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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랜드 '셀프 트래시토크'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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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랜드 '셀프 트래시토크'의 역설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5.03.20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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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훈 감독 충격요법과 외인들의 다툼...집중력 높이고 분위기 바꾸는 즐거운 묘약

[스포츠Q 이세영 기자] 트래시 토크(Trash talk)의 사전적인 의미는 ‘농구 코트에서 거친 몸싸움만큼이나 상대를 교묘하게 괴롭히는 말’이다. 이는 양 팀이 심리적인 부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미국프로농구(NBA)에서는 주로 특급 스타들이 트래시 토크의 표적이 된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도 예외는 아니다. 조던은 1992년 “네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눈 감고 자유투를 넣을 수 없을 것”이라는 디켐베 무톰보의 도발에 웃으며 기꺼이 도전에 응했고 깨끗하게 성공한 뒤 “NBA에 온 것을 환영한다”라고 말했다. 1992년은 무톰보의 데뷔시즌이었다.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 1차전 인천 전자랜드-원주 동부전에서도 트래시 토크가 나왔다. 그런데 양 팀 선수들이 싸운 게 아니라 같은 팀 선수들끼리 언쟁을 벌였다. 19일 원주 종합체육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은 자신이 주문한 플레이를 선수가 하지 않았을 때 크게 질책하며 정신력을 무장하게 한다. [사진=KBL 제공]

◆ 유도훈 감독의 엄포와 외인들의 입씨름

34-30으로 쫓긴 상황에서 2쿼터 2분 45초가 남은 시점. 동부의 밀착 수비에 외곽에서 골밑으로 공을 투입하지 못한 전자랜드는 어이없이 공격권을 내줬다. 그러자 유도훈 전자랜드 감독은 가드 박성진을 벤치로 불러들이며 “그렇게 할 거면 집에 가!”라고 호통을 쳤다.

유 감독으로선 박성진이 뒤에 숨어서 공을 잡지 않으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경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 포인트가드가 자신 없는 플레이로 일관하자 크게 꾸짖을 수밖에. 전자랜드 선수들은 정영삼이 동부의 타이트한 수비에 막혀있을 때 누구 하나 공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결국 공격 제한시간에 쫓겨 던진 정영삼의 슛은 림을 벗어났고 유도훈 감독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외곽에 있으면서도 협력하지 않은 박성진이 타깃이 됐다.

외국인 선수들끼리 입씨름도 눈길을 끌었다. 팀의 에이스이자 주장 리카르도 포웰은 이날도 만점 활약을 펼쳤다. 21점 10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66-62 승리에 발판을 놓았다. 하지만 2옵션 빅맨 테렌스 레더는 8분 31초를 소화하며 1점 3리바운드 1어시스트에 그쳤다. 쉬운 득점 기회를 번번이 날리는 등 유독 집중력이 떨어졌다.

이에 포웰이 주장으로서 레더에게 충고했다. 2쿼터 3분 10초가 남은 작전타임에서 포웰은 벤치에 앉아 있는 레더에게 집중력을 높이고자 한마디를 던졌다. 현장 중계 마이크가 닿지 않은 곳에서 이야기를 해 내용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레더를 자극하는 말을 했음이 분명해보였다. 포웰의 말을 들은 레더도 반격했기 때문. 둘은 감정이 격해져 티격태격 싸웠다.

▲ 포웰(왼쪽)과 레더가 19일 동부와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 1차전을 마친 뒤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KBL 제공]

◆ '건설적인 입씨름' 전자랜드만의 팀컬러로 자리잡다

언뜻 보면 감독의 충격요법과 선수들 간 언쟁이 팀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건 않을까 우려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자랜드의 ‘셀프 트래시 토크’는 침체된 팀 분위기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포웰이 주장으로서 선수들에게 자극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은 이제 그만의 소통방법이자 리더십으로 자리 잡았다. 레더 역시 자신의 플레이가 맘에 안 들다보니 포웰에게 맞받아쳤고 그 때문에 언쟁을 벌였다. 사사로운 감정싸움이 아니라 팀이 바르게 가기 위한 ‘건설적인 입씨름’을 한 것이다.

실제로 포웰과 레더는 팀 승리로 경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기뻐한다. 그저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몸을 부딪치며 포옹하고 세리머니를 펼친다.

유 감독 역시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날 자신이 질책한 선수를 언급하며 감싼다. 제자가 더 잘됐으면 하는 스승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랜드의 언쟁은 해당 선수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음을 다잡는 특효약이 되고 있다. 이것이 코트에서 경기력으로 이어지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셀프 트래시 토크는 전자랜드만의 특별한 팀컬러로 자리잡았다. 포스트시즌 4연승을 달리며 '6위의 언더독 신화'를 위해 기세를 올린 전자랜드의 힘이기도 하다.

syl015@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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