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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리더십 위기 시대'에 만나는 세종이야기① 한글에 숨은 애민정신과 창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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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리더십 위기 시대'에 만나는 세종이야기① 한글에 숨은 애민정신과 창의성
  • 유필립 기자
  • 승인 2015.02.20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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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요즘 우리나라 뉴스를 보면 도무지 밝은 소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기쁜 소식은 가물에 콩 나듯하고 온통 우울한 소식들 뿐이다.

소통과 리더십 논란 속에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지지부진하고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국회 등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심각한 수준이다. 엄격한 도덕성이 필요한 총리 후보들의 잇딴 낙마와  신임 총리 인준 과정에서 터져 나온 여야 논쟁과 납득하기 어려운 흠집들은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든다. 경제·사회적으로는 강자가 약자의 권리를 빼앗거나 무시하는 '갑질 논란'이 끊임없이 터져나오고 있다.

시대적 요구와 동떨어진 정치·경제·사회적 부정합성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더욱 비게 만들고 몸과 마음을 피폐시키고 있다.

◆ '소통의 르네상스'를 이뤘던 위대한 임금 

▲ 광화문 광장 중앙에서 온화한 위엄으로 대한민국을 응시하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 600여 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오늘날에도 위장자들에게 백성을 위한 리더의 길이 무엇인지를 설파하고 있는 듯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바로잡아야 우리나라가 모순 없는 '정합성(整合性)'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로 '진정한 리더의 부재'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민들에게 몸과 마음,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야 할 위정자와 지도층 인사들이 오히려 더 부패하고 더 그릇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 통합을 이끌어 내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하고 있는 형국이다.

논어에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아서 백성은 모두 그 풍화를 입는다'는 뜻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과 통한다.

위정자들은 백성의 눈높이에서 그들이 필요한 게 뭔지 고민하고 소통하며 솔선수범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를 보면 '국민과의 소통'이라는 단어는 말뿐인 겉치레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우리나라에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소통하고 정책을 개발하고 정치를 펼쳤던 임금님이 계셨다. 바로 세종대왕(世宗大王 , 1397~1450)이다.

당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굳게 믿던 시대였다. 굳이 백성의 편에 서지 않아도 통치하는데 큰 지장이 없던 시대였다. 당시 위정자들은 백성들이 이 논리에 반박할 근거를 갖지 못하도록 오히려 무지몽매함을 강요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달랐다. 백성의 입장에서 통치하려 했고 백성들의 윤택한 삶을 위해 노력했다. 시대적으로 한계도 존재했지만 군주로서의 권위와 위력을 백성을 위해 쓰려고 했다. 그의 '민본'과 '소통' 노력은 600년의 타임라인을 뛰어넘어 2000년대 한국 정치에 큰 울림이 되고 있다.

2015년 을미년 양띠해 정월.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을 둘러보고 그 지하에 있는 전시실인 '세종이야기'를 들렀다. 이곳에서는 청와대와 중앙청도 지척이다.

[* '세종이야기' 관련 자료는 전시관의 기록과 사진, 그림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진정한 위엄'을 말하다 

세종대왕 동상은 경복궁 앞 세종로에 조성되어 있는 광화문광장 중앙에 위치해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자료에 따르면, 동상은 높이 6.2m, 폭 4.3m 규모로 기단 위에 앉은 모습으로 남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 25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동상의 모습은 왕의 위엄보다는 온화한 표정으로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또 다른 손은 백성들을 다독이는 듯한 친근한 느낌을 준다.

세종대왕 동상 앞쪽에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혼천의(渾天儀), 조선 세종 이후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쓰인 측우기(測雨器), 17~18세기에 제작된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모형이 설치돼 있다.

 

동상 뒤편에는 6개의 기둥이 광화문을 향해 서 있는데 집현전 학사도, 주자소도, 6진 개척도, 대마도 정벌도, 지음도, 서운관도를 부조 형식으로 조각해 세종대왕의 업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상 기단 뒤편에는 세종이야기 전시관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방문자를 안내한다. 

 

 

 

'세종의 빛으로 서로 사맛다'                                     * '사맛다'는 '뜻을 통하다'는 뜻.

'세종이야기'는 전시관을 연 취지를 '세종의 빛으로 서로 사맛다'라는 제목 아래 시작했다.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적 자존감과 민족적 긍지를 알리는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세종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한성부 준수방(지금의 서울 통인동 일대)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2살이던 1418년 아버지인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3년 후면 즉위 600주년이 된다.

세종대왕은 지극한 애민 정신과 민본 사상에 기초하여 한글을 반포하고, 과학 기술, 문화 예술, 군사, 외교, 농경, 천문의 발달 등 조선 518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르네상스 시대를 이룩하였다.

전시관은 '세종의 빛, 밝게 떠올라'라는 주제의 로비가 맨 먼저 방문자를 마중하고,  '인간 세종' '민본 사상' '한글 창제' '과학과 예술' '세종의 군사 정책' '소통의 뜰' 등의 마당으로 꾸며져 있다.

 

 

▲ 고은 시인의 '아 세종'

"아 세종 / 그 불멸의 이름으로 내일을 쓴다'

전시관 입구 오른편에는 고은 시인의 '아 세종'이 한글 디자인과 더불어 벽에 아로새겨져 있고, 입구 오른편에는 한글의 역사와 아름다움이 멀티플레이 영상으로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꿨다.

입구에는 또 송강 정철(1536~1593)의 주옥같은 가사인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액자 속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 서예 작품은 사미인곡의 원전을 바탕으로 현대 서예가 임현기가 쓴 것이라고 한다.

정철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을 가장 쉽고 아름답게 표현하며 16세기 한글 가사 문학의 꽃을 피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사미인곡은 송강 정철이 1588년 53세 되던 해에 지은 장편 가사이다. 정철이 전라도 창평으로 내려가 은거하고 있을 때 쓴 작품으로, 남편과 생이별한 여인의 애절한 마음에 빗대어 자신의 충절과 연군의 정을 능숙한 한글 구사력과 유려한 필치로 그렸다.

▲ 송강 정철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사미인곡 이후에 쓰여진 송강 정철의 대표 가사로 임금에 대한 충정을 대화체로 구성하였다. 섬세한 심성을 지닌 두 여인의 대화를 통하여 임금에 대한 정철의 충절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애틋하고 간절한 느낌을 갖게 한다.

▲ 송강 정철 속미인곡.

한글 창제 '온빛, 온누리를 밝히다'

세종대왕이 후세에 남긴 최고의 업적은 뭐니뭐니 해도 '훈민정음(訓民正音)', 바로 '한글'이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글자'다. 우리나라만의 자랑이 아니라 세계의 유산이다.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르는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시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반포일, 창제 원리까지 알려져 있는 문자이다. 1910년대 한글학자들이 훈민정음을 '한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글'은 '큰 글'이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은 5자의 자음 기본자와 3자의 모음 기본자를 가지고 전체 문자 체계를 만들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모양의 기본자와, 거기에 획이나 글자를 더하는 간단한 원리만 알면 한글의 모든 글자를 쓸 수 있다.

한글은 빠른 정보 입력이 가능한 문자로 오늘날의 IT 정보화 시대에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원리는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탄하게 할 만큼 과학적이며, 우리는 지금 한글을 이용하여 양질의 디지털 정보를 어느 나라보다도 더 빠르고 편리하게 구축하고 있다.

▲ 자음 제자 원리

 

▲ 모음 제자 원리

정보화 시대에 최적화된 과학 언어, 한글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에 만들어졌으나 그후 3년 동안 ‘용비어천가’를 짓는 등 훈민정음의 체계를 실전에서 다듬은 뒤에야 비로소 반포되었다. 훈민정음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모두 28자였으나, 그 중 아래아, 여린히읗, 반시옷, 옛이응이 사라지고 지금은 24자만 사용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자음 기본자 ㄱ ㄴ ㅁ o ㅅ은 사람의 발음 기관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초성(初聲) 17자는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하여 나머지 글자를 만들었으며, 중성(中聲) 11자는 천, 지, 인(天地人)의 모양을 본떠서 기본자를 창조했다.

전시관에는 세종대왕이 백성을 생각하며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을 구상하고 만들고 준비하고 반포하는 과정이 미니어처로 쉽게 설명되어 있다.

 

 

 

 

▲ 한글 창제와 반포 과정을 설명한 미니어처

'한글 창제' 코너에는 또 한글을 세상에 처음 선보일 때 만들었던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언해본'은 물론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등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훈민정음에 애착이 강했고, 제작과 반포, 홍보 과정에서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검증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훈민정음 언해본

훈민정음언해본(訓民正音諺解本)은 '훈민정음' 원본의 본문을 번역한 언해본(한문으로 된 내용을 한글로 풀어서 쓴 책)으로서 세조 5년(1459)의 간행으로 추정되는 ‘월인석보(月印釋譜)’ 권 1책 첫머리에 실려 있다. 총 15장으로 되어 있다.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의 본문을 먼저 쓰고, 그 아래에는 한글로 새로이 한문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어 한문을 모르더라도 훈민정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한 책이다. 세종 어제의 본문, 집현전 학사들이 지은 해례, 정인지의 해례 서문으로 되어 있다. 1446년(세종 28)의 간행으로 추정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중세 한국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1445년(세종 27)에 우리말 노래를 먼저 싣고 그에 대한 한역시를 뒤에 붙인,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반포하기 전에 제일 먼저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이 노래는 조선 왕조 건국의 당위성을 널리 퍼뜨리고자 지은 것이다. 총 125장 10권 5책으로 되어 있다.

▲ 월인천강지곡

1449년(세종 29)에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상·중·하 3권에 500여 수의 석가모니를 칭송하는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용비어천가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한국 최고(最古)의 가사이며, 한글 전용이 행해진 최초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조선 전기의 국어를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으로, 보물 제39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세계로 나가는 한글, 찌아찌아족과 만나다

 ▲ 한글을 부족어 표기에 적용해 보고 있는 찌아지아족.

한글은 우리나라의 국경을 벗어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길을 찾고 있다.

찌아찌아족은 부톤 섬의 바우바우시에 사는 소수 민족으로, 인구는 약 8만 명이다. 4200㎢ 면적의 바우바우시는 부톤 왕국의 옛 수도였기 대문에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문화 수준도 상당히 높은 곳이다.

찌아찌아족은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고유의 문자가 없었다. 그들은 고유어를 잘 보존하기 위해, 로마자보다 고유 언어의 발음을 잘 살려 적을 수 있는 한글을 2009년 7월부터 초등학교 몇 곳에서 부족어 표기에 적용해 보고 있다.

예술로 재탄생한 한글 의자

 

 

 

 

 

'세종이야기' 전시관 한 켠에는 한글로 디자인된 의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의 아름다움과 편안한 의자가 만나 공간에 여유와 풍취를 더하며 멋진 조화를 이뤘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 때 미적 감각까지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계속> 

'리더십 위기 시대'에 만나는 세종이야기② 백성을 섬긴 어진 임금 로 이어집니다.

philip@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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