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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88서울올림픽 '기적의 기록', 2032올림픽 남북공동개최 '또다른 꿈'을 꾸다 (스포츠전시회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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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88서울올림픽 '기적의 기록', 2032올림픽 남북공동개최 '또다른 꿈'을 꾸다 (스포츠전시회 탐방)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8.12.14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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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글·사진 류수근 기자] 2018년 무술년(戊戌年)도 이제 20일도 채 남지 않았다. ‘88서울올림픽 30주년'이었던 올해는 평화의 축제가 된 2월 평창동계올림픽을 기점으로 스포츠가 한반도에 해빙의 기운을 몰고 왔다. 

남과 북은 14일에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제2차 남북체육분과회담을 열고 2020 도쿄하계올림픽 공동진출 및 2032 하계올림픽 남북 공동개최를 위한 세부 추진방안 등을 협의할 예정이다.

2019년 새해는 육십갑자로 기해년(己亥年)인 돼지띠 해다. 특히 황금돼지띠라고 해서 벌써부터 새해를 기다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남북한 간 해빙무드가 무르익고 있어 한민족에게도 더욱 풍요로운 한 해가 될지 주목된다.  

 서울역사박물관 88서울올림픽 30주년 기획전시회 '88올림픽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 7월 28일부터 10월 14일까지 88서울올림픽 개최 30주년을 맞이해 '88 올림픽과 서울'이라는 주제의 기획전시를 마련해 관심을 모았다.

평화와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스포츠는 앞으로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새해에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의 남북한 단일팀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2032년 올림픽 남북한 공동 개최를 향한 본격적인 기지개를 켜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88서울올림픽이 대한민국의 국격을 올렸다면 2020 도쿄 올림픽과 2032 올림픽은 한민족 전체의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축제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의 평화무드가 점점 더 성숙해진다는 조건에서다.

앞으로도 남북한 간 평화정착 과정에서 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스포츠는 통일로 가는 대한민국의 장도에서 윤활유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88 올림픽과 서울' 기회전시회가 펼쳐진 서울역사박물관 앞에는 올림픽 당시의 미니버스가 전시돼 있었다. 88서울올림픽 마크가 선명하다.

올해 7월 28일부터 10월 14일까지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88서울올림픽과 서울’이라는 주제의 기획전시가 마련됐다. 

이 전시회에서는 88서울올림픽은 물론 86서울아시안게임, 88서울장애자올림픽의 준비 과정과 환호의 순간을 접할 수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은 대회 이념인 ‘화합과 전진’ 그리고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슬로건처럼 올림픽 정신 아래 대한민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세계인이 함께 즐긴 평화의 제전이었다.

1981년 9월 30일. 88올림픽 유치결정발표 상황실 모습.

이번 ‘88서울올림픽과 서울’ 기획전시에서는 88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기까지 긴박하게 펼쳐졌던 기획과 준비 상황을 되새길 수 있는 문서들이 공개돼 시선을 집중시켰다. 당시 결제 문서들을 통해 88서울올림픽의 숨겨진 이야기와 조우해본다.

■ 올림픽, 한국인 그리고 대한민국

올림픽대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선정한 도시에서 4년마다 개최되는 국제 스포츠 경기대회이다.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표어 아래  스포츠에 의한 인간 완성과 교류를 통한 국제 평화의 증진을 도모하는 장이 되어 왔다. 

88서울올림픽 전시실 모습. 당시의 기념품들과 성화봉이 전시돼 있다. 당시 활활 타오르던 성화의 불꽃이 2032년에는 '하나된 한반도'에서 피오오를 수 있을까. 

한국인과 올림픽의 첫 만남은 아픔에서 시작했다. 한국인이 처음 참여한 올림픽대회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이었으며,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해 마라톤 종목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광복 후인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한 대한민국은 1948년 런던올림픽부터 정식 국가로 참가하였다. 이로부터 40년 후인 1988년, 서울은 당당하게 제24회 하계올림픽대회 개최도시의 품격을 드러냈다. 

'1979년 9월 21일' 올림픽 유치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 재가 기록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81년 9월 30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서울을 88올림픽대회 개최지로 결정했다. 

앞서 1981년 3월 3일 신군부세력의 실권자였던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했고, 그후 6개월 27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1981년 2월 24일. 서울시와 대한올림픽위원회(KIOC)가 제출한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대회 유치 신청서

이런 정치 상황 때문에 올림픽 개최에 대한 시각은 국내외적으로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군부가 장악한 새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벌인다는 비판이 대내외적으로 제기되었다. 실제로 1984년에는 대회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세계적인 여론이 생겨 이를 진화하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 유치 목적의 양면성

국제올림픽위원회(IOC)-서울(SEOUL) 올림픽 개최 약정서. 1981년 9월 30일 체결.

제5공화국 정부는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국가의 명운이 걸린 사안으로 설정하고 전력을 기울여 준비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 유가와 달러 가치, 금리의 하락이라는 3저 호황 덕에 고도 성장을 구가했다. 

이에 힘입어 서울은 빠른 속도로 현대화되었다. 하지만 정치·사회적으로는 혼란기였다. 서울의 거리와 대학가는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시민항쟁을 향해 발사하는 최루탄 연기로 연일 자욱했다. 거센 시민항쟁의 결과, 마침내 1987년 대통령 직선제라는 역사적 성과를 얻어냈다.

'88서울올림픽 공식음반'. 올림픽 사상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는 음반만 17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이탈리아 작곡가 조르조 모로더가 작곡하고 그룹 코리아나가 노래하였다.

1980년대는 정치와 사회, 경제적으로 더없이 요동친 격동의 시대였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는 대량소비 시대가 열렸다. 

컬러TV와 마이카 시대가 찾아왔고 대중문화가 발달했으며 스포츠 세계에서는 프로스포츠 시대 개막,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88장애자올림픽 등 기념비적인 이정표를 쌓은 시대였다.

1980년 12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의 계속 추진 지시

88서울올림픽의 준비는 제5공화국(1981.3~1988.2)이 했지만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성화가 불타오를 때는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가 집권한 제6공화국 시절이었다.  노태우는 1987년 12월 16일 직선으로 이뤄진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뽑혔고, 1988년 2월 25일 취임했다.  

정치·경제적으로 희망이 싹트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서울 시민은 물론 대한민국 국민들은 벅찬 감동으로 88서울올림픽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는 큰 자부심은 개막식은 물론 각종 종목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발길을 옮기게 했고, 자원봉사자들은 가슴에 자긍심을 가득 안고 헌신했다.

1985년 2월 8일, 88올림픽 준비단의 현판식 모습

"나에게 88서울올림픽이란 어떤 일에 있어서도 일을 겁내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 88서울올림픽을 치렀던 경험들이 나의 후일의 시간들을 지켜준 것이라 생각해요.”

88올림픽이 시민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번 서울역사박물관 ‘88서울올림픽과 서울’ 기획전시회 팸플릿에 실린 조현주 KBS 올림픽 기술요원의 코멘트는 그 설레임과 역동성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1981년 9월 88올림픽 유치활동 자료 중 IOC 위원명단 및 예상 반응. 아주지역에서 한국 김택수 위원을 비롯, 중국, 말레이지아, 인니, 뉴질랜드 등은 지지 예상. 인도는 2명 중 1명은 지지, 호주는 호의적. 1명은 중립. 일본 2명은 반대 예상. 파키스탄과 태국은 중립. 구주지역에서는 블란서(프랑스) 2명 중 1명은 지지, 1명은 중립, 서독 2명과 영국 2명, 아일랜드 2명은 중립 예상,

올림픽 개최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재정적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 그 반대급부로 국력 과시와 유무형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정확히 30년 전에 성공적으로 치러냈던 88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에게는 단순한 세계적 스포츠 행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이벤트였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 이후 30년이 채 되지 않았던 대한민국은 여전히 분단국가였고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정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88서울올림픽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룬 '한강의 기적'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 70아시안게임 유치와 반납의 역사가 준 교훈

1970년 제6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개최권 반납을 결정한 아시아경기연맹(AGF) 임시 총회 모습.

“15일 오전 9시30분 ‘드마슈트’ 대학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연맹총회’에서 입후보했던 ‘실론’(스리랑카)이 포기, 만장일치로 70년도 ‘아시안게임’을 서울에서 개최키로 결정한 것이다.”(1966년 12월15일자 동아일보)

“서울에서 열려고 했던 제6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열지 않기로 하는 이른바 한국의 대회반납이 ‘아시아경기연맹(AGF)’의 집행위원회와 평의원총회를 통해 정식으로 확인되었다. ”(동아일보 1968년 5월2일자)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난 '88올림픽까지의 올림픽 역사'.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20여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 유치에 성공하고도 형편이 안돼 반납해야 하는 가난한 나라였다. 

1966년, 아시아경기연맹(AGF) 총회에서 1970년에 개최될 제6회 아시안게임의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불안한 상황과 경제 개발로 인한 아시안게임 재정 지원 불가 등의 이유로 개막 2년을 앞둔 1968년 4월, 결국 대회를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88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발족( 1981년 11월 2일)과 86 아시아경기대회, 88올림픽대회 조직위 사무기구 통합안.

당시 대회 반납이라는 불명예로 상황이 마무리 되지 않았다. 2회 연속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게 된 태국 방콕시에 적자보상금 25만 달러를 부담해야 했다. 

이 씁쓸한 경험은 우리나라가 국제대회를 치를 수 있는 기반 시설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88올림픽 경기입장권과 경기 티켓

이후 서울은 강남을 개발하면서 국제 스포츠 대회를 고려한 도시 설계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잠실섬은 공유수면 매립공사 후 시가지로 개발되었고, 종합경기장과 아시아선수촌을 건립하여 올림픽타운으로 조성되었다.

서울은 올림픽을 준비하는 7년여 동안 ‘국제도시, 선진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서울의 도시 공간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대규모 개발이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잠실지구 종합 개발 기본계획

몽촌토성을 둘러싼 부지는 올림픽 경기장, 선수·기자촌 아파트 건립 등을 통해 대단위 체육공원으로 개발되었다. 한강은 점차 시민들이 즐기는 휴식과 여가의 공원으로 모습을 바꿨다. 

잠실종합운동장과 올림픽주경기장

올림픽 경기시설과 주요 지역 간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통망 확장도 이루어졌다. 지하철 2·3·4호선이 잇따라 완공돼 서울 시민의 발이 되었다. 

또한, 국제사회에 노출되는 가시권 지역을 중심으로 무허가 불량지구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고, 이 과정에서 신축된 고층 건물은 도시의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

 '쎄울 코리아!' 올림픽 유치 성공 '바덴바덴의 기적'

박영수서울시장 출국(1981.9.23)과 환호하는 올림픽 유치 대표단(1981. 10. 2)

1981년 9월 18일, IOC총회가 열리는 독일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으로 올림픽 유치대표단이 향했다. 박영수 서울시장을 단장으로 하는 공식 대표단 6명과 공무원, 경제계, 방송계, 민간단체 등 전방위적 지원단 106명으로 이루어진 유치대표단은 반드시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라는 특명을 받고 마지막까지 적극적인 유치 외교활동에 임했다. 

‘선더버드 작전’으로 알려진 절체절명의 특명이었다. 특명은 사실상 개최지로 굳어진 일본 나고야를 따돌리고 서울이 개최지로 선정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총회 연설문(안)과 서울시장 연설문. 1981년 9월 29일.

1981년 9월 30일, IOC총회에서 올림픽대회 개최지 투표가 진행되었다. 밤 11시45분, TV 앞에 앉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숨을 죽였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손에 든 발표문 봉투를 꺼내 읽었다.

“쎄울 피프티투(52), 나고야 투엔티세븐(27)...쎄울 코리아!”

82명의 IOC 위원들의 투표 결과 서울은 52표, 경쟁도시인 일본의 나고야는 27표를 획득하여 서울이 최종 개최도시로 확정되었다. 한마디로 '기적같은 승리'였다. 

1981년 10월 4일. 88올림픽 유치 대표단 환영식 모습.

한국은 아시아인에게는 두 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가 되었다. 두 달 뒤 86아시안게임 유치도 잇따라 성공하면서 서울은 온통 올림픽 준비 체계로 전환하였다.

■ '1979년 10월 8일' 88서울올림픽 유치 공식 선언

88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1979년 9월 5일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를 건의하고, 16일 후인 9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가 이루어지며 스타트했다. 이어 1979년 10월 8일, 당시 정상천 서울시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88서울올림픽 유치를 공식 선언했다. 

1979년 10월 8일 오전 10시. 정상천 서울시장의 제24회 올림픽 서울 유치 계획 공식 발표자료

당시 서울시장의 88올림픽 유치계획은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8일 오전 10시에 열렸으며, 발표자인 정상천 서울특별시장 이외에도, 김택수 IOC회장,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정주영 전경련회장, 박충훈 한국무역협회장, 김영선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이 배석했다.

88올림픽 유치종합대책(1981년 9월11일)과 88올림픽 유치교섭단 출국(1981년 9월18일)

당시 회견에서 정상천 시장은 ▲ 서울시가 지난 10여년 간 고도성장으로 튼튼한 경제적 기초 마련, ▲ 세계 사격 및 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 ▲ 올림픽 경기대회에 필요한 재정과 능력 등 필요조건을 구비, ▲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은 아시아 국가 중 유치여건 가장 성숙, ▲ 77년부터 80년대 올림픽 유치라는 잠정적인 목표를 설정해 서울종합운동장 등 이미 30%의 추진 실적 나타냄 등 4가지를 유치배경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88올림픽 유치는 박정희 대통령이 급서하면서 좌초 위기를 맞는 듯했다. 1980년 11월 27일에는 서울시가 대한체육회에 ‘올림픽대회 개최 능력 없음’을 통보했다. 

88올림픽 유치 대표단 서울 도착과 환영식 내용.

하지만 1980년 12월 1일 문교부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이 유치를 계속 추진하도록 지시하면서 유치계획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 1981년 2월 24일에는 서울시와 대한올림픽위원회(KIOC)가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대회 유치 신청서’를 제출했고, 1981년 9월 11일에는 유치종합대책이 발표됐다.

바덴바덴에서 나고야를 따돌리고 88서울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서울은, 이후 서울시와 전 정부 차원에서 88올림픽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See You in Seoul 1988'. 84 LA올림픽에서 88서울올림픽에서 만난 것을 약속하다.

1981년 11월 2일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대회 조직위 사무기구를 통합한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가 발족됐다. 민법상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조직위는 위원장(김용식)을 비롯해 부위원장 4명, 위원 6명 등 11명의 집행위원으로 꾸려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 88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예감케 한 '86서울아시안게임'

86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유치 관련 보고서 전시 모습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 4년 전인 1986년,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며 4년 후 올림픽 성공을 예감케 했다.

앞서 정부는 1979년 8월 22일 국민체육심의위원회에서 86아시안게임 서울 유치 건에 합의했고, 같은해 9월 21일 정부가 대회 유치를 승인했다. 이어 같은해 10월 8일에는 아시아경기대회 유치 도전을 공식 발표했고, 1980년 4월 24일 아시아경기연맹(AGF)에 유치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올림픽으로 통하는 길, 도로망 확장

1981년 11월 26일 AGF총회는 한국을 유일한 개최 신청국으로 선언하고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개최지로 서울을 확정했다.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는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16일 간 열렸다. ‘영원한 전진’을 대회이념으로 내세운 86아시안게임에는 개최국 한국을 비롯해 27개국이 참가했으며, 참가인원은 선수와 임원단을 합해 4839명이었다.

86서울아시아경기대회 기념 메달

엠블럼은 전통 문양 태극에서 기본 도안을 추출하여 태극의 기본 단위를 연속 병렬하여 아시아와 한국의 ‘전진’ 이미지를 담았으며, 전체적인 윤곽은 성화의 불꽃을 상징했다.

대회 결과 중국이 1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금 93개, 은 55개, 동 76개를 획득해 종합 2위였다. 하지만 북한은 불참했다.

 종합 4위 쾌거를 이룩한 88서울올림픽

서울올림픽 공식마스코트 포스터 호돌이

제24회 서울하계올림픽대회는 1988년 9월 17일부터 올림픽 주경기장 개막식을 필두로, 10월 2일까지 16일간 펼쳐졌다. 160개국에서 선수와 임원단 총 1만3304명이 참가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88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는 ‘호돌이’였다. 호돌이는 한국 고유 농악놀이의 상모 돌리는 자세를 하고 있는 아기 호랑이를 형상화하였다. 상모의 긴 끈은 서울의 영문표기 첫 자인 ‘S’자를 표현한 것이다. 

서울시장의 올림픽유치 성공 관련 기자회견 수기 발표문

경기 결과 지금은 생소한 국명인 소련과 동독이 1, 2위를 차지했고, 미국이 3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금 12개, 은 10개, 동 11개 등 총 33개 메달로 종합 4위를 차지하며 스포츠면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확인시켰다. 아쉽게도 북한은 서울올림픽에도 불참했다.

■ 88년 또하나의 올림픽 '제8회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

88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 소개 자료들

제8회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는 서울하계올림픽대회가 끝난지 13일 후인 1988년 10월15일 개막해 10월24일까지 10일간 ‘도전과 극복, 평화와 우정, 참여와 평등’이라는 대회 이념아래 펼쳐졌다. 

61개국에서 선수와 임원단 3258명이 참가했다. 대회 결과, 미국과 서독이 1,2위를, 한국은 종합 7위를 기록했다. 역시 북한은 불참했다.

88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 마스코트 곰두리

88서울장애자올림픽의 마스코트는 ‘곰두리’였다. 곰두리는 아기 반달가슴곰 두 마리가 다리를 묶고 달리는 모습으로, 사람들이 협력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고 평화롭고 조화롭게 함께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의미를 담았다.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는 누구?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과 노태우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은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 1985년 당시 방한한 사마란치 IOC위원장을 영접했으며, 88올림픽 당시 대통령으로서 개회선언을 했다. 

88서울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우리에게 두고두고 흥분과 환희를 안겨준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쎄울 코리아!'를 선언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인 안토니오 사마란치는 1966년 스페인 체육장관에 기용되었다가 같은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이후 1980년 IOC 제7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88서울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 성화대 모양 선정 회의자료(1983년)

IOC 역사에서 사마란치는 성공적인 리더로 꼽힌다. IOC를 파산위기에서 극복하고 올림픽대회를 수익사업으로 전환시키며 전 세계인이 함께하는 행사로 키운 공적을 평가받고 있다. 2001년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종신 명예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한국에는 1982년 올림픽 경기장 시설 시찰과 운영에 관한 제반 상황 논의를 위해 처음 방문하였고, 이후 1984년 올림픽주경기장 개장식에 참가하는 등 여러 차례 내한하였다.

1990년에는 88서울올림픽의 성공 개최에 기여하여 인류 화합과 세계평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서울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88서울하계올림픽 역사와 서울시장들

88올림픽 유치, 준비, 개최 서울시장들의 면면

88하계올림픽을 개최하는데 관여한 서울시장은 모두 5명이다. 

제17대 정상천 시장은 서울올림픽 유치를 공식발표했고, 제18대 박영수 시장은 유치단장으로 바덴바덴 IOC총회에 참석하여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지하철 2호선 전구간 개통 승차권

제19대 김성배 시장은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교대간 을지로입구-성수간 개통과 종합운동장 야구장 완공 및 주경기장 건설을 추진했다.

제20대 염보현 시장은 지하철 2,3,4호선을 완공하고 한강종합개발 추진 및 목동신시가지 개발에 기여했다. 염 시장은 서울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하고 서울올림픽대회를 준비했다. 

제21대 김용래 시장은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와 제8회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를 개최했다.

올림픽주경기장 개장기념 지하철승차권

88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이했던 2018년 한 해도 이제 곧 새로운 2019년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앞으로 맞이할 올림픽은 대한민국과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의 정신처럼 앞으로 다가올 올림픽은 한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 '또 다른 꿈'을 실현시키는 축제의 장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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