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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박용만, 이승만과의 평생 정적·독립전쟁론 주창 '파란만장 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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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박용만, 이승만과의 평생 정적·독립전쟁론 주창 '파란만장 독립운동사'
  • 유원형 기자
  • 승인 2019.03.2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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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유원형 기자] "모든 국민은 군인이 되서 조국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승만은 왜 박용만을 평생의 정적으로 지목했을까?

KBS 1TV ‘역사저널 그날’은 24일 오후 방송되는 214회에서 ‘코리안 스쿨보이, 미국의 중심에서 독립을 외치다’ 편을 통해 독립전쟁론을 주장했던 박용만의 일생을 추적한다.

미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는 안창호과 이승만 외에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이승만이 평생의 정적으로 지목했던 박용만이었다.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일제의 한일 강탄 직전의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 이곳에서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이날 방송에서는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 땅에서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당시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박용만은 1904년 숙부를 따라 미국으로 넘어가 네브래스카주에 군사학교를 만들었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909년 박용만이 만든 군사학교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아본다.

그가 1909년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에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는 독립운동사에서 최초의 해외 한인 군사학교로 기록돼 있다. 이 학교는 장교 양성을 목표로 한 군사학교였다. 

1912년 박용만은 하와이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외 독립운동 단체 통합과 가정부 설립을 주장했다.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박용만은 일찍이 임시정부 수립을 최초로 주장한 인물이었다. 하와이에서도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의 준비를 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다.

박용만과 이승만이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1910년대만 해도 둘은 의형제로 돈독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관계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 때문이었다.

박용만은 무장투쟁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이승만은 박용만의 무장투쟁을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하며 엇갈렸다. 이후 잇따라 한인 내부 사회에 분열과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파고들 예정이다.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이후 박용만의 최후는 어떻게 됐을까?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나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1919년 임시정부에서 초대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참여를 거부했다.

이후 박용만은 독립운동 진영에서 친일 혐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23년 말에서 1924년 초, 일본을 경유해 경성을 거쳐 연해주로 이동한 그의 행적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랬다는 증거는 전무했다.

박용만은 1928년 10월 17일 47세의 나이로 베이징 주택가에서 살해 당하며 독립운동가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박용만에게 당시 왜 친일 논란이 일었는지 그 이유도 알아보고 독립운동사에 파란만장한 족적을 남긴 박용만의 면모를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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