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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인터뷰] ① '코트의 철인' 주희정, "오기·투혼·배고픔이 나를 키운 8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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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인터뷰] ① '코트의 철인' 주희정, "오기·투혼·배고픔이 나를 키운 8할"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02.13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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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경기 바라보는 주희정, 18번째 시즌 보내지만 챔피언 반지는 단 하나..."아직도 배고프다"

[300자 Tip!] '코트의 철인'. 바로 주희정(38·서울 SK)을 일컫는 말이다. 프로농구 KBL 최초의 신인선수상 수상자인 그는 아직까지 코트를 누비고 있다. 이후 KBL에 들어온 후배들이 벌써 은퇴하고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선수로 활약한다. 보통 노장 선수라고 하면 벤치를 지키고 있거나 식스맨으로 기용되곤 하지만 주희정은 여전히 우승후보 SK 전력의 주축이다. 물론 김선형(27)이라는 걸출한 후배가 있어 주전 베스트 5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부상 공백이 있거나 체력 안배를 위해 기용되면 자신의 몫을 100% 발휘한다. 주희정은 벌써 KBL에서 18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다. KBL 사상 첫 900경기 출장 대기록을 남긴 그는 이제 1000경기도 바라본다. "아직 두 시즌 더 뛸 수 있다"고 하니 1000경기는 물론이고 20번째 시즌도 채울 기세다.

▲ KBL 최초의 신인왕이 아직까지 코트를 누빈다. 바로 서울 SK의 '큰 형님' 주희정이다. 약관의 나이에 프로에 발을 내딛은 그는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까지도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후배들과 당당하게 경쟁을 펼친다.

[용인=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최대성 기자] "저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것은 오기와 투혼, 배고픔인 것 같아요. 이런 마음이 바탕이 되니까 지금도 뛰고 있는 것 같아요. 선수에게 중요한 웨이트 트레이닝도 빠지지 않고…."

900경기을 넘어 1000경기 출장을 바라보는 그에게 롱런 비결을 물었더니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요약하자면 노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오기와 투혼, 배고픔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니 구구절절 사연이 많았다.

그가 프로농구에 발을 들여놓은 때가 약관이던 1997년. 고려대를 중퇴하고 연습생 신분으로 원주 나래(현재 원주 동부)를 통해 프로에 발을 들였다. 최명룡 감독의 집중 지도를 받으며 주전 포인트가드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대학을 졸업한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신인상까지 받았다. 당시 신인상 경쟁자들이 추승균 전주 KCC 감독대행과 박재헌 청주 KB스타즈 코치였다.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KBL 무대에 들어섰지만 최고였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는 그도 인정한다. 하지만 오기와 투혼, 배고픔이 18번째 시즌을 보내고 19번째와 20번째 시즌을 바라보는 그의 경쟁력이다.

▲ 주희정은 단 한번도 쉰 적이 없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슛 연습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길들여진 습관 때문에 오히려 훈련을 하지 않으면 컨디션이 떨어질 정도다. 이는 아직도 25분 이상 뛸 수 있는 체력의 근원이다.

◆ "나는 3점슛 못 쏘는 반쪽짜리 포인트가드였다"

주희정은 한번도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인정받지 못했다. 언제나 언론은 이상민 서울 삼성 감독과 신기성 부천 하나외환 코치, 김승현 스카이스포츠 해설위원에 주목했다. 이후 양동근(울산 모비스) 등이 최고 가드로 주목받았지만 주희정은 경쟁 구도에서 빠져 있었다.

"이상민, 신기성, 김승현 등이 최고 가드로 인정받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했죠. 언론이 나를 주목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언짢았지만 모두 나름 이유가 있었어요. 반쪽짜리 포인트가드였거든요."

KBL 최초의 신인선수상을 받았던 그였다. 그리고 2000~2001 시즌에는 서울 삼성을 챔피언으로 이끌고 포스트시즌 최우수선수(MVP)에도 선정됐다. '반쪽짜리'라는 말은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3점슛을 못쐈어요.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3점슛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제 주특기는 파워와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돌파에 의한 득점이었지, 외곽슛은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프로에서 뛰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 강동희(전 동부 감독) 선배와 매치업하면서였어요. 제가 외곽에서 공격하고 있는데 자유투 쏘는 곳에서 수비하고 있는 겁니다. 3점슛을 쏘지 못한다는 것을 파악당한거죠. 미리 안에서 막고 있으니까 돌파가 잘 될 리가 있나요."

그래서인지 두,세 번째 시즌에서 그의 득점력은 뚝 떨어졌다. 나래에서 1997~1998 시즌 뛰었을 때 평균 12.7득점이었던 그의 공격력은 1998~1999 시즌 8.8득점, 1999~2000 시즌 9.2득점으로 낮아졌다.

"반쪽짜리였으니 스타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죠. 게다가 저는 코트 안에서는 말을 많이 하는데 밖에서는 말수도 적어서 스타성도 떨어졌거든요. 속에서는 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는데 아무래도 쇼맨십이 부족했죠. 빨리 내 무기를 찾아서 팬들에게 재미있는 농구를 보여주겠다는 생각만 있었어요. 결국 3점슛을 꾸준히 연습했죠. 고등학교(동아고) 때까지 3점슛을 쏜 기억도 없던 제가 2년차, 3년차가 되니까 그때서야 절실하게 느낀 겁니다. 3점슛을 장착하게 되면서 비로소 어느 정도 갖춰진 포인트가드가 됐던 것 같아요."

▲ 20세 어린 나이에 프로에 데뷔해 신인상까지 받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주희정은 단 한번도 최고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전성기였을 때도 이상민, 신기성, 김승현 등에 밀린 2인자였다고 자평한다.

◆ "두번이나 은퇴·선수생활 생각, 정규리그 MVP는 영광이자 마음의 짐"

주희정은 2000~2001 시즌 삼성을 챔피언에 올려놓으면서 비로소 최고 반열에 올라서는 듯 했다. 그러나 2001~2002 시즌 삼성이 포스트시즌에 나서지 못하면서 그 역시 선수생활의 위기를 맞았다. 우승한 팀이 그 다음 시즌 포스트시즌에 나서지 못한 것이 사상 초유의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겨우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존심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자존심도 상했고 무릎도 좋지 않아 농구를 몇 년 더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던 시기였어요. 당시만 해도 2~3년만 하고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벌써 10년 넘게 더 선수생활을 하고 있네요. 지금 생각해도 희한하고 제 스스로도 대견합니다."

하지만 또 한번 선수생활에 회의를 가진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정규리그 MVP가 됐던 2008~2009 시즌이 끝나고서였다. 당시 소속팀 안양 KT&G(현 안양 KGC)은 7위에 그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부상 선수가 속출하는 과정 속에서도 맹활약한 주희정에게 MVP가 주어졌다. 당시 그는 평균 15.1득점에 1.9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다. 이 때 기록은 커리어 하이다.

"황진원, 양희종 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음에도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했을 때 너무나 죄송했어요. 유도훈(현 인천 전자랜드) 감독님은 중도 사퇴하시고. 노력한만큼 성과를 얻지 못해서 회의를 느꼈죠. 비시즌 때는 좋았어요. 그런데 외국인 선수가 부상당하고 서너 번 교체되면서 성적도 크게 떨어졌죠. 저는 당연히 MVP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규리그 경기가 모두 끝난 다음날 MVP가 됐다고 전화를 받았어요."

그래도 안양에서 보냈던 네 시즌을 가장 기억에 남겨두고 있었다.

"아무래도 삼성에서 가장 오랜 시즌을 보냈기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긴 하지만 농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안양에 있었을 때 유도훈 감독님 밑에서 배웠던 것이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3점슛 능력을 장착해 어느 정도 갖춰진 포인트가드가 됐다면 안양에서 완성된 포인트가드가 된거죠. 정규리그 MVP에 오른 것 역시 그것에 대한 인정이기도 했죠. 하지만 나만 인정받은 것이잖아요. MVP 받아서 기분이 좋긴 했지만 너무나 죄스러웠죠. 아직까지도 마음의 짐으로 남겨두고 있어요."

▲ 주희정은 2008~2009 시즌 정규리그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정작 소속팀 안양 KT&G는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완성된 포인트가드로 인정받았지만 팀 성적이 좋지 못해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 챔피언 반지는 단 하나 "아직도 배가 고프다"

이제 18번째 시즌을 보낸다고 하니 농구가 슬슬 지겹지 않을까. 그리고 노장이니까 천천히 마지막을 준비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이는 기자만의 어리석고 나태한 생각이었다. 주희정은 갈 때까지 간다, 끝까지 간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하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그에게 챔피언 반지가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상민 감독님이나 추승균 선배를 보면 챔피언 반지가 여럿인데 저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게다가 18번 시즌을 보내면서 챔피언결정전을 치러본 것도 단 두 시즌이고 출전경기도 9번밖에 안됩니다. 아직도 배가 고파요."

삼성에 있었을 때 정규리그 1위와 챔피언을 동시에 맛본 적이 있다. 18번의 시즌을 보내면서 10번이나 플레이오프에 나가 49경기에 출전했으니 우승에 도전한 적은 많다. 그러나 우승과 인연이 없는 선수다. 그렇기에 우승에 대한 갈망은 그 누구보다 더할 수밖에 없다.

"사실 통합우승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복인 것 같아요. 물론 꾸준히 몸 관리를 하면서 지금까지 뛰고 있는 것도 내 스스로 대견하긴 하지만 그래도 챔피언 반지 하나는 더 받아봐야죠."

하지만 이런 생각도 몸이 따라줘야 한다. 그렇기에 근성과 투혼, 배고픔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고 한다. 그것들이 열정을 만들었고 그 결과 거의 개근에 가까운 정규리그 출장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12일까지 통산 915경기를 출전하면서 경기에 빠진 것은 12번밖에 안된다.

"솔직히 저도 사람인지라 부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응급수술을 받아서 못 뛴 경기도 있죠. 그렇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과 배고픔, 근성 덕분에 큰 부상 없이 참고 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음이 8할이라면 나머지 2할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빠짐 없이 뛸 수 있었던 원동력이죠. 초등학생 때부터 습관이 됐기 때문에 이젠 오히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야만 몸이 좋아집니다. 물론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지쳐서 빠진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릎 보강 운동이나 사우나 등을 통해 땀을 빼고 체력을 키우는 개인 운동을 30분씩은 했어요. 아예 빈둥대고 놀았던 적은 지난 20년 가까이 지내오면서 한번도 없었어요."

▲ 주희정은 지난해 12월 22일 KBL 역대 최초로 90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25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가진 900경기 출장 기록 기념식. [사진=KBL 제공]

[SQ인터뷰] ② 5년째 쓰는 '비밀일지', 이미 출발한 주희정의 미래 로 이어집니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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