었다. 경기는 과열된 나머지 선수들이 심판 판정에 불복하고, 응원단 간에도 편싸움이 일어나 승부가 가려지지 못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조선축구대회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맞대결은 ‘연보전(보연전)’이었다.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연보전

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축구부는 당시 뛰어난 실력을 갖춘 대표적인 팀이었다.

두 팀은 1927년 제8회 전조선축구대회 준결승전에서 승부를 겨룬 이후, 총 21회 대회 중 9번이나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광복 이후에는 연고전(고연전)으로 이어진다.

◆ 전국의 향토열을 고취시킨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축구의 높은 인기와 더불어 전조선축구대회 외에도 크고 작은 축구대회가 열렸다. 도시 곳곳에 많은 축구팀도 생겨났다.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우승컵과 깃발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여운형은 1936년 4월 경성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전국 도시의 향토열을 고취시키기 위해 창설된 이 대회에는 경성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 10개의 도시 대표팀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조선불교청년회축구단 우승기념 사진

하지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는 큰 부침을 겪어야 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정간되면서 대회도 중단됐다.

그러나 이 대회는 1938년 각 도시 축구인들의 성원으로 조선일보사에 의해 되살아났고, 참가도시가 늘면서 대회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40년 조선일보까지 폐간되면서 대회가 다시 존폐의 위기에 몰렸다.

조선축구단, 숭실축구단, 무오축구단

조선축구협회는 대회의 명맥을 잇기 위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와 공동으로 주최하기도 하였다.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구기종목 전면금지 조치에 의해 1942년 5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 경성과 평양, 최대 축구 라이벌이 되다

일제강점기에 각 도시를 대표하는 축구팀이 승부를 겨루는 축구대회는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경성팀과 평양팀이 맞붙은 경평축구대항전(경평대항축구전)은 그 열기가 가장 뜨거웠다.

경평축구대항전 전경

일제강점기 들어 한양이라는 제 이름을 잃고 경성이 된 도시, 하지만 경성은 오랫동안 수도이자 한반도의 중심 거점도시로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가졌고, 평양은 상공업이 발달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근대 문물을 앞서 받아들인 도시였다.

이러한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팀이 생겨나면서 두 도시간의 축구대회가 열렸다. 이 경평축구대항전은 1929년 10월부터 1946년까지 경성과 평양에서 총 8회에 걸쳐 모두 23차례의 경기가 펼쳐졌다.

경평축구대항전(경평대항축구전)은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이 소속 도시의 자존심을 걸고 펼친 대결이었다.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

1925년부터 1935년까지 경성을 대표하는 축구팀은 조선축구단이었다. 이후 1933년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경성축구단이 창단되었다. 경성축구단은 1942년까지 활동하면서 경평축구대항전을 이끌었다.

평양에서는 숭실학교와 대성학교를 중심으로 축구가 전파되었다. 1918년 숭실학교와 대성학교 졸업생들이 모여 무오축구단을 창단했다. 평양축구단은 1933년 무오축구단을 흡수해 창단했고, 이후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팀으로 활약했다.

경성과 평양이 축구에서 강력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자 당시 경성의 변호사 최정연과 조선일보사 운동부 기자 이원용이 두 축구팀의 경기를 제안했고, 조만식과 조선일보사 부사장 안재홍에 의해 1929년 10월 9일 휘문고보에서 제1회 경성·평양 축구대항전이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경성방송국 경평축구 실황중계(왼쪽)와 경평축구대항전 입장식(오른쪽)

수를 거듭할수록 경평축구의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반도 남부에서는 경성팀을, 북부에서는 평양팀을 각각 응원하면서 흡사 남북 대결과 다름없었다.

당시 경성의 인구는 34만여 명. 그런데 1~2만여 명의 관중이 몰렸다. 모든 경기가 금세 매진되었다.

경성과 평양은 기차로 3시간 거리. 경기가 있는 날이면 두 도시를 이동하는 응원단으로 기차는 만석이었고,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양조장에서는 행인에게 막걸리를 공짜로 퍼먹이기도 했다. 1933년 대회 때는 새끼줄을 넘어 경기장으로 들어오려는 관중들에게 인분을 끼얹어 저지했다고 하니 그 당시 경평축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케 한다.

숭실전문학교 응원단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는, 평양에서 경기가 있을 때는 평양 기생들이 운동장에 나와서 평양팀 선수들에게 먹을거리를 나눠주면서 사기를 북돋워주는 이색적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해방의 환희로 다시 열린 '경평축구대항전'

경평축구 열기는 부작용도 낳았다. 순수한 애향심에서 출발했지만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지역감정으로까지 번지면서 팬들의 신경전이 거세졌다.

경평축구대항전 개막식

이에 두 도시 간의 친선 취지가 변질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게다가 수많은 조선인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을 저지하려는 일제의 영향도 겹쳐 경평축구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해방 후인 1946년 3월 경평축구대항전(경평대항축구전)이 부활했다. 당시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군정중이었지만 왕래는 가능했기 때문에 평양팀이 서울운동장(경성운동장)으로 와서 뛸 수 있었다.

경평축구대항전 응원열기 보도내용

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조치 이후 4년만에 열린 경평축구대항전은 해방에 대한 환희까지 더해져 반응은 더욱 폭발적이었다. 이번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 전시는 그 당시의 생생한 분위기도 사진으로 전했다.

부활한 경평축구대항전을 마친 뒤 선수들은 평양에서의 다음 대회를 약속했다. 하지만 분단상황이 고착화되면서 서울과 평양의 왕래가 어려워져 또다시 경평축구는 부활하자마자 또다시 무기한 휴면기에 접어들고 말았다.

◆ 경성·평양·함흥의 ‘3도시대항축구전’도 열렸다

1935년 경평축구대항전이 중단된 뒤 조선축구협회는 그 대안으로 관북의 강호였던 함흥팀을 포함해 1938년부터 3도시대항축구전을 개최하였다.

함흥축구단

지만 3도시대항축구전도 1942년 11월 5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된다. 이 대회에서 경성팀은 홈구장인 경성운동장에서 함흥팀과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경성축구단의 마지막 공식경기이자 경성운동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이처럼 3도시대항축구전이 막을 내린 배경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제의 금지조치가 있었다.

대륙 진출을 노린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까지 일으켰다. 이 와중에 조선 체육은 일제 통제하의 군사훈련으로써만 존재하게 된다.

경평축구대항전 신문광고

히, 일제는 조선인들이 한 장소에 모여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던 나머지, 1942년 구기종목 전면금지 조치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45년만에 다시 만난 ‘남북통일축구대회’

6·25전쟁이라는 민족적인 비극을 거치면서 남북 간의 축구 교류는 끝을 모른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가서야 그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남북통일축구대회  대한뉴스 보도 장면

 

1988년 남북 간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노태우 정부의 7·7선언 이후, 1990년 9월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남북한 친선축구대회 개최가 발표된다.

1990년 10월 11일, 경평축구대항전은 1946년 마지막 대회 이후 45년이 지나서야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열릴 수 있게 되었다.

남북통일축구대회 응원 모습

 

경기가 벌어진 평양 5.1경기장에는 ‘조국은 하나다’ ‘후대에 통일된 조국을 물려주자’가 적힌 플래카드들이 내걸렸고, 통일의 염원을 담은 ‘우리의 소원’이 울려퍼졌다. 관중석을 꽉 채운 평양 시민들은 ‘조국통일’을 외치며 남북 선수들을 함께 응원했다.

이날 경기가 벌어진 ‘90분’만큼은 오랜 기간 남북한 사이에 감돌았던 살벌한 전운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남북한은 축구를 통해 너무나 오랜만에 하나가 되는 마음을 느꼈다.

남북통일축구대회 이모저모 

이후, 우리 측의 제의로 2002년 남북통일축구대회와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8.15 민족대축전 남북축구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다.

하지만 남북한 간 축구교류는 꾸준히 이어지지 못하고 단발적으로 끝났다. 지난날 경성팀과 평양팀의 정기대항전이었던 경평축구의 역사성을 잇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5년만에 다시 만난 남북통일축구

해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옥류관 평양냉면이 크게 화제가 됐다. 누구나 머지 않아 평양에 가서 옥류관 냉면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이 마련한 ‘경성의 풋뽈, 그리고 경평축구’는 그 시절 경성과 평양의 축구팬들의 열정을 되새기게 했다. 경평축구를 응원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달려가 평양냉면 한 그릇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서울로 돌아오는 주말이 곧 다가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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