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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성에 소멸되어 가는 음악의 현상학 관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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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성에 소멸되어 가는 음악의 현상학 관점들
  • 김신일 음악평론가
  • 승인 2015.02.2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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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김신일 음악평론가] 우리는 언제부턴가 문화의 가치를 본질에 두지 않고 보다 자극적이며 격렬한 단발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스포츠 종목마다 도핑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지만, 더 뛰어난 성적으로 더 많은 환호와 인기를 얻기 위해 불법 스테로이드 제를 이용하는 선수들도 종종 있다. 그들은 그 행위가 발각되었을 때 퇴출이라는 '불명예의 말로'를 인지하면서도 불법을 서슴없이 선택한다.

이런 스포츠 정신의 망각이 낳은 폐해는 경기를 열심히 했는가의 관점보다 얼마나 뛰어난 성적인가를 우선시하는 현시대의 씁쓸한 방증이기도 하다.

▲ [사진= 김신일 제공]

정상적인 스포츠 무대에서도 격렬한 경쟁을 앞세운 종목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 펀치로만 승부하는 권투중계보다는 생동감 넘치고 다양한 기술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종합격투기에 더 환호한다.

올림픽 종목에서도 단조로운 경기방식을 고집하면 퇴출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다. 보다 공격적이고 화려한 스포츠가 상대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커졌다. 스포츠 본연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조치라기 보다는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방송중계권료와 광고료의 총량을 키우려는 수익적인 이해타산의 측면이 강하다.

대중음악의 세계에서도 '보다 강렬하고 자극적으로' 라는 시대적 흐름은 통한다.

일례로,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 등과 같은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음 지르기'는 음악적 완성도 차원을 넘어 가수가 프로그램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 몸부림'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같은 흐름을 반영한 경연 프로그램의 '저음불가(?)' 음원들은 각종 인기차트에서 아이돌댄스 음악과 묘한 공존을 형성하고 있다.

대중가요에 필요한 조건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무언가 잘 섞여져 있는 모양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경연 프로그램에서 나온 음원이 아닌, 그와 동일한 조건으로 제작된 스튜디오 음반이라면 과연 동일한 인기를 장담할 수 있을까? 그 역설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단순한 명제가 아니다.

음악의 본질 이전에 그들이 경합을 하며 양산된 대립구도의 분위기에, 우리가 더 많은 감흥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된다.

▲ [사진=김신일 제공]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과 그들의 댄스음악은 뮤지션들의 개성보다는 강한 비트와 강렬한 댄스가 흐름을 지배한다. 신경써서 보거나 듣지 않으면 천편일률적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들의 음악은 본래 지니고 있는 장르나 뮤지션의 색채와 무관하게 '케이팝'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낳았다. 그러나 그것에 잠식된 다양성은 획일적인 우리만의 고유정서로 국한되게 만들었다.

댄스뮤직이 여러 장르 중 한 형태로서 대중가요를 풍부하게 만드는 조미료같은 역할이 아니라, 아이돌 댄스뮤직에 종속된 문화로서 '케이팝'이라는 대명사 아래 단색으로 응축되어 버린 느낌이다.

그 때문에 우리의 대중가요는 '케이팝'만 존재하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두세 번을 집중해서 봐도 그들 개개인이 누군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한 팀에서 다수의 아이돌이 비쥬얼로 무장한 채 안방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아이돌의 우상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청소년에겐 휴식과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기성세대들에게는 가수의 존재마저도 망각케 하는, '숨은그림 찾기' 고전을 면치 못하게 하는 어려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최근 오락 방송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는 지난 90년대의 인기 가수들을 무대에 올려 기성세대의 잃어버린 감성을 이끌어내 화제가 됐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맴돈 생각은 '저 환호하는 기성세대들에게 2000년 이후의 대중가요는 어떤 의미일까' 였다. 누군가에 있어서 아이돌 댄스음악은 재즈보다도 더 적응하기 어려운 음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성세대의 단순한 관점으로서 '추억의 그리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누군가'도, 자신이 케이팝이라는 독특한 '거대문화'에 적응 못하는 폐물의 존재가 아니라 '비옥한 대중음악'을 만들어 가는데 '꼭 필요한 대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비단 현실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 우리 대중가요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기성세대는 지금, 1980년대 LP라는 미디어의 그 커다란 음반재킷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조차 묵살당한 거친 대세의 흐름에 살아가고 있다.

▲ [사진= 김신일 제공]

필자는 과거 프로그레시브록 밴드인 'Yes'의 전 앨범을 LP로 소장한 적이 있었다. 음악의 좋고 나쁨 이전에 커버아트의 거장인 로저 딘(Roger Dean)의 그림에 매혹되어 하나 둘씩 모으다 보니 전체를 소장하게 됐었다.

앞으로 창작될 음반에 '재킷을 커다랗게 만들자'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 '소멸된 세상'의 중심에서 우린 과연 문화적 가치의 다양성에 대해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반성하게 된다.

우리는 방송매체에 비쳐진 가수들에게서 음악의 본질을 느끼려 하기 보다 '오락'이라는 합리화의 방패를 가지고 지나친 대립구도를 즐기는, '전쟁의 탐닉자'는 아닐까 돌아 보게 된다.

고리타분한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본질을 숫자로 설명했으며 보에티우스는 우주와 인간, 악기로 분류해 음악에 필요한 성질을 조화롭게 정의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본질적인 부분에 가장 부합되는 음악을 듣고 싶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약간은 불편함을 감수할지언정 작게 나마 마음 한 켠에 음악의 소중한 본질을 되새길 수 있을 '차 한잔'과 같은 여유와 관심을 가져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소중한 문화 자산을 스스로 지키는 성숙한 대중의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적어도 경연대회에서 조용한 발라드가 자주 흘러나오고, 아이돌 댄스만이 아닌 다양한 음악들이 인기차트를 채우거나, 가수가 오락 프로그램보다 음악 프로그램에 더 자주 출연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본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돈에 지배당한 나머지 본질을 망각하고 허구를 좆아가는 경향이 있다.

인지할 수 없어서 본질의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인지, 인지하면서도 별 수 없이 본질을 망각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성에 역행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 모두가 잠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kimshinil-_-@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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